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퀄라이저-1화 (1/141)

<-- 1. 핸슨 주니어 -->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건만, 바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추위를 느끼지 않을 만큼 두꺼운 털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바람 사이로 불쾌한 냄새가 났다. 아니, 불쾌한 정도를 넘어 위험한 냄새였다.

냄새를 눈치 채는 게 느렸다.

평소와는 달리 더 목마름이 간절했던 탓일까, 아니면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걸까?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친구들은 모두 흩어진 뒤였다. 그 뒤를 따라 뛰었다.

늦었다.

발을 차는 소리보다 먼저 들렸던 날카로운 파공성. 그것이 곧 자신에게 죽음을 내리는 마지막 선고임을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음이 빨리 찾아왔다는 점.

아픔은 없었다. 하지만 힘없이 쓰러지며 머리를 물속에 처박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쓰러진 자신의 육체를 탐하려 다가오는 저 가증스러운 존재들.

이제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자신은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쓰러진 육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떠나야 했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들에게 저주의 말이라도 쏟고 가고 싶었다.

곧, 그런 바람도 사라졌다.

그렇게 물을 마시던 노루는 자신의 육체를 놔두고 자리를 옮겼다. 쓰러진 노루로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와 혈기 왕성해 보이는 청년은 죽은 노루의 여정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영혼이 떠난 육체에만 집중했으니.

"깔끔하게 뚫었구나."

중년의 남자가 쓰러진 노루를 끌어내어 살펴보고 말했다.

화살 하나가 노루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은 상태였다. 가죽도 손상되지 않았고, 머리를 노려 고기 역시 멀쩡히 도축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정도면 평소 자신이 잡은 노루보다 배는 비싸게 팔 수 있을 터,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칭찬을 들은 청년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웃었다.

칭찬이란 건 언제나 듣기 좋은 것.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잘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혼자 들 수 있지?"

"아니, 아버지. 이런 큰 노루를 혼자 어떻게…."

"그럼 나이든 내가 하리?"

청년의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표정에는 양보의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동안 잡아서 엮은 토끼 3마리를 허리에 매었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진짜….”

남겨진 청년은 배설물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든 게 무슨 상관인가, 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근육질의 몸은 아버지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었으니까.

해진 옷을 기워 입지 않는 건 돈이 아깝기보다 몸을 자랑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이런 귀찮은 일만 아들에게 맡기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어쩌랴? 아버지의 명령은 둘째치고, 이 노루를 두고 가면 당장 내일 가족들 먹일 밥이 없는데.

“하여간, 아들을 부려먹으려고 키우는 건지….”

구시렁대면서도 청년은 무릎을 굽혀 노루를 어깨에 걸쳤다. 상대적으로 마른 몸에도 불구하고 노루를 짊어진 청년의 표정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청년의 아버지가 괜히 아들에게 고생을 시키려는 건 아니었다. 사냥꾼으로서 요령을 배우려면 직접 말로 하는 것보다 몸으로 익히는 게 빨랐으니까.

"해가 진다. 어서 오너라."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보폭을 좁히며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산길이 험한 만큼 무거운 물건을 들고 내려가다 다칠 수 있으니 언제든지 도와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청년은 그런 속사정을 모른 채 속으로 무겁다를 연이어 외치며 내려갔다.

"좀 기다려요!"

* * *

푸른 하늘이 붉게 물들며 태양이 자리를 옮길 때 즈음.

정육점의 손님들도 하나 둘 저마다 구매한 고기를 가지고 자리를 뜨는 중이었다.

손님이 빠졌지만 정육점 주인은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내일도 고기를 팔아야 하고, 모레도 고기를 팔아야 했다.

일부 멀리 나가는 손님들, 특히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유저들은 생고기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훈제고기를 선호했다.

가게의 매출 대부분이 유저들로부터 나오는지라, 마을 주민들을 위한 고기보다 훈제고기를 더 많이 만들어 둬야 했다.

딱히 마을을 벗어날 생각도, 돈을 모아서 뭔가 하고 싶은 일은 없었지만 들어오는 돈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정육점 주인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고기를 썰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오늘 매출에 만족한 터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와중이었다.

"장사가 좀 됐나 보네?"

정육점 주인은 콧노래를 방해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오, 핸슨. 수고했네, 수고했어."

정육점 주인은 도축용 칼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핸슨은 마을의 사냥꾼으로 마을 내에서 재료를 수급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간간이 유저들이 고기를 팔기도 했지만, 대개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기도 했고 무슨 원한이 있는지 동물들을 쥐어 패는 통에 고기의 질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핸슨이 가져온 고기는 비교적 깨끗하고 가격 역시 적당했다.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냥감이 좀 적은 모양이었다. 단순히 토끼 3마리만 올려놓다니.

정육점 주인은 내색하지 않았다. 사냥이라는 것이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은 좀 어려웠나 보군?“

“모르겠어, 요즘 동물들 찾기가 힘들어.”

핸슨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최근에 유저들 왕래가 잦아서 사냥감 찾기가 힘든 건 이해하네. 그 인간들이 가져오는 고기라는 게 도통 멀쩡한 부분이 없어요."

정육점 주인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핸슨은 엄지손가락을 뒤로 가리켰다.

"그래도 오늘의 대박은 따로 있지."

"대박?"

핸슨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간 정육점 주인의 시선에는 자기 몸만 한 노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살아있는 노루를 기절시켜서 가져온 것만큼 깨끗한 상태의 노루였다.

"핸슨 주니어가 또 한 건 했나 보구먼. 이야, 이거 자네도 은퇴할 때가 된 거 아닌가?"

정육점 주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핸슨의 아들은 사냥꾼으로서의 재능을 여지없이 뽐내고 있었다. 그의 활 솜씨는 마을 내에서도 자자하여 간간이 자경대원들에게도 활 쏘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아직이지, 자기 이름도 갖지 못한 애송이한테 너무 기대가 큰 거 아냐?”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핸슨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들은 아직 이름을 받지 못했다. 성년이 되기 전에는 그저 핸슨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릴 터였다.

그러나 성년이 되면 자신 못지않은 사냥꾼이 될 것이라는 건 핸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기뻐하는 정육점 주인과 달리 핸슨 주니어는 죽을 맛이었다.

산에서부터 짊어지고 내려왔으니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산길을 내려오는 것도 주의해야 하는데 무거운 노루를 짊어지고 오려니 얼마나 근육이 긴장했겠는가?

정육점에 도착하자마자 핸슨 주니어는 노루를 패대기칠 기세로 내려놨다.

"아, 진짜. 무겁네. 아저씨, 이거 가격 잘 쳐줘요. 진짜 실한 물건이에요."

"알았다, 알았어. 보기에도 그래 보이네."

머리 쪽에 박혀 있는 화살 외에는 잔 상처 하나 없었다. 가죽은 통으로 팔면 꽤 돈이 될 듯싶었다.

게다가 그 좋다는 노루의 피, 마을 내에는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없지만 특별하게 유저들이 찾는 물건이기도 했다.

피를 가져다 어디다 쓰는지 모르지만, 그들 나름의 방식이 있으리라.

"아이고, 무겁네."

기쁜 마음에 얼른 들고 가려 했지만, 확실히 무게가 많이 나갔다.

정육점 주인은 핸슨에게 눈짓했고, 핸슨은 곧바로 받아들였다.

"아들아, 배달은 끝까지 해야지."

뭉친 어깨를 주무르던 핸슨 주니어는 아버지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노루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저씨. 네, 그쪽 잡아줘요."

"하나, 둘!"

정육점 주인과 핸슨 주니어는 노루의 양다리를 붙잡고 정육점 안으로 들어갔다.

핸슨은 엮어 놓은 토끼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광장 쪽을 둘러보았다.

광장 쪽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이미 해가 져서 대부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지만,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집이 없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유저였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구분할 수 없지만, 이런 산골 마을에 저런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유저들뿐이었으니 추리는 어렵지 않았다.

최근 유저들이 몰려든 덕분에 마을 경제가 되살아났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유저들은 언제나 위험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모여 있다는 건 언제든지 위험한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상태 좋은 노루 한 마리, 토끼 3마리. 다 돈으로 바꿀 건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핸슨은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노루 고기를 먹어볼까 싶었지만, 토끼로 참기로 했다.

쓰던 활도 이제 오래되었는지 탄력이 약해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사냥도구를 구매해야 할지도 모르니 저축을 좀 해두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토끼 2마리만 고기로 바꿔주게. 나머지는 돈으로 부탁하지."

"그래, 그럼 어디 보자…."

주인이 셈을 하는 사이 핸슨 주니어가 밖으로 나왔다.

핸슨 주니어의 시선은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쏠려 있었다.

유저들은 즐거워 보였다. 왁자지껄하게 광장에 좌판을 열기도 하고 사람들을 모으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밤낮이 무의미했다.

"뭘 그리 보고 있느냐?"

핸슨은 넋을 놓고 있는 아들에게 다가갔다. 핸슨 주니어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사냥꾼으로서 존경받는 아버지였지만, 저 유저들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핸슨 주니어는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저기 있는 유저들처럼 모험을 즐기고, 명성을 쌓고,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뱉은 적은 없었다.

그들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으니까.

"아버지, 저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을까요?"

핸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핸슨 주니어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유저에게 향하는 시선만으로도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어릴 때 그런 마음을 품었으니까.

핸슨은 아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막 정리한 대답을 이야기하려는 찰나였다.

"핸슨, 여기 노루 한 마리에 7실버, 토끼 한 마리에 50쿠퍼라네. 노루는 정말 상태가 좋아서 후하게 쳐준 거야. 토끼고기도 잊지 말고."

정육점 주인이 돈주머니와 고기를 건네주었다.

덕분에 핸슨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대신 핸슨은 아들에게 4실버를 건네주었다.

"오늘 수고한 보상이다. 광장에서 놀되 늦지 않게 오너라."

"어, 아버지?"

핸슨 주니어는 갑자기 생긴 용돈과 평상시와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이유를 알기보다 아버지 마음이 변하기 전에 움직이는 게 더 중요했다.

핸슨 주니어는 얼른 발을 떼며 말했다.

"이따가 봐요! 저녁때 맞춰서 갈게요!"

산에서 내려오며 끙끙대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속도였다. 광장 인파 속으로 사라진 아들의 모습을 보며 핸슨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 *

핸슨 주니어는 유저들 사이를 헤쳐 가며 구경을 했다.

좌판에는 형형색색의 포션과 날카로운 예기를 띠고 있는 무기들, 어디서 구했을지 모를 괴상한 가죽 등 없는 게 없었다.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핸슨 주니어에게는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사냥을 나가는 건 어디까지나 뒷산에 한정되어있기에 유저들 입에서 흔하게 나오는 몬스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유저들은 핸슨 주니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붙잡고 연신 호객을 하던 유저들도 핸슨 주니어가 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방해라는 듯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핸슨 주니어는 그런 시선에 익숙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런 물건을 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쫓아내지나 않으니 다행이었다.

"비켜요! 비켜!"

인파가 갈라지면서 핸슨 주니어는 사람들에 치여 구석으로 내몰렸다.

무작정 밀어대는 사람들에게 한 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핸슨 주니어는 뒤이어 등장하는 행렬에 시선을 뺏겼다.

늦은 저녁임에도 빛을 발하는 태양처럼 붉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전사들과 같은 색으로 맞춘 로브를 입은 사제와 마법사들.

유저들은 그들의 등장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진짜다…! 길드 1위인 '떠오르는 태양' 맞지?"

"역시, 그 정보가 진짜였어."

"저 사람이다. 길드장인 리반이야"

핸슨 주니어는 행렬의 맨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짧게 세운 머리에 갑옷은 그를 위해 맞춘 듯 다른 사람들과 달리 몸에 딱 맞아 보였다. 나잇대는 자신과 비슷한데 저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길드장이라면 길드를 이끄는 이를 뜻하는데, 저렇게 어린 나이에 뒤에 있는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니.

핸슨 주니어에게는 다른 세계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행렬에 시선을 뺏겼지만 더 노닥거릴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핸슨의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동물들을 사냥하는 숲과 마을 사이에 집을 지어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렸다.

결국 용돈으로 받은 4실버는 쓰지도 못했지만, 핸슨 주니어는 여유로웠다.

유저들은 계속 찾아올 것이고 좌판은 계속 열릴 것이다.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 구경하면 될 일이었다.

핸슨 주니어는 사람들을 헤치고 집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노블레스 연재는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_ _)

5화까지 빠르게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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