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퀄라이저-45화 (45/141)

<-- 11. 메리나를 향해 -->

프레이가 들어서자 바르푼이 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문 좀 닫아주겠나. 내가 추위를 많이 타서 말일세.”

“... 그러죠.”

프레이는 슬쩍 문을 닫았다.

집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나무가 썩어서 곧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레이판과 바르푼은 전혀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레이판... 고기는 어떻게 된 건가?”

“아, 그게 말입니다.”

레이판은 고기를 버리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좀비견의 출현부터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그렇게 된 겁니다. 맞죠?”

마지막으로 말을 마치고 레이판이 프레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정말입니다.”

“좀비견이 나타났다?”

바르푼은 고개를 흔들었다. 쉽사리 믿지 않는 걸까.

“그것참 큰일이군... 그래도 어려운 발걸음을 했으니 뭐라도 얻어가야 하지 않겠나. 레이판 지하 창고를 좀 열어주게.”

바르푼은 바닥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문고리 비슷한 검은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레이판이 일어나 다가갔다.

“내가 힘이 부쳐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레이판은 서슴없이 다가가 손잡이를 당겼다. 프레이는 뒤에서 지켜보았다. 바르푼이라는 노인은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기에 그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흐읍...!”

“집이 오래돼서 그런지도 모르겠군.”

바르푼은 여유롭게 말했다. 레이판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도록 힘을 주었다.

끼긱- 끼이익-

나무가 뒤틀리며 천천히 손잡이가 올라갔다. 레이판은 땀을 훔쳐내며 창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우, 너무 어둡네요.”

“그래도 발광석이 있으니 들어가면 괜찮을 게야.”

“알겠습니다.”

바르푼이 천천히 일어서고 레이판이 창고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아악!”

“레이판?!”

아래에서 비명이 들리는 게 아닌가. 프레이는 다급하게 창고로 다가갔다. 물론 바르푼을 견제하면서.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프레이는 아래를 보며 소리쳤다.

“레이판? 괜찮아요!?”

순간, 갑작스럽게 누군가 그를 잡아당겼다. 프레이는 그대로 계단을 굴렀다.

“크윽...!”

전신에 미치는 고통도 잠시, 아찔한 고통이 그의 복부에 느껴졌다.

“컥...!”

프레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찌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레이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 하여간 바르푼 님이 관심을 잘 끈단 말이지.”

“레... 레이판...”

“아, 지금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안 가지?”

레이판은 프레이의 피가 묻은 단검을 흔들었다. 그는 프레이의 옷에 단검을 문질러 피를 닦아냈다.

“짧게 말하면 뒤통수 맞은 거지. 내가 말했잖아? 고기는 신속배달이 생명이라고.”

“레이판, 볼일 봤으면 가게.”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바르푼의 모습이 보였다. 프레이는 당장에라도 일어서서 레이판의 멱을 따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오, 아쉽지만 여기 발린 마비 독이 꽤 잘 듣는 종류야. 꽤 비싼 돈 주고 구했거든. 그리고 여기 자네랑 놀 친구가 많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레이판은 움직이지 못하는 프레이의 턱을 잡고 옆으로 틀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언데드들이 보였다.

고블린과 인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좀비들.

“바르푼 님, 그래도 좀비견 관리는 해주셔야죠.”

“이 몸으로 어떻게 그놈들을 쫓겠는가. 그래도 자네는 내가 준 토템 때문에 걱정이 없지 않은가.”

바르푼의 말에 레이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금 프레이의 턱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는 프레이의 귓속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그 세이렌이라는 년은 내가 잘 대해줄 테니까.”

“분명... 공격을 받...”

“응? 아... 내가 또 연기를 좀 하지. 깜빡 속았지? 그럼 좋은 시간 보내라고. 나도 그럴 테니까.”

레이판이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을 훑었다. 그는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바르푼은 레이판이 나가자 천천히 프레이를 지나갔다.

“걱정하지 말게. 곧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내 명령만 듣게 될 테니.”

바르푼은 천천히 좀비들을 향해 걸어갔다.

“언데드가 되는 걸 두려워 말게.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누릴지니. 죽음을 거부할 권능을 자네에게 주겠네.”

바르푼은 좀비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다녔다. 그 역시 언데드에게 공격받지 않는 토템을 지닌 모양이었다. 좀비들 가운데 위치한 제단에 다가선 바르푼은 제단 위에 놓인 뼛가루를 잡았다.

“죽음의 신 모르템이시여. 영원한 삶과 영원한 미래를 주시옵소서, 여기 그대의 종이 당신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모르템은 뼛가루를 바닥에 뿌리며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렸다. 프레이는 움직이려 안간힘을 썼지만, 적어도 레이판은 마비 독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기랄... 제길!’

그가 죽는 건 상관없다. 문제는 세이렌이었다. 지금쯤이면 레이판이 그녀를 겁탈하려 하고 있을 터였다.

크르륵- 크륵-

좀비들이 발광하듯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바르푼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의식에 사용하는 것인지 장식이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르템이시여, 여기 죽음에서 벗어나 충실한 종이 되겠나이다.”

바르푼은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냈다. 검붉은 피가 떨어지며 뼛가루에 스며든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핏방울은 마치 살아있는 듯 다른 곳이 아닌 뼛가루만을 타고 움직였다.

그렇게 뼛가루가 천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쇠사슬에 묶인 좀비들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바르푼의 주문 영창이 끝나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커헉...!?”

바르푼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 그대로, 그의 머리는 좀비 앞에 굴러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바르푼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이미 늙고 추한 머리지만 좀비는 상관없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그의 머리를 뜯었다.

“후우... 후우...”

프레이는 피가 새어 나오는 복부를 부여잡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좀비들을 처리하는 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다행... 다행이다...’

마비가 풀린 건 천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붉은 바위 부족의 토템 덕이었다.

부정적인 효과를 확률적으로 부정적인 상태 이상을 막아주는 아이템. 그러나 복부의 출혈까지는 막아주지 않았다.

쿵-

창고 문은 닫혀 있었다. 프레이는 힘껏 부딪쳤다.

‘제길... 빨리...! 빨리...!’

쿵- 쿵- 쿵-

그렇게 연거푸 문을 두드리니 먼지가 떨어지며 나무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힘겹게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그동안 전투 경험 중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건 처음이었다. 오히려 예기치 않은 기습이라서 더 피해가 컸다.

‘레이판... 이 개자식...!’

아니, 그건 개에게 실례되는 말이었다. 분노가 치솟았지만 마음은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프레이는 힘겹게 몸을 이끌고 문을 열었다. 아주, 아주 천천히.

그는 발걸음 소리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발밑을 살폈다. 혹여나 나뭇가지 따위를 밟아서 레이판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 씨발년. 이 음란한 몸 좀 봐라.”

레이판이 지껄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이는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기습에 실패하면 오히려 당하는 건 자신이 될지 몰랐다.

어쩌면 레이판은 전투에도 능한 걸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일삼는 놈이니 자기 실력까지 숨기지 않았을까.

‘서두르지 말자...’

푸르릉-

말이 다가오는 프레이를 보고 콧김을 내뿜었다. 프레이는 그대로 멈춰 섰다.

'들켰나?'

“하아... 하아...”

그러나 들려오는 숨소리로 보아 레이판은 정신이 딴 데 팔린 게 분명했다. 프레이는 말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마차 옆으로 움직였다.

레이판의 추잡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숨소리를 듣기만 해도 역겨웠다.

프레이는 참았다.

“오... 나는 냄새만 맡아도 알아. 처녀의 냄새... 그 고자 새끼는 널 건들지도 않았나 보군?”

참아야 했다. 한순간의 분노로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세이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그녀도 마비 독에 당한 것 같았다.

“아아, 이 색깔. 덕분에 이런 극상의 상품을 맛보게 되는군.”

겨우 마차의 뒷바퀴에 도착했다. 마차 밑으로 떨어진 바지와 레이판의 다리가, 그리고 세이렌의 다리가 보였다.

으득-

“아아... 알맞게 젖었군. 그래, 네년도 좋지?”

“우...으...”

프레이가 이를 악물었다. 세이렌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이제야 들린다.

단 한 번의 기회다. 실패할 수 없었다.

“자아... 이제 들어간다...”

프레이는 검을 굳게 움켜쥐고 뛰쳐 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프레이는 검을 휘둘렀다.

“뭐...!?”

레이판이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프레이의 검은 레이판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툭-

그러나.

“끄아아아악!”

레이판은 뒤로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프레이는 상처를 붙들고 쓰러진 레이판에게 다가갔다.

“끄아악... 끄아아아악!”

레이판의 사타구니에서 연신 피가 솟구쳤다. 프레이는 기분 나쁘다는 듯 검에 묻은 피를 바라보았다.

“이 추잡하고 더러운 새끼.”

“끄아악... 제발.... 사... 살...”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불쾌했다. 그러나 프레이는 참았다. 레이판을 단숨에 죽이는 건 너무나 자상한 처벌이 아니던가.

먼저 프레이는 레이판의 손을 검으로 찍었다.

“끄아아아아!”

“얼마나 이런 짓거리를 해온 거지?”

“으... 으아아아악!”

검을 옆으로 비트니 레이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제발 살려줘... 마, 마차 안에 야, 약이 있어...”

프레이는 레이판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는지 약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 좋아.”

프레이는 검을 빼서 레이판의 허벅지를 모두 찔렀다.

“끄아아아악!”

“기다리라고.”

프레이의 하반신은 이제 모두 붉게 물들었다. 프레이는 다급하게 세이렌의 상태를 확인했다.

바지를 발에 걸치고 속옷까지 벗겨진 그녀, 그리고 훤하게 가슴까지 드러냈지만, 아무런 저항도 못 했던 것 같았다.

‘저게 약이었나...’

세이렌 역시 복부의 상처가 있었지만 아물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빨간 약병이 있었다. 아무래도 마비를 시키고 상처를 치료한 뒤 겁탈하던 모양이었다.

프레이는 그녀의 옷을 다시 입혀 주었다. 그리고 상처부위에 약을 뿌렸다.

“으...”

그녀가 낮은 신음을 냈다. 프레이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남은 약병을 자신의 상처부위에 발랐다. 아픔이 가시면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후우...’

약물은 약 4분의 1정도 남았다.프레이는 바닥에 떨어진 레이판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들어가기 전에 잘라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콰직-

단번에 짓밟아버리고 약병을 들고 레이판에게 다가갔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을 내밀었다.

“마... 맞아... 그, 그거...”

“이거?”

프레이는 천천히 레이판의 눈앞에서 약병을 기울였다. 빨간 액체가 쪼르르 땅으로 스며들었다.

“아, 안돼...!”

레이판이 손을 내밀었다. 프레이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레이판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기었지만 그래 봤자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다.

땅에 스며든 물약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말 그대로 엎질러진 물이었다.

쨍그랑-

빈 약병을 레이판을 향해 내리쳤다. 머리가 깨지며 피가 흘렀다.

“레이판, 잘 들어.”

“끄으윽...”

“난 여기서 널 죽여주지 않을 거야.”

레이판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프레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하나 깨달은 게 있어. 죽음은 복수가 아니야.”

프레이는 일어나며 꿈틀대는 레이판을 벌레처럼 내려다보았다.

“고통이 곧 복수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괴로워하길 바란다.”

“끄아아아악!”

프레이는 레이판의 비명을 등지고 마차로 돌아갔다. 마비가 풀렸는지 세이렌은 그저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뭐라고 해줘야 할지 몰랐다. 어떤 말이든 도움이 되겠는가.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어...”

황태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괜찮을 리 없었다. 남자로 태어나 남자처럼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해도, 생리적인 두려움이 있는 법이었다.

아니, 오히려 남자로 살아왔기에 남자에게 겁탈 당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프레이는 묵묵히 그녀를 안았다.

“이제 괜찮아요.”

프레이는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이렌은 프레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2%)]

[중급 검술 Lv1 (45%)]

[초급 단검술 Lv8 (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4 (21%)]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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