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제 1 황태자 -->
제트람은 욕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첨벙- 첨벙-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잠시, 데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트람?”
“예, 저하.”
“너도 쉬고 오라니까?”
“...그럴 수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호위 기사인 제트람은 데일의 근처에 머물러야 한다. 그가 쉴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여간, 고지식하다니까.”
다시 물소리가 들려왔다. 제트람은 익숙하다는 듯 다시금 눈을 돌렸다.
똑- 똑-
노크 소리에 제트람이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냐?”
“저하가 갈아입으실 옷과 수건을 가져왔습니다.”
앳된 목소리. 제트람은 벌컥 문을 열었다.
어린 하녀는 제트람의 모습에 몸을 움찔거렸다. 제트람의 차가운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생각했던 말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녀가 말이 없자 제트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옷과 수건을 두고 가거라.”
“예? 하지만 어떻게 저하께서 직접...”
“데일 저하께서는 누구에게도 몸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혹여나 누가 너를 문책하거든 내가 그리 말했다고 전하라.”
하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과연 이 기사의 말을 믿어도 될까?
안 그래도 성주인 글란은 무척이나 황태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하녀 중에서 고르고 고른 아이. 여차하면 잠자리 하녀까지 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는가? 황태자의 마음에 들면 단번에 신분 상승이 이루어질 텐데.
그러나 그런 꿈은 거품이 되었다. 당장 문 앞의 기사가 이리 단호하게 막아서는데 어찌 그런 꿈을 꾸겠는가.
“그, 그럼 옷과 수건만 두고 가겠습니다.”
제트람은 대답 없이 슬쩍 몸을 비켜 하녀가 들어갈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녀는 힐끔힐끔 욕실 쪽을 바라보았지만, 황태자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수고했다.”
탁-
문이 닫히고 하녀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제트람은 하녀가 놔두고 간 물건을 욕실 앞에 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안에서 데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옷과 수건을 가져온 하녀이었습니다.”
“알았어.”
촤아악-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본래 황족은 몸을 스스로 씻지 않는다. 그런 노동조차 황족이 하기에는 너무나 천하게 여겨졌기에. 그러나 데일은 달랐다.
잠시 후, 머리가 촉촉하게 젖은 데일이 밖으로 나왔다.
“아, 개운하다. 제트람도 씻을래?”
“제가 어찌...”
“알아, 알아. 장난이야, 장난.”
데일은 미소를 지으며 큭큭거렸다.
“아직 저녁 만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
“예, 저하.”
“하... 하지만 기다리기에는 너무 심심한데.”
데일은 침대에 몸을 반쯤 누이며 말했다. 황족의 몸가짐이라고 볼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제트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트람.”
“예, 저하.”
“유저랑 싸워본 적 있어?”
“...없습니다.”
제트람은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가 대답했다.
“그래? 의외네?”
“황실까지 들어오는 유저는 많지 않습니다.”
“음... 하긴, 리반 경은 특이한 경우지.”
데일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제트람을 바라보았다.
제트람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본래 무표정하지만, 그런 제트람 조차 긴장을 했다는 뜻.
데일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제트람은 항상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
“그럼 유저랑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어?”
“그건...”
제트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실력이 형편없지만 개중에는 리반처럼 강한 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상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그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데일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그게 뭐야, 내 호위 기사가 그 정도밖에 안 돼?”
“저하...”
“그래,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그 프레이라는 유저는 어때?”
제트람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만난 그 프레이라는 유저는 대장장이 틈에 섞여 있었다.
‘그자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아.’
유저는 강함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언제나 위험한 곳을 찾아다닌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 때문인지 그들은 위기를 찾아다녔다.
사람은 위기를 겪으면 강해지기 마련이니까.
달리 말하면 유저 중에 안전한 곳을 찾아다니는 이는 그만큼 약하다는 뜻. 대장장이 틈에 어울려 잡일이나 하는 프레이가 강할 리 없었다.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트람은 겸손하게 말했다. 굳이 티를 내지 않아도 데일은 알고 있을 테니.
“으흠... 그렇단 말이지...”
데일은 씨익 웃다가도 곧 코를 쥐어 막았다.
“아... 제트람. 역시 씻는 게 좋겠어.”
“예...?”
“식사할 때 냄새 풀풀 풍기면서 옆에 있으면 식욕이 돋겠어? 지금 시간 있을 때 빨리 씻는 게 좋겠다는 말이지.”
“허나...”
“허나는 무슨, 황명이다.”
“...명을 받습니다.”
제트람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걱정 되면 빨리 씻으면 되지?”
“알겠습니다.”
제트람은 빠르게 장비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지자 데일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저하? 계십니까?”
“빨리 씻기나 해!”
“알겠습니다.”
물소리가 들렸다. 제트람은 최대한 빠르게 몸을 씻어냈다.
“저하?”
거품을 씻어내기 위해 물을 끼얹은 제트람은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저하?”
대답이 없다.
눈을 끔뻑이던 제트람은 욕실을 뛰쳐나왔다. 아직 씻지 않은 거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옷을 갖춰 입을 생각도 없이 일단 검을 잡았다.
“이런...!”
황태자가 사라졌다.
* * *
쿠당탕-
“크윽...”
바닥을 나뒹굴며 신음이 절로 나왔다. 프레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오토마톤은 쓰러진 프레이를 향해 검을 겨누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역시... 기사 수준은 힘든가...’
오토마톤의 수준을 빠르게 올렸다.
일반 병사는 가볍게, 십인장은 약간 숨이 차는 정도로, 백인장은 땀을 흘리는 수준에서 끝났다.
베긴네르의 기사단장인 게리슨은 십인장과 백인장의 수준. 백인장을 이기는 건 프레이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백인장과 기사의 수준은 확연히 달랐다.
‘검이 살아있다.’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검이 살아 움직이는,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
‘이래서 기사가 되기가 힘들구나...’
프레이는 그대로 앉아서 오토마톤을 바라보았다. 온몸에서 흐르는 땀에 서늘한 바람이 불자 기분이 좋아졌다.
활력의 반지가 제 역할을 하는지 가빴던 호흡이 점차 고르게 변했다.
‘덕분에 검술 스킬이 빠르게 올랐다.’
[초급 검술 Lv9 (89%)]
훈련 효과 증가의 덕분이었다. 그만큼 훈련용 오토마톤의 효과는 놀라웠다.
‘그러니까 많이 없는 거겠지?’
프레이는 회복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기회이니만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음?’
프레이는 다시금 오토마톤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러나 오토마톤이 반응하지 않았다.
오토마톤의 검은 축 늘어져 내려가 있었다.
‘설마... 고장이라도 난 건가!?’
프레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사의 실력을 낼 수 있는 오토마톤의 가격이 얼마겠는가?
적어도 골드 단위 일터. 프레이는 다급하게 오토마톤에 손을 대었다.
[마정석의 마력을 전부 소모했습니다.]
[마정석을 교환해주십시오.]
‘마력이 전부 소모? 일단 고장은 아닌 건가?’
프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정석이라는 걸 교환해주면 된다니,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마정석은 얼마지?’
프레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사용한 마정석의 값을 치러야 하는 건 아닐까?
‘에이... 쓰라고 했는데, 설마...’
짝- 짝- 짝-
프레이는 고개를 젓다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눈을 돌렸다.
“꽤 하는데?”
“어, 어...?!”
프레이는 말문이 막혀 눈을 끔뻑였다. 데일이 그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왜 황태자가 여기에 있는가?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네. 덕분에 찾아다니는 데 고생 좀 했어.”
“황태자 저하?”
“훈련용 오토마톤이라... 레스톤도 꽤 수입이 좋은 것 같네?”
데일은 오토마톤의 주위를 돌며 미소를 지었다. 프레이는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어차피 유저들은 제국의 후예를 섬기지 않잖아?”
“예? 아... 그, 그렇죠.”
프레이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했다. 프레이로 환생하기 전에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유저들은 공직에 오르지 않는 이상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다. 우조스처럼 위험 지역이 아닌 이상 유저들은 어느 국가라도 갈 자유가 있었다.
국가에 귀속되지 않기에 귀족들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그가 유저들을 선망했던 이유 중에 하나기도 했다.
‘그래... 나는 더 이상 제국의 후예를 섬기지 않는다.’
프레이는 다시금 자신의 처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건방지게 굴 필요도 없었다.
“허나, 섬기는 것과 존경하는 것은 다릅니다.”
“존경?”
“예, 장차 제국의 후예를 다스릴 분에게 예의 없게 행동할 수는 없으니까요.”
프레이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뿌듯해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내가 제국의 후예를 이어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건가?”
“예?”
“아니, 됐다. 아무튼 너무 예의 차릴 필요도 없어. 내 주위에는 예의 차리는 인간들뿐이라서 피곤하다니까.”
데일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는 오토마톤의 앞으로 나와 프레이를 마주했다.
“그런데, 검 솜씨가 괜찮은 것 같던데?”
“아...”
프레이는 얼굴을 붉혔다. 오토마톤을 상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다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오토마톤도 등급이 있잖아? 무슨 등급이었어?”
“아, 기사 등급에 도전했다가...”
“기사!?”
데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껏해야 십인장이겠거니 했건만 기사라니?
“설마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예? 아니, 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말 기사라는 말이야?”
데일은 눈을 껌뻑였다. 분명 자신이 봤을 때는 오토마톤과 호각을 겨루는 것처럼 보였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기사 등급과 그렇게 싸울 수 있다고?’
프레이는 자신을 훑어보는 데일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린 사이.
“저하!”
프레이와 데일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하반신에 수건을 대충 두르고 검을 들고 뛰어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런 모습이면 부끄러울 만도 하건만, 정작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데일 저하! 괜찮으십니까?!”
“제트람... 꼴이 그게 뭐야?”
데일은 웃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며 물었다. 곧 그의 얼굴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프레이, 맞지?”
“예?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이 마정석 말인데, 전부 써버린 모양이더군.”
“네...?”
제트람은 프레이를 경계하며 데일의 뒤로 다가왔다. 데일은 프레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이 마정석, 얼마나 하는 줄 알아?”
프레이의 목젖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는 듯 데일은 미소를 지었다.
“3골드.”
검지와 중지, 그리고 약지가 펴졌다. 데일은 짐짓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
“알다시피 이곳의 물건은 곧 황궁의 물건이잖아?”
“저하, 그건...?”
제트람은 데일의 말투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 데일의 말을 막을 권한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네가 사용한 마정석도 황궁의 물건이지?”
“그, 그렇게 되겠네요.”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성 내의 물건을 황족의 소유라고 주장하면 기뻐할 귀족이 어디 있겠는가?
황실이나 귀족이나 소유권으로 다투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데일이 그런 말을 들고 나오니, 제트람은 불안했다.
“그러니 내게 3골드를 빚졌네? 지금 얼마나 있어?”
황궁의 물건은 곧 황족의 소유. 결국 프레이가 마정석을 빚지고 그 값을 황족인 자신에게 갚아야 한다는 논리.
정치적으로는 귀속되지 않으나 경제적으로는 귀속이 된다. 돈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니까.
“저... 그건...”
프레이는 빠르게 소지금을 살폈다.
현재 소지금은 1골드 47실버 30코퍼. 오늘 일당을 당장 하르판에게 받는다 하더라도 3골드를 채우기는 어려울 터였다.
“표정을 보니 없네, 없어.”
데일은 고개를 흔들고는 제트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제트람 경, 금전을 빚지는 자가 받는 처벌이 어떻게 되지?”
“예? 아, 최대 3년의 징역 혹은 채무액의 5배를 변상해야 합니다.”
전혀 쓰지 않았던 경이라는 칭호까지 붙이며 질문을 던지는 데일. 제트람은 프레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걸려도 단단히 걸렸구나...’
“3, 3년이요?”
채무액의 5배면 15골드. 3년보다는 15골드를 갚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아니지, 잠깐... 내가 왜?’
프레이는 얼굴을 굳혔다. 경비대장이 쓰라고 했기에 쓴 것인데 왜 자신이 죄를 짓게 된단 말인가?
“그러나 그건...”
“하지만!”
프레이가 막 반박하려는 찰나, 데일이 그의 말을 끊었다.
“빚을 바로 갚을 기회를 주지.”
“빚을 갚아요?”
“그래,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야.”
데일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뒤에 있던 제트람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제트람과의 결투에서 승리하면 없던 일로 해주지.”
“예?”
“저하?”
제트람과 프레이가 동시에 데일을 향해 되물었다. 그러나 데일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11%)]
[초급 검술 Lv9 (87%)]
[초급 단검술 Lv6 (21%)]
[약초 채집 Lv3 (39%)]
[초급 추적 Lv3 (27%)]
[초급 승마 Lv1 (12%)]
[초급 도축 Lv1 (0%)]
[초급 요리 Lv1 (0%)]
[초급 수리 Lv8 (78%)]
* * *
지방 잘 다녀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