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뜻 밖의 동행 -->
데일은 프레이의 손길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항할 수 없었다.
비록 일평생을 남자로서 살아왔지만, 그건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정말 죽습니다.”
프레이는 무표정하게 대답하며 벗어 놓은 옷을 햇빛에 두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떠는 데일에게 다가갔다.
흠칫 몸을 떨며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나, 날 덮치려는 게 아니야?”
“예?”
프레이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의 말에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가슴을 압박하는 붕대와 속옷, 속이 비치는 걸 알고 있는지 데일은 손으로 치부를 가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뒤로 돌아가 데일을 끌어안았다.
“이러면 안심이죠?”
“응...?”
프레이의 체온이 느껴지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데일은 조금씩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프레이의 말대로 서로 붙어있지 않는다면 죽을 것 같았다.
“왜, 왜 숨겼는지 묻지 않아?”
“말해주실 겁니까?”
데일의 사정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숨기려 한 사실을 묻는다고 대답해줄까. 프레이는 살아남는 데 집중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데일은 무릎을 바짝 끌어당겼다. 치부를 보이지 않으니 손으로 가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미안해.”
“뭐가요?”
“너도... 이 사실을 알게 됐으니 죽을 거야.”
프레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데일은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이야기했지? 삼촌...”
“예.”
“어머니의 이름은 세이란 디케일, 내가 태어났을 때는 한창 전쟁 중일 때였어.”
데일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프레이는 묵묵히 들었다. 이야기하는 건 좋은 징조였다. 적어도 정신을 잃지는 않을 테니까.
“덕분에 아버지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있었지. 전선에서 한창 활약을 하고 계셨으니까.”
“그렇군요.”
“삼촌, 베르핀 디케일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실망했어. 마틴이 나보다 먼저 태어났었거든. 그런데 삼촌이 나를 남자로 키우자고 했다나 봐.”
데일이 몸을 떨었다. 프레이는 더욱 그녀를 껴안았다.
“어머니는 반대했지만, 삼촌의 설득에 넘어갔었대. 왕비가 첩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까 걱정하셨던 거지. 그렇게 나는 남자로 키워졌어. 나도 어릴 때는 내가 남자인 줄 알았으니까.”
데일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여자니까 티가 안 날 수가 없지. 가슴이 커지면서 어머니는 두려웠던 것 같아. 황제를 속인 죄가 얼마나 크겠어? 그래도 아버지, 황제께서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셨으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받을 거라 생각했나봐.”
데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삼촌은 다르게 생각했어. 지금까지 쌓아온 게 어머니 때문에 무너질 순간이었던 거지. 결국 어머니는 돌연 병을 앓고 돌아가셨어. 삼촌은 슬퍼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게도 말했지. 어머니처럼 되지 않으려면 절대로 들키지 말라고.”
그녀가 짧게 몸을 떨었다. 프레이는 만찬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서... 권력이 무섭다는 말을...’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셨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조스가 생겨났지. 아버지는 슬픔을 잊으려는 듯 마물들을 섬멸하는 데 집착했어. 직접 전장에 나섰지.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그 분은 매우 쇠락해진 상태였어.”
우조스라는 말에 프레이는 움찔했다. 그러나 데일은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 쓰러지실지 모르고,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 될지 몰라. 이번 시찰도 삼촌의 명령이었어. 이미지를 쌓고 오라는 거지. 나는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프레이, 왜 날 살렸어?”
“네?”
“그대로, 그대로 죽었다면 편했을 텐데...”
데일의 어깨가 들썩였다. 흐느낌이 들려 왔다.
“왜, 왜 날 살린 거야? 이제, 이제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데...!”
“저하...”
“저하라고 부르지 마! 아직도 모르겠어? 난 황태자가 아니야!”
데일은 소리쳤다.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난 꼭두각시라고! 삼촌이 권력을 낚는데 사용하는 미끼에 불과해!”
프레이는 몸부림치는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그럴수록 데일은 빠져나가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데일의 눈이 흔들렸다.
황족의 몸을 감히 만지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른 이들을, 그리고 자신조차 속여 왔다. 자신은 황태자이며, 제국의 후예를 이끌어갈 남자라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속여도 자신은 도저히 속일 수 없었다. 그녀는 황태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말이 맞아. 나는 가짜야. 폭군? 그것조차 가짜지.”
가짜 황태자, 폭군. 그녀는 살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죽음이 임박하면서 그런 모습은 사라졌다.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는 건 황태자도, 폭군도 아닌,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성일 뿐이었다.
“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도망...?”
프레이의 말에 데일은 헛웃음이 나왔다.
“삼촌이 그렇게 놔둘 것 같아? 내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되는 사람은 모두 죽었어. 설령 도망치더라도 이어지는 건 반란일 거야. 당장 시작되지 않더라도... 삼촌이 그 자리를 포기할 리 없어.”
“그런데요?”
“그런데라니?”
“왜 남들을 생각합니까?”
“뭐라고...?”
데일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했다. 프레이는 다시 말했다.
“그게 데일 님의 운명인가요?”
프레이는 저하라는 호칭을 수정했다. 그 호칭이 그녀를 자극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저도 한때는 사냥꾼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운명이라고,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죠.”
“뭐...?”
데일은 프레이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프레이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은 제게 물었습니다. 제게 선택권을 주었어요. 그때 알았습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제가 선택하는 거죠.”
프레이는 환생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은 유저로 다시 태어나기로 선택했다.
신, 더원은 자신에게 결정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조차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들의 기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프레이는 자신에게 읊조리듯 말했다.
‘내가 복수를 위해 살아가듯이...’
데일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프레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라면 그래야죠.”
“프레이...”
데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프레이는 다시금 그녀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습니다. 삼촌이 문제라면, 그를 제거하세요. 그게 데일 님이 원하시는 바라면.”
“뭐...?”
“복수를 원하는 게 아닌가요?”
대답이 없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모르겠어...”
“원하는 게 없어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지금까지... 그냥 시키는 대로 해왔으니까.”
“그럼... 찾아야죠.”
“찾는다고? 어떻게?”
데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도, 어차피 똑같은 삶이 반복될 뿐이야.”
“그럼 도망쳐야죠.”
“도망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데일 님이 죽은 줄 알 거예요. 죽은 사람을 찾는 이가 있을까요?”
데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남자라고 속여 왔으니까 더 쉽지 않나요? 여자로 살면 되잖아요?”
데일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삼촌, 베르핀 디케일이 자신의 수색을 명령한다고 해도 여자를 찾으라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데일이 숨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하, 하지만... 그러면...”
“황제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아니.”
“누군가는 황제가 되겠죠. 그것까지 데일 님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데일이 알고 있던 상식을 깨는 발언이었다. 프레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를 억압하고 있던 의무감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면 되잖아요?”
프레이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했다. 자신을 억누르던 압박감에서 해방시켜주는 말, 그 말을 따르고 싶었다.
여자인 걸 들킬까 두려운 마음, 삼촌에게 언제 독살당하지 않을까 했던 걱정을 떨쳐 낼 수 있다.
“내가,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됩니다.”
프레이가 대답했다.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된다.
복수는 하면 된다.
아니, 복수를 해야 했다.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해가 졌다. 프레이는 슬쩍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었다.
데일이 고개를 돌리자 프레이가 옷가지를 향해 다가갔다.
“많이 마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다행히 천은 말랐어요.”
데일을 감싸고 있던 천이었다. 그녀를 물속에서 꺼내며 가장 먼저 말려뒀던 터였다.
“일단 오늘은 이걸 덮고 자도록 하죠.”
“여기서 잔다고?”
“그러면요?”
프레이의 대답에 데일은 할 말이 없었다. 프레이가 잠자리를 만들었다.
덜 마른 옷가지를 바닥에 깔고 천을 이불로 삼았다.
“힉!”
“붙어요.”
차가운 감각에 데일이 몸을 떨었다. 프레이는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데일이라고 불러.”
“네?”
“친구잖아. 님은 빼도 돼.”
“...알았어요. 데일.”
존댓말은 그대로였다. 데일은 일단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것이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는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프레이의 말과 달리 데일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 * *
프레이는 추위에 반사적으로 따뜻한 쪽으로 움직였다.
‘음...?’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프레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데일?”
“하아... 하아...”
그녀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녀의 전신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이런...!”
그녀의 상태가 악화된 게 분명했다. 그녀의 높은 체온 덕분인지 옷은 이미 말라 있었다.
프레이는 빠르게 일어나 자신의 옷을 찢었다. 그리고 곧장 강가로 다가 찢어진 천에 물을 적셨다.
물기를 빠르게 짜낸 프레이는 데일의 몸 곳곳을 닦아주었다.
‘젠장... 이대로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병세가 자연적으로 회복될 리 없었다. 프레이는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데일, 데일 정신 차려요!”
“프레이...”
“정신이 들어요?”
“그냥... 놔둬...”
잠깐이나마 희망을 꿈꿨다. 그러나 운명은 역시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이 가짜 황태자이기에, 죽음은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단지 그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데일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프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데일? 데일?”
반응이 없다.
그녀의 숨결이 매우 뜨거웠다. 프레이는 마른 옷가지를 그녀에게 입혔다.
‘어떡하지?’
일단 천으로 그녀를 감쌌다. 데일을 든 프레이는 동굴로 고개를 돌렸다.
선택권은 하나뿐이었다.
‘던전... 인가.’
강에 다시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레이는 데일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죽어서야 구해준 보람이 없지 않은가.
‘내가, 내가 구할 수 있어.’
데일의 얼굴에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자신은 그때의 무력한 핸슨 주니어가 아니다.
프레이는 그녀를 안고 동굴 안으로 발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2%)]
[중급 검술 Lv1 (21%)]
[초급 단검술 Lv8 (7%)]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2 (52%)]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