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퀄라이저-42화 (42/141)

<-- 10. 뜻 밖의 동행 -->

데일의 말에 프레이는 눈을 껌뻑였다.

“그 말씀은...”

“그래, 어차피 이 모습으로 황태자 노릇도 못 하니까. 대신 신세 좀 질게.”

그녀는 가뿐하게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를 향해 걸어오는 데일의 모습이 익숙지 않았다.

프레이는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랐다.

“안 돼?”

그녀의 물음에 프레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가 같이 행동하는 게 문제가 되는가?

‘나는... 복수를 해야 하니까...’

데일과 언제까지 함께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게 도와줄 수는 있었다.

프레이는 아직 리반을 상대하기에 부족했고, 그만큼 수련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과정에서 데일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리라.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프레이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데일은 지금 상태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중에라도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그녀가 바뀌듯이. 프레이의 마음도 바뀔지도 모른다. 아니, 바꾸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녀가 짐이 돼서는 안 된다.

“좋아. 일단 이름부터 바꿔야지.”

“이름이요?”

“응. 내가 데일이라고 광고할 수는 없잖아?”

황태자 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굴렸다. 대체할 이름을 찾는 것 같았다.

“세이렌이라고 불러줘.”

“세이렌이요?”

“응... 어머니 이름이 세이란이셨거든.”

데일, 아니 세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그 이름을 되뇌었다.

“세이렌... 알았습니다.”

“좋아.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이라면...?”

“마틴을 황실로 돌려보내야 해.”

프레이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마틴, 마틴 도프람...?’

“내가 사라진 이상 마틴이 황태자로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해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국이 삼촌 손에 들어가도록 놔둘 수는 없어.”

세이렌이 머리를 흔들었다. 고작 머리를 흔들었을 뿐인데 넋을 놓고 보게 된다.

“프레이?”

“네? 아, 네.”

“지금 마틴은 신성제국에 볼모로 잡힌 신세야. 그래도, 내가 가면 마틴을 돌려보내 줄 거야.”

“예?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데일 도프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틴 도프람을 만나기는커녕 입구에서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괜찮아. 아직 내 몸에는 황족의 피가 흐를 테니까.”

“황족의 피요?”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마틴이 신성제국에 갈 때 놈들이 마틴의 피로 확인했다고 하던데? 우리가 대역을 보낼까봐 걱정했던 모양이야. 아무래도 황족의 피를 구분할 수 있는 것 같아.”

프레이는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제국에 도착해 그녀의 피로 황족임을 증명한다. 마틴을 만나, 자신이 대신해 볼모로 잡히겠다는 말.

“하지만... 그런 삶은...”

볼모로 잡힌다니, 아무런 자유도 없지 않은가. 세이렌은 얕은 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볼모라고 해도 대접은 극진할 텐데? 오히려 소홀히 대접하면 양쪽 국가의 문제가 된다고. 설마 내가 시민들처럼 살 거라고 생각한 거야?”

프레이는 약간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레스톤 성에서 귀족이 어떤 삶을 사는지 살짝 맛보지 않았는가?

‘그런 삶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겠지...’

황태자가 일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반은 성기사니까 신성제국에서 성기사들이 싸우는 방식을 확인하면 도움이 될 거야. 세이렌도 거기서 헤어지면 될 테고...’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게다가 당사자가 꺼리지 않으니 프레이가 간섭할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레스톤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죠.”

“레스톤에?”

“네.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들키지 않을까?”

프레이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게서 데일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 * *

“하아... 하아...”

세이렌이 숨을 몰아쉬었다. 프레이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는 거예요?”

“뭐...? 살면서 가장 오래 걸은 것 같은데?”

데르벨의 실험실은 어느 야산 중턱에 숨겨져 있었다. 이제야 산에서 조금 내려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이렌은 벌써 쓰러질 듯한 얼굴이었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조금 전에도 그래서 쉬었잖아요.”

“그때도 힘들고 지금도 힘드니까 쉬어야지.”

이래서야 언제 산에서 내려갈까. 프레이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손 줘 봐요.”

“응?”

“손이요.”

세이렌이 바위에 걸터앉아 손을 내밀었다. 프레이는 끼고 있던 활력의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자요.”

“어? 어...?”

그녀가 놀라서 프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어, 어떠냐니...”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프레이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며 활력이 돋는다고 생각했다.

“활력을 회복시켜주는 반지에요. 괜찮아졌죠? 그럼 이제 가요.”

프레이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듯 몸을 돌렸다.

‘하긴... 그 의미일 리가 없지.’

세이렌은 반지를 매만지다가 빼고 자신의 약지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살짝 웃음 지었다.

“같이 가!”

그렇게 산에서 내려가기를 한참, 프레이는 정돈된 길 끝에 마을을 발견했다.

“아, 프리헬름이네.”

“프리헬름이요?”

“응.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라서 목적지는 아니었는데, 제트람이 설명해줬어. ‘힘들면 쉬고 가셔도 됩니다.’ 이렇게.”

세이렌은 짐짓 제트람의 딱딱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러나 전혀 닮지 않았기에 프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프리헬름...’

산을 내려오느라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대로 레스톤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활력의 반지로 버틸 수도 없고...’

세이렌이 노숙에 익숙지도 않을 것 같았다.

“좋아요. 일단 옷도 바꿔 입어야 할 것 같고...”

세이렌이 입고 있는 복식은 그간의 고생으로 누더기 꼴이 되었다. 그러나 원단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고급의류라는 건 쉽게 눈치채리라.

“그래, 이 옷 찝찝해서 못 입겠더라.”

그녀가 불편하다는 듯 옷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그녀의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 프레이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서두르죠.”

* * *

프리헬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더스틴 마을 같다...’

규모가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유저도 많지 않았다.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은 헤롱거리는 눈빛으로 세이렌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프레이, 옷은 어디서 사?”

“음... 일단 옷보다는 장비를 사는 게 낫겠어요.”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위험했다. 프레이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나가는 유저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남자들의 시선.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놈도 있었고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놈도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이렌은 엄연히 황족이다. 이런 시선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프레이는 빠르게 프리헬름의 대장간을 찾았다.

“어서... 워우.”

대장장이는 늘 그렇듯이 인사를 건네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세이렌의 가슴에 꽂혀 있었기에 프레이는 곧바로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안녕하세요.”

“어? 아. 안녕하쇼.”

대장장이는 입맛을 다시며 눈으로 그를 힐난했지만 프레이는 가뿐히 무시했다.

“갑옷 좀 볼 수 있을까요?”

“누가 입을 거요?”

“제 뒤쪽에 있는 여성분이요.”

“흠... 잠깐 비켜주겠소?”

대장장이의 말에 프레이는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몸에 맞는 걸 찾아야 할 거 아니오.”

프레이카 비켜서자 대장장이는 무척 행복한 표정으로 세이렌의 몸을 훑었다. 그래도 장사는 장사. 아쉬운 듯 시선을 거둔 대장장이는 진열된 갑옷 중에서 하나를 가져왔다.

“이건 어떻소? 여우 가죽을 덧대서 만든 건데 가볍고 튼튼하기도 하오. 색깔도 고와서 여성분께서 많이 찾지.”

“입어볼 수 있습니까?”

“음, 뭐 그러시오.”

프레이는 갑옷을 그녀에게 건넸다. 세이렌은 멀뚱히 갑옷을 받아들고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왜요?”

“어떻게 입어?”

프레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입을 줄 몰라요?”

“갑옷은 입어본 적이 없는데...”

프레이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서 갈아입으면 되오.”

대장장이는 눈치껏 대장간 구석에 있는 가림막을 가리켰다.

‘그래, 빨리 끝내자.’

세이렌을 데리고 가림막 앞에 섰다.

프레이는 직접 앞에서 갑옷을 입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자, 됐죠?”

“으음... 그냥 입혀주면 안 돼?”

세이렌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이 정도는 혼자서도 해야죠.”

“알았어, 알았어.”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녀가 가림막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프레이.”

“다 입었어요?”

“이렇게 입는 거 맞지?”

그녀가 가림막을 슬쩍 들추자 가슴 윗부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프레이가 놀라서 황급하게 가림막을 쳤다.

“뭐, 뭐예요?”

“뭐야, 제대로 보지도 않고.”

프레이는 당황했다. 갑옷은 문제가 없다. 그녀의 몸을 가리지 못할 뿐.

“잠깐만요.”

그 후 몇 차례 다른 갑옷을 가져다준 끝에, 적합한 갑옷을 찾을 수 있었다. 되도록 가슴 노출이 적으면서도 온 가벼운 곰가죽 갑옷이었다.

“음...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는데...”

“그게 최선입니다. 그게 50실버나 한다고요.”

프레이는 눈썹을 찡그렸다.

세이렌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족이 직접 돈을 들고 다니겠는가. 지금까지 비용은 모두 아랫사람들이 낸 모양이었다.

“알았어, 아무튼 고마워.”

갑옷을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태는 감출 수 없었다. 프레이는 곧바로 여관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그전에 데르벨의 수첩이 떠올랐다.

“여기 멜튼이라는 사람이 사나요?”

“멜튼? 저 집에 사네.”

“아, 감사합니다.”

프레이는 인사를 하고 가리킨 집으로 갔다. 세이렌이 뒤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뭐야, 어디 가는 거야?”

“아뇨, 잠깐 볼 일이 있어서요.”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프레이는 집의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문이 열리며 주름이 옅게 파인 남자가 나타났다.

“혹시... 멜튼 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여보, 누구야?”

“응? 아, 그게...”

멜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프레이가 누군지 몰랐으니까.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프레이는 그가 이미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데르벨 님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아! 아직 정정하신가요? 아, 여보! 데르벨과 아는 분이셔!”

그의 반응으로 보아 데르벨이 죽은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웃으며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데르벨 님은 제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죠.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아...”

프레이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데르벨의 수첩을 잡았다. 잠시 고민하던 프레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직 정정하십니다. 도중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멜튼 씨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아, 그러십니까? 제 흉을 보지 않았나 걱정되네요.”

허허롭게 웃는 멜튼. 프레이는 도저히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예. 안부 전해드리라는 부탁이 생각나서요. 그럼.”

“아이고 일부러 이렇게... 감사합니다. 푹 쉬십시오.”

프레이는 인사하고 돌아섰다. 세이렌은 슬쩍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이야기야?”

“아니,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야.”

프레이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데르벨의 수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을 중간에 세워놓은 화톳불에 던졌다.

‘안타깝군...’

멜튼은 세이렌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설령 데르벨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얻기는 어려웠으리라.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프레이는 데르벨이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프레이와 세이렌은 여관을 찾았다. 여행객이 많이 없어서인지 방은 많았다.

“따로 드립니까? 하루에 5 실버, 두 분이면 10실버입니다.”

“아...”

“그냥 하나 주세요.”

은화를 고르던 프레이의 손에서 세이렌이 냉큼 5실버를 뺏어 건넸다. 프레이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굳이 5실버 더 낼 필요가 있어? 어차피 하루 같이 잤는데.”

프레이는 반박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2%)]

[중급 검술 Lv1 (43%)]

[초급 단검술 Lv8 (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2 (52%)]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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