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뜻 밖의 동행 -->
레스톤 광장.
글란은 새로운 경비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실수라도 하면... 알고 있겠지?”
“예, 옛!”
이전 경비대장은 이미 목이 달아났다. 황태자 습격 사건을 막지 못한 죄, 그리고 사건 당시 화약반입을 방조한 죄였다.
제트람은 브렌의 목을 베고 나서 글란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것을 강요했다. 붙잡힌 정통파 대원들은 광장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경비대장이 글란을 대신해 나설 차례였던 것.
“그래... 그럼 믿겠네.”
글란은 사건 이후로 시민들 앞에 나서는 일이 두려워졌다. 언제 어디서 다시 폭발일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경비대장은 글란을 뒤로 하고 광장으로 나왔다. 여러 남자의 목이 높이 걸려 있었다.
“들어라! 레스톤의 시민들이여, 제국의 후예들이여!”
그가 모여든 사람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손을 위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들이 보이는가? 이들의 최후가 보이는가!?”
그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안 그러면 전임 경비대장처럼 목이 달아날 테니까.
“이들은 레스톤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황태자 저하의 목숨을 노린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한가!?”
“세상에...”
바이런은 눈을 껌뻑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거짓에 속지 마라! 영광스러운 제국의 후예여! 이들은 황실을 어지럽히고,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간악한 놈들이다! 이들 중에는 몬스터와 내통한자도 있으니, 만약 이들의 말에 현혹된 자가 있다면 속히 깨어나라!”
군중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유저들은 관심이 없거나 가벼운 해프닝으로 치부했다.
레스톤의 주민들은 혹여나 잘못 걸릴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또 다른 머리가 늘어날 테니! 모두 주의하도록!”
경비대장이 소리치며 돌아갔다. 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곧 제트람 경이 황태자 저하를 찾아올 걸세. 병사들을 직접 이끌고 갔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허나, 영주님... 정말 돌아가셨다면 어쩐답니까?”
경비대장이 불안함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란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성을 냈다.
“그런 생각 말게!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글란은 끝에서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뒤는 상상이 가지도 않았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저 자비로운 신에게 기도할 따름이었다.
* * *
프레이는 숨을 죽이고 데일을 바라보았다.
어떤 약인지 몰라도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침을 흘리지도 않았고 호흡이 안정되었다. 체온은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일단은 다행인가...’
프레이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책상 밑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안정되자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여기 주인은 꽤 부자였던 모양이군.’
갖가지 실험 기구며 서적들, 오면서 봐왔던 발광석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비용으로 사용된 오토마톤까지.
웬만한 자산가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연금술사가 원래 그렇게 돈을 잘 버나?’
프레이가 아는 연금술사라고 해봐야 알튼 뿐이었다. 알튼의 행색을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니면 부자가 연금술을 배웠나...’
프레이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비어있는 나무함을 바라보았다.
어떤 물약이기에 이렇게 꼭꼭 숨겨둔 것일까.
‘음?’
프레이가 눈을 껌뻑였다. 물약이 들었던 홈 밑에 틈이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틈으로 손톱을 밀어 넣었다.
‘이건...’
작은 수첩이었다. 그 외에 다른 것도 있을까 찾아봤지만 수첩이 전부였다.
프레이는 슬쩍 고개를 들어 데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시간이라도 때울 수 있을까, 프레이는 수첩의 첫 장을 펼쳤다.
[내 이름은 데르벨.]
‘데르벨...? 이곳의 주인인가?’
첫 장은 그 한 문장뿐이었다. 프레이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은 나를 다르게 불렀다. 괴물, 병신, 추남 등 들어보지 못한 말이 없다. 얼굴은 모르지만 어머니조차 나를 버리고 갔으니.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불려서인지 정작 기분은 나쁘지 않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하니 어머니도 괴물이 아닐까.]
‘음...’
[모욕과 멸시 속에서 나는 악착같이 살았다. 특히나 나를 혐오하는 여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돈을 끌어 모았다. 여자들은 유독 돈에 끌렸다. 그리고 나는 여자들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연금술에 흥미를 끈 것도 그때였다. 선임 포주들이 이용하는 미약은 그 어떤 여자라도 노예가 되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
프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나머지를 읽을 것인가?
‘미약... 미약이라고...?’
설마 데일이 마신 물약이 미약일까?
프레이는 다시금 수첩을 넘겼다. 이전과 달리 글씨가 휘갈겨져 자세히 읽어야만 했다.
[성직자 놈들이 장사를 방해한다. 빌어먹을 놈들. 돈을 받는다고 그 짓거리가 달라지나? 그 자식들 부모도 그 짓거리로 자기들을 낳았을 텐데. 병신 같은 놈들. 정말 신이 그 짓거리를 싫어하면 왜 모든 동물들이 그 짓거리를 하려고 애를 쓰겠는가.]
프레이는 빠르게 수첩을 훑었다. 대부분이 이 데르벨이라는 남자가 포주 노릇을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도중에 창녀들에게 미약을 사용한 것이 발각돼서 감옥살이를 한 모양이었다. 그는 결국 포주 일을 직접 하지 않고, 다른 포주에게 미약을 공급하는 일을 전담한 것 같았다.
[고민이 생겼다.]
‘음?’
신세 한탄과 세상, 특히 여자에 대한 저주로 이어지던 글의 전환점이었다.
프레이는 훑어보던 수첩을 다시금 멈추어 정독했다.
[나도 어느덧 늙고 추해졌다. 아니, 원래 추했으니 늙기만 한 건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이 나이에, 아니... 잘 모르겠다.]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누군가는, 적어도 누군가는 내 마음이 순수함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적기로 했다. 나이가 드니 거동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나는 늙고 추했다. 누구도 나를 흔쾌히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구했다. 선천적으로 눈이 먼 아이를.]
‘눈이 멀어...?’
[그 아이는 순수했다. 내 모습을 몰라서일까. 나는 절대로 그 아이가 내 얼굴을 만지지 않게 했다. 내 얼굴을 알게 되면 그 아이도 도망갈까 두려웠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 아이는 가족이 없었고, 나도 가족이 없었다. 차이점은 내가 돈이 많고 늙은 반면, 그 아이는 돈이 없고 젊다는 것뿐.]
[아... 모르겠다. 왜 지금에서야? 신이 있다면 저주하고 싶다. 어렸던 만큼 빨리 컸다. 아름답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신이시여, 만약 그대가 있다면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단념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욕심은 끝없이 나를 유혹했다. 마음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그 아이가 연인을 만들 수 있도록, 나에게 관심이 멀어지도록 알고 지내던 포주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오히려 질투가 났다.]
프레이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이 데르벨이라는 작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빌어먹을 신 같으니. 당장 죽어 신을 만난다면 내 손으로 죽이리라. 그 아이는 여전히 내 곁에 머무른다. 아무래도 나를 가족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욕심을 속일 수 없다. 내게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 내가 가진 전 재산을 쏟았다. 그 아이를 독립시켰다. 오토마톤을 사들였다. 실험실을 만들고 오토마톤이 내 시중을 들 수 있도록 개조했다.]
[가끔 그 아이가 찾아올 때는 실험실로 도망쳐야 했다. 나는 여행을 떠난 것으로 했다. 죽기 직전에 여러 곳을 돌아보겠다는 이유라면 충분하겠지.]
프레이는 슬쩍 눈을 돌려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폐허처럼 변한 실험실, 그러나 한때는 누군가의 피난처로 사용된 곳이었다.
[온갖 서적을 뒤져 겨우 찾아냈다. 내게도, 내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시 그 아이가 보고 싶다. 그 아이가 나를 보고 다시 웃어주었으면.]
[약을 완성하는 재료를 찾는 동안 다른 비약도 찾아냈다. 그 아이의 눈을 되찾을 수 있는 약. 오토마톤으로는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심부름꾼을 불렀다. 그 놀라는 꼴이라니. 돈을 얹어주니 표정이 바뀐다. 돈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비약이 완성됐다. 하지만 그때 알아야 했다. 심부름꾼 눈에서 본 탐욕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걸... 지금 밖에는 도적놈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토마톤이 망가졌다. 내 다리는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나갈 수 있다면, 강으로 도망갈 텐데.]
‘그럼 그 배는...’
프레이는 썩어버린 배를 떠올렸다. 결국 데르벨은 도망치지 못했다.
다음이 마지막 장이었다.
[이 비약에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 담겨 있다. 누군가 이 약을 발견하거든, 그리고 이 약을 사용하거든. 부디 프리헬름의 멜튼을 찾아주기를. 그리고 그에게 내 사랑을 전해주기를. 약으로 변한 모습이 내가 그에게 기억되고 싶은 모습이었음을.]
수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깐... 이 약이 그럼...?’
데르벨이라는 연금술사는 남자다. 그리고 프리헬름의 멜튼이라는 사람도 남자다.
그는 멜튼의 눈을 뜨게 만들어주고 그를 다시 찾아가려 했다.
프레이는 머리를 간지럽히는 무언가에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 이런...”
프레이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데일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프... 프레이...”
“데일, 정신이 들어요?!”
프레이는 데일의 목소리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괜찮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아, 데일 설명이 필요한 게 있는데...”
프레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데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너무 답답...”
데일은 말을 마치기 전에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이게...”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몸을 더듬었다. 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풍만해진 가슴, 그리고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그와 어울리지 않게 널찍한 골반 밑으로 이어지는 다리까지.
급격한 몸의 변형으로 본래 입고 있었던 옷이 터질 듯이 팽팽해져 있었다.
“도대체...”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짧게 친 머리는 어느새 기다랗게 자라나 있었다. 무려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긴 장발이었으니.
“프레이...?”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원래 얼굴은 남아 있었지만 턱선이 더 유려해졌고 눈이 커졌다. 누가 보아도 기억에 남을만한 미녀였다.
프레이는 넋을 잃고 데일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야, 약의 효과인 것 같아요.”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병세가 호전되면 몸이 변형되는 열병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원인이 있다면 그 약, 데르벨의 비약밖에 없었다.
“약?”
“네... 그게...”
프레이는 빠르게 설명했다. 물론 수첩의 내용은 설명하지 않았다.
데르벨이라는 남자가 멜튼이라는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여자로 변하려고 만든 약이라는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포주로 일했다고 했지...’
그러니 이토록 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자의 모습으로 변하고 싶었으리라. 프레이는 수첩을 일단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덕분에 데일이 살았으니...’
굳이 찾아갈 필요는 느끼지 못했지만, 나중에라도 멜튼이라는 남자를 찾아가면 건네주리라.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데일은 성숙한 여성의 몸이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주물럭거렸다. 그 모습이 보기 민망해 프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몸은 완전히 괜찮아진 거예요?”
“응. 그런데 이 모습으로는...”
데일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익숙지 않은 긴 머리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이 모습으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겠는데...”
여자라는 걸 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덮치려고 덤벼드는 남자들을 걱정할 때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데일은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결정했다.”
“뭘요?”
“프레이, 너와 같이 다니기로.”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2%)]
[중급 검술 Lv1 (43%)]
[초급 단검술 Lv8 (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2 (52%)]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