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3 Joker U Manhwa Festival =========================================================================
“뭘 굳이 여기까지 왔어.”
이른 오전. 지혁은 갑작스럽게 벨이 울려 확인해보았는데,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흠칫한 그는 황급히 정문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문을 여니 캐주얼한 복장의 은서가 서 있었다.
“서울집이 어떤지 구경도 해볼겸 겸사겸사 왔지.”
은서가 그렇게 말하면서 쇼핑백을 내밀었다. 뭐 대단한게 들어있을까 싶어서 슬쩍 내용물을 살펴보니 두루마리 휴지가 아무렇게나 들어있었다.
지혁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보고있나 싶어서 눈을 꿈뻑거렸다.
“야. 장난해? 새 휴지를 사온 것도 아니고 집에 있는걸 이렇게 싸들고 왔냐?”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
“이럴거면 그냥 빈손이 낫다는 생각은 안드냐?”
지혁은 툴툴대면서 쇼핑백을 들고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니 정원이 나왔다. 은서가 피어있는 꽃에 정신이 팔린 사이 지혁은 거대한 통유리를 열어젖혔다. 통풍이 잘되라고 해놓은 집구조에 무색하게, 지혁이 이 문을 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주말이라 가정부 아주머니들도 없어서 지혁은 쇼핑백을 대충 던져두는 것이 아니라 신발을 벗고 직접 화장실로 향했다.
두루마리 휴지를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둔 지혁은 쇼핑백을 주방의 서랍장에 보관하고서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집 딥다 크넹.”
“이렇게 와도 괜찮은 거야? 공부는?”
그냥 해본 말이었다. 6월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달성했다고 신나했던 것이 엊그제가 아니던가. 은서는 착실한 성격이기 때문에 그 뒤로 꾸준히 공부에 매진했을 것이다.
그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서는 소파에 늘어져 있다. 지혁의 물음에 은서는 소파 팔걸이에 턱을 턱하고 걸치며 말했다.
“때로는 휴식도 필요한 법이라구.”
“…점심은?”
“안 먹었지.”
당당하시군.
그가 직접 요리를 해줘도 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고급 식당에라도 데려가는게 맞지 않을까. 지혁은 사전에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은서에게 핀잔을 주려다 관뒀다. 아마 그의 성격상 온다고 하면 한소리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3이고, 중요한 시험이 몇 달 남지도 않은 상황이 아닌가.
“예약이 되는데가 있을지 모르겠네. 말을 하고 오지.”
“놀래켜 줄려고 그랬지.”
놀라기는커녕 황당하기만 하구만 뭘. 지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전에 이승현과 다녀왔던 코스요리 전문점에 전화를 걸어 예약이 되는지를 문의했다.
[ 아, 그… …근데 혹시 챌린저 유님 아니신가요? ]
“아, 네… 맞습니다.”
설마 목소리만 듣고 알아차린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여성이 말했다.
[ 아, 역시 그렇구나. 그때 사인은 잘 전시해 두었습니다. ]
아하. 저번에 사인을 받아갔던 그 여종업원인 모양이었다.
“아, 네.”
그래서 예약이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지혁이 궁금한 것은 그것인데 그녀는 계속 딴소리를 해댔다. 챌린저 유의 사인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둥, 사장님도 진짜 왔었냐면서 물어보았었다는 둥.
지혁은 결국 그녀가 잠깐 말을 끊은 타이밍에 치고 들어갔다.
“저… 그래서 혹시 예약이 되는 걸까요?”
[ 아. 네, 어… 잠시만요. ]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지혁은 일단 전화기를 계속 귀에 대고 있는 상태로 통화중에 옆에서 계속 물을 달라고 칭얼대는 은서를 한 번 째려본 후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서 물통과 유리컵을 건네주었다.
대략 1~2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전화를 끊어야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쯤 전화기를 들어올리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음성이 들려왔다.
[ 사실 저희가 예약이 꽉 차있었거든요. 지금은 잠시 쓰지 않고 보수작업중인 별실이 있는데 그곳에 급히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게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는데.
‘…….’
어쨌든 된다니까 다행이다.
“아, 감사합니다.”
[ 혹시 언제쯤 도착하실 예정이신지 여쭤도 될까요? ]
그 말에 지혁은 잠깐 전화기를 귀에서 떼며 은서를 쳐다보았다.
“배 많이 고파?”
“응.”
즉답인가. 그럼 정말 배가 고프다는 소리였다. 은서의 상태를 확인한 지혁은 곧장 말했다.
“빠르면 30분. 늦으면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낸 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 정도는 니가 꺼내먹지 그래?”
“먼 길을 달려왔는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라구.”
두 다리를 교차하면서 발등으로 소파를 퍽퍽 치면서 말하는 모습은 짜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지혁은 예민할 대로 예민할 수험생의 감성을 생각해서 참아냈다.
그러나 그 뒤, 나갈 준비를 하라는 지혁의 말에 좀만 쉬다가자고 떼를 쓰는 은서의 등짝을 퍽퍽치면서 결국 폭발해버린 지혁은 입이 삐죽 튀어나온 은서와 함께 택시를 타고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미쳤어미쳤어. 택시비가 2만원이 넘게 나왔잖아!”
지금 가는 음식점은 1인당 식사비용이 그것의 10배에 달하는데 이 정도로 놀라서 되나. 2만원이면 지혁이 1초동안 숨쉬고 있을 때 벌리는 돈보다도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서는 아직 고등학생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돈을 아껴야된다는 이유 때문인지 지혁에게 난리였다.
“어서오세요.”
기억에 있는 여종업원, 지혁과 통화를 했던 여성이 그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지혁과 은서는 정갈한 가게 내부를 지나서,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꼭 지혁의 정원같은 곳을 지나쳐서 연못이 있는 곳에 이르니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 나왔다.
“오빠, 여기 비쌀거 같은데.”
“그래봤자 내가 버는 돈에는 티도 안나.”
“그래도…. …오빠가 다 내는 거지?”
“그럼 너보고 내라고 하겠냐? 그리고 니가 쓰는 돈도 내돈이다.”
대충 답한 지혁은 입을 다물었다.
은서는 지혁이 이미 조 단위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혁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나뿐인 핏줄인데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 대단한 사안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끼 식사를 좀 호화롭게 먹는다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지혁이 그간 그녀에게 소홀했다는 생각은 좀 든다.
“카드 지출 내역을 살펴봤는데 너 돈을 거의 안 쓰던데?”
“쓸데가 없어.”
지혁은 믿지 않았다.
“나 돈 많다고 했잖아. 그냥 팍팍 써. 사고 싶은 거 그냥 다 사.”
사실 지혁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 소극적인 소비생활을 하다가 이승현에게 한소리 들었지 않은가. 은서의 지출내역을 확인한 것도, 본격적으로 돈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확인해본 것이었다.
“니가 써봤자 한달에 몇 억 정도겠지. 그건 몇 시간 수익정도밖에 안돼. 그니까 그냥 사고싶은 거 다 사라고.”
“알았어.”
대답은 시원하게 하지만, 은서는 기본적으로 검소한 편이다. 명품 같은 것을 살리는 없다. 그래도 은근히 예전의 태도가 남아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일단 보류하는 느낌으로 소비생활을 해왔을 것이 분명하다. 지혁은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저… 혹시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음식을 가져온 그 여종업원의 물음에 지혁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혹시 두분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여자친구분인가요?”
지혁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뇨. 친동생입니다.”
“아하. 동생이시구나.”
그녀는 옅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곤 음식을 부지런히 세팅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물러가자, 젓가락을 앙 물고서 그녀와 지혁을 빤히 쳐다보던 은서가 말했다.
“오빠. 이런 삶을 살고 있었어?”
“시끄러워.”
놀리려는 기색이 역력해서 지혁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은서가 말했다.
“하긴. 오빠같은 왕고래가 있는데 낚아보려는 낚시꾼이 없는게 이상하지.”
“…….”
방금 그게 지혁을 유혹했었던 것인가? 지혁은 별로 의식하지 않았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까 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모습이기는 했다.
“근데 어쩌나. 이미 임자가 있는데 말야.”
은서의 말에 지혁은 거의 말을 끊는 수준으로 말했다.
“헤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음성이었다. 생각해보면 최근에 차현진에 관한 생각을 그다지 많이 하지는 않았다.
“뭐? 진짜?”
“그래.”
“흐음…?”
뭐야.
지혁은 눈을 빛내는 은서를 보면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혁은 지독한 여름날씨 때문에 흘린 땀이 찝찝해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은서가 보이질 않았다. 이리저리 찾아보니까 지혁의 침실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대자로 뻗어 있었다. 많이 피곤했었던 모양이었다.
“에휴….”
지혁은 공주님 안기로 그녀의 오금 부분에 손을 넣어서 들어올렸다.
지혁은 잠을 잘 때 좀 예민한 편이다. 쉽게 깬다고 해야 하나. 반대로 은서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자고는 한다. 지혁의 예상대로 당연히 이 정도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에 제대로 눕히고 난 뒤에 이불을 덮어준 지혁은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서 문을 닫았다.
“만화나 볼까.”
은서가 오기 전까지 웹툰을 보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지혁은 작업실로 향했다. 컴퓨터를 키고 웹툰을 보려던 그는 실시간 검색어에 그의 이름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조커 유는 아니었다. 챌린저 유. 아무래도 방금의 외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밥만 먹고 바로 온 것이 아니라 밥을 먹고나서 활기가 넘치는 은서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인형뽑기도 하고, 이것저것 쇼핑도 했었다. 그 과정에서 팬들이 이래저래 몰려들어서 사인도 요청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포옹이나 악수 등도 부탁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아보였고.
“…엉?”
그런데 막상 호기심이 생겨서 확인을 해보니까, 은서와 챌린저 유의 열애설이 터져있었다.
“아….”
탄식을 내뱉은 지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다른 신분이기는 하지만 방학 내 열애설이 두번이나 터질 줄이야.
외모를 점검한 지혁은 해명방송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