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새로운 이름 -->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초록 점을 쳐다보았다. 미세하게 점이 떨리고 있었다. 프레이는 다른 곳으로 눈을 굴렸다.
초록 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과녁을 바라보면 초록 점이 생겨났다.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였다.
자신이 조준하는 곳에 따라 초록 점이 움직였다. 그제야 프레이는 깨달았다.
'유저들은 활이 날아가는 곳을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활 쏘는 법을 익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숱한 아버지의 조롱에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던가?
그런데 이 유저라는 작자들은 활을 드는 것만으로 활이 날아가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조롱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당시에는 한마디도 듣기 싫었던, 아버지가 놀릴 때마다 났던 짜증이 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다시 아버지의 농담을 들을 수 있다면...
'이런 재능을 가지고도 고작 저런 수준이란 말인가?'
프레이는 한심하게 활을 과녁의 중앙은 고사하고 과녁 위나 바닥에 화살을 쏘아대는 유저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활 하나 쏘지 못하는 유저들이 병신처럼 느껴졌다.
'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들에게 이런 재능을 주는 거지?'
프레이는 한숨을 내쉬고 시위를 놓았다. 조준점 자체가 필요 없었다.
더스틴 마을에서도 인정받는 그였다. 도망치는 사냥감을 잡는 프레이에게 가만히 서 있는 과녁보다 쉬운 상대는 없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순식간에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프레이를 지켜보던 경비병이 놀라서 달려올 정도였다.
경비병은 두 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경험에 따라 스킬 수준을 조정합니다.]
[중급 궁술을 익혔습니다.]
[중급 궁술 Lv1 (0%)]
‘이건 또 뭐지?’
프레이는 화살을 뽑아 돌아오며 나타난 메시지를 읽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경비병과 마주했다.
프레이가 다가오자 정신을 차린 그는 뒤에 쌓여있는 화살통 중 하나를 건네주었다.
"추, 축하드리오. 이렇게 깔끔하게 끝낸 건 처음인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 창은 곧 사라졌다. 프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시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유저들은 자신의 활쏘기에 여념이 없어 프레이가 한방에 통과한 사실을 몰랐다. 프레이는 활과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수련장을 떠났다.
프레이가 경비본부를 나와 의뢰 게시판을 확인하려 줄을 서려고 했을 때였다. 경비본부 위치를 알려준 경비병이 프레이에게 손짓을 했다.
프레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프레이를 칭찬했다.
"벌써 끝났나? 배지를 달았을 때부터 자네가 남다름을 알았지. 자네는 다른 유저와 다른 뭔가가 느껴져."
'이런, 그렇게 티가 나나?'
프레이는 웃으면서도 긴장했다. 자신의 정체가 들킨다면 모든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유저로 다시 태어나는 법을 노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불멸자가 되고 싶어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 추구하는 일이었다. 그런 관심 상태에서 리반에게 복수를 한다는 건 토끼가 늑대를 잡아먹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의 걱정은 다소 과장된 것이었다. 다른 NPC는 그가 원래 NPC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
경비병의 칭찬은 프레이에게 부탁을 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경비병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네에게 조심스럽게 부탁 하나 하지. 자네라면 문제없을 거야."
"부탁이요?"
"어허, 어허. 목소리 낮추게. 이건 의뢰 게시판에 의뢰할 수 없는 일이거든. 자네에게 부탁 좀 함세. 어려운 일도 아니고, 보상도 넉넉하게 줄 터이니."
경비병은 누가 볼세라, 그리고 누가 들을세라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해 보였지만 마을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게시판을 관리하는 경비병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프레이는 보상이라는 말에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무일푼 신세를 벗어나는 게 급했기 때문이었다.
"음음, 오해하지 말게. 나는 근무도 성실하게 서왔고 지금까지 문제 하나 일으킨 적이 없는..."
경비병의 말이 빙빙 돌아가자 프레이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보상이 넉넉하다는 말이 아니었으면 바로 떠났을 것이었다. 숲속에 들어가 사냥을 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돼서야 경비병이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 이 업무는 꽤 고달프다는 걸세. 이 더운 날에 목마름이 간절할 때가 있어서 말이야. 자네가 내 목을 축일만 한, 마시면 기분이 좋은 걸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어떤가?"
프레이는 경비병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가 원하는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근무 중에 술이 마시고 싶다니. 프레이는 한숨이 나왔지만 참아냈다.
일을 가려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사 오라는 거죠?"
"어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린가. 누가 술이라고 했나. 기분이 좋아지는 시원한 음료수지. 여관에 가면 술을 포장해주니 그쪽으로 가보게. 돈은 여기 있네. 남는 돈은 다 자네가 가지면 되네."
경비병은 1실버를 건넸다.
술값치고는 확실히 비싼 금액이었다. 아니, 그보다 방금 자기 입으로 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프레이는 경비병의 말꼬투리를 잡기보다는 얼른 술을 가져다주는 게 더 빠른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 여관은 저기 광장 동편에 보이나? 상가로 진입하는 입구 쪽에 있는 큰 건물일세. 가면 사람들이 많을 테니 찾기 어렵지 않을 거야."
"네, 알았어요."
"그래, 부탁함세.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야기 말고."
프레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고 광장 동편으로 갔다.
경비병의 말대로 상가로 이어지는 입구인 만큼, 사람들이 밀집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여관 앞에서 한 유저가 술을 팔고 있었다.
'누가 여기서 술을 사 먹어?'
프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관에서 사도되는 술을 당당하게 파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하거나 더 싸지는 않을까?
어쩌면 잔돈을 더 많이 남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프레이는 좌판을 보았다.
[꿀맥주- 70쿠퍼. 꿀을 첨가해 달콤한 맛이 나는 맥주. 달달하고 시원한 이 맛!]
[소금맥주- 50쿠퍼. 짭짤한 맛이 풍기는 맥주, 안주가 없을 때 안성맞춤!]
파는 술은 2가지였지만, 가격이 매우 셌다.
더스틴 마을에서 팔던 맥주가 20쿠퍼임을 고려했을 때, 조금 다르다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좌판 주인은 힐끗 프레이를 바라보았지만, 행색을 보아하니 돈이 없는 게 분명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프레이 역시 비싼 돈 주고 살 생각은 없었다.
일단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유저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계산대로 다가가 주문했다.
"시원한 맥주 하나 주세요."
"아, 이런 어떡하죠. 지금 주류가 다 떨어졌습니다."
계산대에 있던 점원은 매우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죄송한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프레이에게는 점원이 죄송한 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술이 다 떨어졌다고요?"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 말에 프레이는 주위를 훑었다.
점원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듯 누구도 술을 먹는 사람이 없었다.
"네, 어찌 된 영문인지 재료 도착이 좀 늦어져서요. 대신 식사는 됩니다. 식사는 어떠세요?"
직원의 직업 정신은 높이 사지만, 프레이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1실버는 경비병의 돈, 마음대로 썼다가는 그 돈을 준 당사자에게 잡혀갈 우려가 있었다.
프레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후...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이는 돈을 돌려주고 경비병에게 비극을 전달하기로 했다.
프레이가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그 배지는?”
“아, 이거요.”
직원이 그를 멈춰 세웠다. 프레이는 인벤토리에 달린 배지를 보여주었다.
직원은 주위를 살폈다.
여관 안은 저마다 이야기와 식사에 집중해서 직원에게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배지를 받은 유저는. 정 급하시면, 술을 구할 수 있는 데를 알려드리죠."
직원의 말에 프레이는 반색했다. 하지만 직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이 갔다.
"좌판에서 사기에는 너무 비쌉니다. 그 정도 돈은 없어서요."
"아, 그 방법도 있지만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직접 만들면 돼요."
"직접?"
이게 무슨 소린가? 술을 직접 만들라고?
직원은 프레이에게 이마를 부딪칠 기세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상가 안쪽에 잡화점에 가보시면 알튼 씨가 계십니다. 잡다한 일을 맡고 계시는데, 그중에는 연금술도 있죠. 배지를 보여드리고 여관의 소개로 왔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가끔 술이 부족할 때 부탁드리기도 하거든요."
'연금술로?'
연금술은 여러 물약이나 재료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그런 연금술이라면 술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프레이는 감사를 표하고 여관을 나섰다. 저 좌판에서 파는 술도 분명 연금술로 만든 게 틀림없었다.
그는 상가 안쪽으로 달려갔다. 잡화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 근처에 물약과 지팡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니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프레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문이 거칠게 열려 프레이가 얼굴을 박을 뻔했다.
"제대로 된 마법도 못 가르치는 영감탱이가!"
"이게 못하는 말이 없어! 안 가르쳐줘! 썩 나가!"
"배울 마법도 없네요! 참나, 어이가 없어서."
프레이는 문 뒤에서 얼굴이 붉어진 여성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스태프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대화 내용으로 추측해보면 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았지만.
'여기서 마법도 가르치는 건가?'
프레이는 여성이 지나간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백발의 노인이 뒤로 돌아서 있었다. 가게 안에는 잡화점답게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물약은 물론이요, 각종 장신구부터 스태프와 서적 등이 벽을 메우고 있었다.
"저, 알튼 씨?"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해보면 저 노인을 자극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훤히 벗어진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알튼은 아직 화가 난 건지, 원래 주름이 그렇게 생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뭐요?"
알튼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프레이는 더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인데, 프레이의 방문 타이밍이 약간 어긋난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프레이는 빠르게 일을 마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망설이면, 더 심기가 불편해질지도 몰라.'
프레이는 배지가 되도록 보이도록 몸을 돌리고, 직원이 얘기한 대로 말했다.
"여관 소개로 왔는데요. 여기서 연금술로..."
"음? 배지로군. 자네는 저 몰지각한 유저들과 좀 다른 모양이야. 그래, 연금술을 배우고 싶다는 게지."
"네? 아, 아뇨 제가 필요한 건."
"뭐가 아니야. 술 만들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러려면 연금술을 배워야 할 거 아닌가? 내가 직접 만들어서 갖다 바치길 원하나?"
'아, 성격이 좀 꼬이긴 했네.'
프레이는 전투적인 그의 말투에 방금 나간 여성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생긴 것만큼이나 꼬장꼬장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을의 위치인 프레이로서는 하라는 대로 해야 할 뿐.
"예. 뭐, 제가 직접 만들도록 하죠."
“그래, 그래야지. 요즘 젊은이들은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해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어디 보자...”
알튼은 찬장을 뒤졌다.
그 사이 프레이는 연금술 기구를 살펴보고 있었다. 다양한 시험관부터 큰 가마솥과 약초 등을 빻는 데 사용하는 약 절구도 있었다.
"어허... 자네 이름이 뭐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프레이는 돌아보며 대답했다.
"네? 아, 핸... 프레이라고 합니다."
"핸프레이?"
"아뇨, 프레이입니다."
아직 이름이 익숙지 않아서인지 자꾸 옛 이름으로 대답하는 프레이였다. 알튼은 손을 털며 프레이를 돌아봤다.
"지금 재료가 다 떨어졌구먼. 다음 재료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는데, 급한 건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계속 재수가 없는 프레이였다.
술 하나 사 가는 데 뭐 이렇게 오래 걸린단 말인가?
그가 막 포기하려는 찰나였다.
"뭐, 연금술의 기본부터 배운다고 생각하게. 북쪽 문으로 나가면 산이 나올 거야. 거기 가보면 군데군데 맥주 풀이 있을 걸세. 그걸 좀 가져와 봐. 다른 재료는 있는데 그것만 없구먼."
"맥주 풀이요?"
프레이는 반문했다.
맥주라면 모름지기 보리로 만드는 게 아니던가? 갑자기 풀을 캐오라는 말은 또 뭔가?
그런 반응이 익숙한 듯 알튼은 손사래를 쳤다.
"잔말 말고 얼른 갔다 와. 여기가 술집이야? 맥주로 언제 빚어 먹게? 술은 맛만 나면 되는 거야. 어여 갔다 와. 어떻게 생겼냐면 말이지..."
알튼은 종이에 펜으로 그림을 휘갈기고 프레이에게 건넸다.
맥주 풀의 몽타주를 받은 프레이는 한숨을 쉬며 문을 나섰다. 쉬운 일이라고 덥석 받은 일이 점점 요구하는 게 많아졌다.
'역시 사냥을 하는 게 나을지도. 아, 산에 맥주풀이 있다고 했지? 가는 김에 사냥도 좀 해야겠군.'
프레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맥주를 만들면 재료비도 들지 않는다.
1실버가 곧 그의 손에 그대로 남게 된다는 뜻. 거기에 어차피 산으로 가는 거니 사냥까지 해오면 부수입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해가 어느 정도 기울고 있었다. 프레이는 해가 지기 전에 얼른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보유 스킬 목록]
[중급 궁술 Lv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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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없는 시스템 메시지를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