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제 1 황태자 -->
먼저 반발한 건 제트람이었다.
“저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이길 자신 있다면서?”
데일의 대답에 프레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평가당하고 있었나?’
물론 프레이 역시 기사를, 그것도 훈련용 오토마톤도 아닌 진짜 기사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오나 그건...”
“데일 저하!”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돌아갔다. 글란과 경비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저하! 무사하십니까?!”
데일은 한숨을 내쉬며 제트람을 돌아보았다.
“제트람...”
“저하께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데일은 글란 쪽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모두 물러가라.”
“예?”
다급하게 병사들을 모아 성을 뒤지고 다녔다. 하녀들을 닦달해 가며 기껏 찾아왔더니 물러가라니?
“보면 모르겠는가? 아무 일도 없다.”
“허, 허나...”
하반신에 수건만 두른 호위기사와 불청객인 유저와 같이 있는 광경이 과연 아무 일도 아닌 걸까. 그러나 글란은 자나 깨나 황태자의 심기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웃으며 대답했다.
“실례했습니다. 자, 다들 돌아가세!”
“네?”
“어허, 황태자 저하의 명을 어길 셈인가!”
“아, 알겠습니다.”
경비대장은 황족의 변덕에 혀를 내두르며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글란은 나가기 전 데일에게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럼, 편안한 시간이 되시기를.”
그가 사라지자 데일이 웃으며 말했다.
“자, 방해꾼도 없어졌겠다. 시작해 볼까?”
“잠깐...! 저하, 저는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 징역 3년? 아니면... 음... 15골드로군. 15골드를 낼 건가?”
프레이는 말문이 막혔다. 당장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경비대장은 사라졌다. 그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희망이 있던 터였다.
“침묵은 긍정이다. 이런 말이 있지. 그럼 어서 준비하자고.”
“으음... 적어도 기사님이 옷이라도 입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프레이는 슬쩍 제트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데일은 그걸 생각 못 했다는 듯,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근데 사람들을 다 보내버렸는데 어쩌지? 제트람, 그 모습으로 싸울 수 있어?”
제트람은 이미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는 수건의 매듭을 억세게 묶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데일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네?”
‘이 황태자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그 기사도 제정신이 아니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황족, 그것도 제 1 황태자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데일을 말로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제트람은 슬쩍 오토마톤이 잡고 있는 훈련용 검을 잡았다. 그가 가져온 진검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정말... 그 복장으로 괜찮은 겁니까?”
단단하게 묶여있다고는 하나 그의 눈에는 위태로운 수건을 보며 프레이가 물었다. 정작 제트람의 표정은 당당했다.
“옷을 갖춰 입어야 주군을 지킬 수 있다면, 기사의 자격이 없다.”
프레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내뱉고 검을 쥐었다.
제트람과 프레이가 동시에 검면을 앞으로 하여 가슴으로 잡아당겼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이야말로.”
[‘이퀄라이저’ 특성이 반영됩니다.]
[황족 친위대장 ‘제트람’의 스테이터스로 보정합니다.]
‘황족 친위대장...?’
그냥 기사가 아니었다. 몸속 가득 차오르는 힘에 프레이는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나다!’
그 거대한 오크도 제트람의 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얼마나 수련을 해야 이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그것도 유저도 아닌 일반인이?
제트람은 경악하는 프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방어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선수는 양보하겠네.”
강자가 약자에게 해줄 수 있는 배려. 제트람은 당연히 프레이에게 패배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빨리 결투를 마치고 황태자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다.
프레이로서는 다행이었다. 적어도 이 스테이터스에 익숙해질 시간을 벌었으니.
‘검을 든 것 같지도 않아...’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검이 휘둘러진다.
‘검술도 중요하지만... 확실히 스테이터스가 중요하긴 하군...’
훈련용 오토마톤과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검이 살아 움직이는 이유, 기본적인 스테이터스의 효과였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프레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제트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쏴아악-
순식간에 튀어나간 프레이의 검이 제트람의 가슴으로 찔러 들어갔다. 여유롭게 보고 있던 데일이 벌떡 일어났다.
‘증기 권총과 맞먹는군!’
화살보다 빠른 속도!
그러나 제트람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미리 방어 자세를 취했던 덕에 날아오는 검을 옆으로 쳐낼 수 있었다.
프레이의 몸이 옆으로 틀어졌다. 제트람은 그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위험...!’
검이 튕겨 나가자마자 위험을 직감한 프레이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제트람의 키를 훌쩍 넘어 착지했다.
프레이도, 지켜보던 데일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놀랄 틈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쏴아악-
마치 공기를 베어내듯 제트람이 몸을 돌리며 검을 프레이의 등을 향해 휘둘렀다. 프레이는 이를 악물고 바람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검을 들었다.
카가각-!
“음...!”
제트람은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검을 받아 내다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친위대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데일의 얼굴은 만족으로 가득 찼다.
‘역시... 해보길 잘했어!’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을 또 어디서 하겠는가?
그나마 제트람의 호적수였던 리반은 우조스를 관리하러 떠났다. 제트람 역시 잊고 있었던 무인의 기질이 끓어올랐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연신 검을 휘둘렀다.
정작 프레이는 죽을 맛이었다.
‘크윽...!’
흥분으로 차올랐던 데일과 제트람의 얼굴에 실망이 비치는 건 오래지 않았다.
‘예리하지가 않군.’
제트람은 본연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반응속도는 나쁘지 않지만 공격을 막는 게 고작이었다. 간간이 반격이라고 들어오는 검은 눈에 훤히 드러난다.
‘정직하군, 정직해.’
혹시 힘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슬쩍슬쩍 빈틈을 드러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결국 이 유저의 실력은 그 정도라는 의미였다.
‘아쉽군... 신체 능력으로 따지면 나와 비견될 수준이건만...’
마치 거대한 보석의 원석 같았다. 문제는 이 원석을 깎아내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점.
프레이는 공격이 느슨해지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제길...!’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진짜 기사, 그것도 친위대장의 실력은 훈련용 오토마톤과 전혀 달랐다.
오토마톤의 검이 살아있다면, 제트람의 검은 마치 이 검이 스스로 단련을 한 느낌이었다.
“흐아앗!”
기합을 지르면서 검을 내리쳤다. 제트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의 검을 옆으로 흘러내며 빈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컥...!”
설마 검이 아닌 맨주먹으로 때릴 줄이야. 다행히 스테이터스가 받쳐준 덕분에 충격은 크지 않았다.
옆으로 휘어진 프레이의 눈에 메시지가 보였다.
[초급 검술의 레벨이 10에 도달했습니다.]
[검술의 등급이 초급에서 중급으로 상승합니다.]
[검술의 등급이 중급이 되었습니다.]
[검술 가이드를 개방합니다.]
‘검술 가이드...?’
쏴아악-
다시금 들려오는 소리에 프레이는 빠르게 검을 들어 막았다.
‘이제 끝내야겠군.’
더 나올 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유저의 검술이 바뀌었다.
“웃...!?”
처음으로 제트람의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갑자기 검이 날카로워졌다...!?’
틈틈이 보여주었던 빈틈을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온다. 제트람은 빠르게 자세를 고쳤다.
‘이 자도 내 실력을 시험하고 있던 건가?’
제트람의 오해였다.
프레이는 제트람의 방어가 견고해지자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후우... 후우...”
그는 시시각각 제트람의 자세가 변할 때마다 나타나는 잔상에 집중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본능적으로 그 잔상을 따라가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메시지가 사라지자마자 눈에 보이는 잔상을 따라 하니 제트람이 당황했다.
‘유저의 힘인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레이의 마음속에 희망이 싹텄다.
그러나 제트람이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나온 싹이었다. 제트람이 자세를 고치자 잔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뭐?’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프레이의 앞에 선 제트람.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지만 제트람이 노리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어?’
아차 하는 사이에 프레이의 몸이 기울어졌다. 제트람이 검을 부딪치며 프레이의 다리를 걸어 넘겼다.
같은 근력이라도 자세에 따라 활용이 달라지는 법. 무게중심을 잃은 프레이는 제트람의 검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했다.
쿵-
프레이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제트람의 검은 그의 목 앞에서 멈추었다.
짝- 짝- 짝-
데일의 박수소리가 결투의 종료를 알렸다.
“대단한데?”
“과찬이십니다.”
데일의 칭찬에 제트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검을 뒤로 뺐다. 그러나 칭찬의 대상은 그가 아니었다.
“제트람, 너 말고.”
제트람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곧 데일의 시선을 따라갔다.
“제트람, 참으로 늠름하구나. 네가 내 호위기사라서 자랑스럽다.”
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프레이는 눈앞에서 덜렁거리는 물체에서 눈을 돌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쓰러지기 전에 잔상을 따라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검이 수건을 벗겨낼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제트람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수건을 다시 허리에 둘렀다. 데일은 연신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 너무 재밌었어. 음흠, 그 공로로 빚은 변제해주도록 하지.”
데일은 헛기침을 하며 프레이에게 말했다. 프레이는 속으로 안도하며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대신!”
데일은 미소를 지었다.
‘대신? 또 뭘...’
프레이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트람도 수건을 묶던 손을 멈췄다.
“내 친위대에 들어 오거라.”
“예?”
“저하?!”
프레이와 제트람이 동시에 물었다. 데일은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둘이 죽이 잘 맞는군. 역시 내 선택은 틀림이 없다.”
“저하, 그렇게 쉽게...”
똑- 똑-
노크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옷을 가져다 주었던 하녀이었다.
“저하, 저녁 만찬이 곧 시작됩니다.”
“아, 드디어!”
결투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는데 벌써 저녁이 되었다. 데일은 웃으며 제트람을 바라보았다.
“자자, 일단 옷부터 입자고. 아, 만찬 시간을 조금 늦춰줄 수 있나? 프레이에게 쉴 시간을 줘야지.”
“저하...!”
“프레이, 남은 얘기는 만찬 후에 하자고. 그대는 저 남자를 데리고 먼저 가 있게.”
데일은 하녀에게 말하고 제트람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프레이는 그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트람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나도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프레이는 입밖으로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곧 하녀가 다가왔다.
“이런, 땀을 많이 흘리셨군요.”
“예?”
하녀가 다가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먼저 씻으셔야겠어요.”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1%)]
[중급 검술 Lv1 (7%)]
[초급 단검술 Lv6 (21%)]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1 (12%)]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
***
다음 화는 성애, 19금씬입니다.
내일 공지에 올릴 예정이지만
성애 묘사에 대해 호불호가 갈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성애는 스토리와 최대한 연관이 적도록 구성하여
거부감이 드시는 독자님들은 스킵할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