<-- 11. 메리나를 향해 -->
세이렌은 눈물을 멈췄지만 쉽사리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비록 남자로 키워지고, 남자처럼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았지만. 강압적인 성폭행의 피해자가 된다는 건, 성별과 관계없이 충격적인 일이니까.
마비된 상황에서도 느껴지는 그 끔찍한 손길이, 맡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 그 숨결이, 탐욕으로 물든 그 혐오스러운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그 와중에 반응했던 자신의 몸이 더욱 싫었다.
레이판은 과다출혈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쓰러져 죽었다. 더는 그녀를 괴롭힐 일이 없을 것이다.
“세이렌...”
“힉!”
프레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부들부들 떤다.
“미안... 미안해요.”
프레이는 그녀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애초에 이럴 경우를 맞닥뜨리는 게 흔하지는 않으니까.
‘일단... 진정되도록 놔두는 편이 나을까...’
프레이는 마차에서 떨어져 레이판에게 다가갔다. 맥을 짚어보니 확실히 저세상 사람이 됐다.
‘개새끼...’
다시금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프레이는 레이판의 몸을 뒤졌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놈이지만 그놈의 물건은 죄가 없으니.
품에서 돈주머니와 약병, 그리고 해골 모양의 토템을 찾아냈다.
‘돈은... 꽤 많군.’
그래도 상인이라는 걸까. 주머니에 은화를 얼추 세어보니 70개, 금화가 3개나 있었다.
총 3골드 70실버. 프레이는 물건을 챙겼다.
‘이건... 그놈이 사용한 마비 독인가.’
약병을 바라보고 있자니 메시지가 나타났다.
[테트론 독]
[푸른 문어에게서 추출한 독소를 희석시킨 용액. 대상에게 독소가 주입되면 전신의 마비가 옵니다. 사용량에 따라 마비시간이 달라집니다.]
‘그럼 이 토템이...’
[모르테미안 토템]
[죽음의 신 모르템을 섬기는 신도의 상징. 사령술의 효과를 증폭시켜 주며, 언데드의 적개심을 없애줍니다. 모르테미안은 모든 국가가 지정한 공공의 적입니다. 토템이 발각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죽음의 신이라고...?’
프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토템을 챙겼다. 혹여나 다시 좀비견이 덤벼들 우려가 있었으니.
그는 다시 세이렌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 잠깐만 있어요. 저 집안을 좀 조사하고 올게요.”
그 바르푼이라는 노인네의 집안에도 유용한 물건이 있을지 모른다. 그가 막 일어서려는 찰나 세이렌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마.”
“세이렌?”
“가지마...”
그녀가 불안해한다. 프레이는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가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준다. 아직 진정이 되지 않는지 그녀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자연스레 그녀를 부축해서 바르푼의 집으로 향했다.
“일단... 거기서 앉아 있어요. 이 아래에는 봐서 좋을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낡고 퀴퀴한 집안이었지만 그래도 앉을 곳은 있었다. 세이렌을 의자에 앉히고 프레이는 열어 놓은 창고로 향했다.
‘무슨...?’
프레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머리를 잃은 바르푼의 몸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언데드가 된 건가?’
그가 행하던 의식의 제물로 자신이 바쳐진 걸까. 다행히 토템 덕분인지 그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지.’
프레이는 검을 빼 들어 바르푼의 사지를 잘라냈다. 바르푼의 로브 사이로 레이판이 갖고 있던 토템이 떨어졌다.
일단 모르테미안 토템을 하나 더 챙기고, 걸어가며 쇠사슬에 묶여있는 좀비들의 머리를 모두 꿰뚫었다.
제단으로 다가가니 옆에 책이 놓여 있다. 바르푼의 일지로 보였다.
일지를 펼치니 좀비 제작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좀비는... 고기를 섭취하면 스테이터스가 증가하나 보군.’
레이판은 진짜로 고기를 납품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가끔씩 좀비 제작에 필요한 사람들을 납치하기도 했던 것 같았다.
이번에는 프레이와 세이렌이 목표였고, 그는 지금 차디찬 주검이 되었다.
‘개새끼...’
다시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었다.
그렇게 일지를 읽어 내려가자니 곧 메시지가 나타났다.
[사령술의 정보를 습득했습니다.]
[사령술은 모르템을 믿을 경우 획득할 수 있습니다. 개종하시겠습니까?]
프레이는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이를 물었다.
‘유저 중에도 이런 짓거리를 하는 놈이 있다는 건가?’
그가 사령술을 익힐 수 있다면, 유저도 가능할 터였다. 당연하게도 그는 바르푼처럼 추악한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프레이는 바르푼의 일지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곧장 창고를 나왔다. 세이렌의 시선이 느껴졌다.
프레이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집안을 뒤졌다. 바르푼도 사람인지 기름과 성냥이 보관하고 있었다.
곧바로 기름병을 들고 창고 안에 뿌렸다.
“가요.”
세이렌을 대할 때는 조심스럽게, 프레이는 성냥에 불을 켜고 창고 안으로 떨어뜨렸다.
화르륵-
부어놓은 기름에 불이 붙으며 창고 안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시체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곧 불이 번져 이 집까지 전부 태우리라.
다행히 바르푼의 집과 나무 사이의 거리는 충분했기에 숲에 불이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이렌이 제대로 걷지 못해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아...”
그녀는 짧게 소리를 낼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프레이는 다시 그녀를 마차 안에 앉히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조금 쉬어요.”
“고마워...”
세이렌은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지었다. 프레이는 말을 몰아 숲을 벗어났다.
화르륵-
집까지 불길이 번지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레이판은 그 자리에서 썩어 사라지든, 들짐승에게 먹히든 둘 중의 하나였다. 죽어서도 그가 쉴 수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바르푼의 집에서 시간을 지체한 탓인지 결국 늦은 밤이 될 때까지 메리나에 도착할 수 없었다.
‘노숙을... 해야겠네.’
프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노숙을 하려면 숲 안이 좋다. 사냥감과 땔감을 찾기 쉬우니까.
“시... 싫어...”
세이렌이 고개를 저었다.
숲속에서 그런 일을 겪었는데 꺼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이는 최대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알았어요. 잠깐 마차 안을 확인해볼게요.”
마차 안에는 작은 요가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레이판은 노숙 생활도 좀 해본 모양이었다.
‘확실히 한 명은 여유롭게 자겠어.’
마차 안에서 잠을 청하면 될 일, 세이렌을 여기서 재우면 되리라.
‘식량은... 아직 버리지 않은 고기가 있으니까.’
프레이는 슬쩍 상자를 열었다.
끔찍한 냄새가 풍겼다. 아무래도 이미 상한 것 같았다.
‘이런...’
일단 상자를 밖으로 꺼냈다. 가지고 가봐야 짐만 될 테니까.
다행히 짐을 들어내니 안쪽에 가죽 주머니가 있었다. 열어보니 훈제해둔 고기가 있었다. 소량인 걸 보니 레이판의 식량인 것 같았다.
‘사냥할 필요는 없겠군.’
프레이는 정리를 마치고 마차의 천막을 내리려 했다.
“자, 잠깐...”
“세이렌?”
내려가는 천막을 붙잡고 그녀가 프레이를 붙잡았다.
“어디서 자려고...?”
“저는 밖에서 잘 거예요. 혹시나 들짐승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 세이렌은 충격을 받은 상황이니 진정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세이렌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막을 들췄다.
“같이 자...”
“네?”
“옆에서 자라고.”
세이렌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옆에서... 떨어지지 마...”
그녀가 프레이의 손목을 잡았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세이렌은 불안했다.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건 프레이뿐이었다. 강가에서 그녀를 구해줬던 것처럼, 곁에서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바랐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공포에 먹힐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프레이를 붙잡았다.
“...알았어요.”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짐을 빼내니 얼추 같이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둥그렇게 말려진 요를 바닥에 폈다.
프레이가 눕자 세이렌이 등을 돌리며 누웠다.
“잘 자요.”
프레이의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잠시, 세이렌이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세이렌...?”
일단 거부하지 않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프레이가 마치 뒤에서 안아주는 모습이 되었다.
“잠깐... 이렇게 있어...”
세이렌은 프레이가 자신을 안아주자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그의 품 안에 있다면 그 무엇도 그녀를 해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잠에 빠졌다.
프레이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등과 손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도 욕정을 일으키진 않았다.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발정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프레이는 짐승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매력적인 몸을 가졌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욕정이 일어날 정도로 프레이가 굶주리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그녀가 편안히 잠들기를 바라며, 프레이도 눈을 감았다.
* * *
늦은 밤, 레스톤 성.
글란은 전전긍긍한 얼굴로 제트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 말씀은...”
“그렇습니다. 데일 황태자님의 사망소식을 황제 폐하께 전달해야 합니다.”
글란은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황태자가 그의 도시에서 습격을 받은 것도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황태자의 친위대가 그가 사망한 걸로 결론을 내렸다. 다른 곳도 아닌 그의 도시를 방문하는 중에.
그건 사형선고보다 무서운 말이었다.
황제의 분노를 피할 방법이 있을까? 과연 그의 죽음으로 끝이 날까?
아닐 것이다. 황태자가 사망했는데, 그것도 직계인 제 1 황태자다. 그는 물론 그의 가문이 단숨에 추락하리라.
‘이럴 수가...’
대대로 이어져 오던 가문이 그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도망가십시오.”
“제트람 경...?”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입니다. 신성제국으로 도망가십시오. 성주님께서 큰 잘못이 없다는 건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황제 폐하께 말씀드린다 한들 처벌은 면치 못하실 겁니다.”
제트람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데일을 지키지 못한 것은 물론 레스톤 성주에게도 큰 문제를 떠안겼다. 도망치라는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
“허, 허나...”
“제 1 황태자가 사망했으니 마틴 저하가 다음 계승자입니다. 아무리 분노한 황제 폐하라 하셔도 신성제국에 추격대를 보내시지는 않을 겁니다.”
글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격대를 보낸다면 신성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만큼 내줘야 하는 것이 많으리라.
“그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사십시오.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이 되십시오. 저는 이만 떠나야겠습니다.”
제트람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직위를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처사였다. 황실 친위대장이 일개 성주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글란은 다급하게 그의 인사를 마주 받았다.
“그럼...”
제트람이 사라지자 글란은 그의 뒷모습을 껌뻑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는 곧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가자... 새로운 삶을 찾자.’
다음 해에 잡혀있던 귀족가의 약혼도 필요 없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글란은 그렇게 성을 떠났다. 동문의 경비병에게 뇌물을 두둑이 주고, 그가 떠나는 걸 아무도 모르게 했다.
귀족을 포기하고 목숨을 선택한 남자와 말 한 마리가 동쪽을 향해 달렸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2%)]
[중급 검술 Lv1 (46%)]
[초급 단검술 Lv8 (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5 (16%)]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