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9 이별 =========================================================================
지혁이 한차례 샤워를 하고, 면도도 깔끔히 끝내고 나타나자 이승현은 만족한다는 듯이 그를 위아래로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현관을 나서서 거리를 이동한다. 3주 만의 일이었다. 앞서가는 승현을 따라 걸어가는 지혁은 말이 없었다. 승현도 구태여 그와 이야기를 하려들지 않았다. 꼭 싸운 사람들처럼 묵묵히 걸어가서 인적이 드문 거리를 벗어나 번화가로 나오자 승현은 다짜고짜 보이는 고깃집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언젠가 느꼈었던 후끈한 열기. 그러나 모든 것이 신기하던 그때와는 달랐다. 지혁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앞서가는 승현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알바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잠깐 보였다.
“삼겹살 4인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턱을 괴고있는 지혁을 힐끔거리던 여자 알바생이 물러가고, 승현이 물컵에 물을 따라서 지혁의 앞에 스윽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승현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최소한 엄청 심각한 건 아닌거 같으니까 여동생 님은 무사하신 거 같고…. 혹시 여자한테 차였냐?”
차였다고 해야할지.
지혁은 승현의 말을 듣고서 차현진을 떠올렸다.
그녀는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처음에는 찾아 헤맸지만, 어느 순간 지혁은 그녀를 찾아다니기를 포기했다. 포기하고, 그저 게임만 했다. 그래서 게임만 했다. 그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일수도 있고,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임을 도피처로 선택하고서 게임만 해오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생각나 지혁을 괴롭혔다.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당연히 송하은과의 열애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시기가 적절했기 때문이다. 열애설이 터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번호를 없애고 잠적하는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났었기에. 그러나 지혁은 그것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발빠르게 움직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차현진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혁에게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의 말이면 무엇이든 순종함과 동시에, 언제든 지혁을 떠날 것처럼 붕 떠있는 관계였다. 지혁이 열렬한 구애를 하면 그녀 역시 그에 맞춰서 보답을 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언가 희미한 느낌을 주었다.
가끔 지혁이 데이트 도중 다른 여자들에게 눈길을 주면, 그녀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녀와 지혁 사이에는 자신이 ‘감히’ 질투를 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처럼. 지혁은 그게 아니라고, 자신에겐 너뿐이라고 여러번에 걸쳐 설명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사실 그간 지혁은 그녀와 시간을 보내면서 언제고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운만큼 왠지 모르게 불행한 미래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도 공존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지혁은 그녀를 찾아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꿀꺽꿀꺽.
컵에 담겨있던 물을 시원하게 원샷한 지혁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피폐해져 있던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차현진을 향한 마음이 가볍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녀를 이정도까지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해본 사랑이라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라는 것도 특별히 없었고, 그저 이성인 사람이랑 이렇게 자주 엮이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첫 사랑이라는 게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올바른 사랑, 제대로된 마음을 품기라는 건 쉽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처음엔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혁은 그녀와의 이별을 이해했다. 차현진은 자신이 지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떠났을 것이다. 십중팔구는 그럴 터였다. 지혁은 그간 많이 노력했고, 그녀의 그런 생각을 바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같은 시대에, 차라리 지혁의 정부로 들어오면 들어왔지 그와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녀는 자존감이 굉장히 낮은 여자였다.
“…그렇구나.”
승현의 채근에 결국 지혁은 대강의 사실을 말해주었다.
만나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가 송하은과의 열애설이 터진 순간 잠적해버렸다는 것. 자신과 지혁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것 등이었다.
“그랬구나….”
승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지혁의 눈치를 보았다. 지혁은 미안해졌다. 아무리 병장이라지만 휴가는 달콤한 순간일 것이다. 그런 그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았다.
“…사실은 나도 니가 너무 커져버려서 대하기 힘들어. 휴가 나오기 전에 고민도 많이 했고. 이제 너는…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대해야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사실은.”
“왜 그래. 형까지.”
지혁은 자신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주위의 사람들도 그 사실을 납득하고, 지금까지처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근, 그게 아닌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에서 있지도 않은 신분의 격차같은 것이 체감되곤 했다.
“아니,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친한 형으로 곁에 있는 나도 그런데 일반 여성이 지나칠 정도로 성공해가는 니 곁에 연인으로 있기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기는 할 거 같아. …내가 뭔가 아는 척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걱정마. 기분 안 나빠.”
지혁의 말에 횡설수설하던 승현은 그 말에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어쩌면, 너는 이제 평범한 여자랑은 사귈 수 없을지도 몰라.”
지혁은 그의 말에 동감했다. 지혁은 너무 자기의 입장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만 괜찮은게 아니다. 연애는 남녀가 같이 하는 것. 상대방이 지혁을 부담스러워할수도 있었다.
“그럴지도.”
지혁은 승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혁이 정신을 좀 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승현이 피식 웃었다.
‘…….’
차현진의 마음을 이해한다. 납득한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 역시 아니다. 애당초 그녀는 지혁의 옆에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는 사람이고, 그러한 사상을 타파할 방법을 지혁은 찾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차현진은 지혁에게 순종할 뿐, 그에게 마음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일방적인 관계가 깨어지기 얼마나 쉬운지 지혁은 이번 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괜찮은 척 그녀와의 만남을 유지해오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과 상반되게 그녀는 지혁에게 대단한 감정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지혁이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한 것은 그녀와 같이 보내는 시간동안 그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다. 애써 부정해왔다.
어쩌면 차현진은 상관인 지혁의 권유 때문에 억지로 그와 사귀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의 마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먼저 유혹해온 것도 사실 그녀니까 그렇지야 않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같이 지내다보니까 은근히 별로라고 생각했을수도 있고.
‘나, 너무 추하네.’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다. 그만큼 지혁이 그녀를 좋아했었다는 뜻이리라.
“니 좋다는 여자들이 줄을 섰잖냐. 새로운 사람 찾아보자.”
승현의 말에, 지혁은 피식 웃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누구를 데려다놓든 차현진을 이길 수는 없다.
* * *
8월이 되었다.
승현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고, 지혁은 마음을 가볍게 정리하고 일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무언가를 할때마다 종종 떠오르는 차현진이 지혁을 괴롭혔으나, 익숙해질 때가 있을 것이라 믿고 나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하나의 톱니바퀴가 굴러간 순간, 멈춰있던 모든 바퀴들이 다시 태동하려하고 있었다.
지혁은 이번에 한 번 벌여놓은 일들을 전체적으로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첫 번째로 수필.
20살이 되어 바라보는 세상(유일하게 종이책으로 만들어진 작품). 현재 판매량 250만부.
두 번째로 소설.
후유가(완결). 미니게임천국(3부 연재중). 왕(연재중). 창연화(완결). 건 힐러(완결). 3개의 작품을 완결내었고 2개의 작품을 연재중에 있다. 미니게임천국은 거의 끝이 보이는 상황이며, 왕은 아직 절반정도밖에 연재가 되지 않았다.
미니게임천국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의외로 왕의 결제 비율도 보통이 아니다. 다소 이례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미니게임천국이 작가로써의 예상조차 뒤엎으며 극의 흥행을 해내고 있을 뿐이지, 왕의 성적 역시 상당히 좋았다.
세 번째로 웹툰.
앞서 언급한 다섯 개의 소설 중에서 3가지는 웹툰화되었다. 후유가, 미니게임천국, 건 힐러가 그것이다. 세 가지 다 아이펜에서만 독점적으로 연재를 해나가고 있으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물론 지혁이 그린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만화가 소설보다는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야라서 그런지 결제율도 원작소설보다도 더 높다.
억단위의 수익을 내고 있지만, 지혁은 거기서 절반만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홍창식, 이정욱, 이나은, 이형준은 뜻하지 않게 수십억의 수익을 내고 있는 중. 예전에 한 번 넷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혁에게 계속해서 감사했다. 민망할 정도로.
그것들과는 별개로, 지혁이 그려서 올린 아이펜 최초의 웹툰 생일날의 너에게가 존재한다. 애니메이션을 만화로써 옮겨놓은 느낌에 지나지 않으나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영상만큼의 흥행을 하지는 못했다.
‘흠….’
지혁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네 번째는 드라마.
지혁의 소설들중 드라마로 제작된 것은 창연화 하나뿐이나 최근 ‘왕’을 드라마화하고 싶다는 말을 해오는 곳들이 있었다. 그곳들과 컨택을 해서 조건을 맞춰서 제작을 하게 될 경우 지혁의 작품이 드라마화 되는 경우는 2개가 될 것이다. 연재한 다섯 개의 소설이 전부 2차적으로 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지혁은 애당초 왕을 영상으로 제작하고자 웹툰화시키지 않고 일단 남겨두었던 것이니까, 드라마로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가 결심만 한다면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은 확정적일 테니까.
다섯 번째는 바로 애니메이션.
생일날의 너에게의 판매량은 결국 1억을 돌파했다. 아르핀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 지혁의 분석이지만 어쨌든 대단한 건 대단한 것이다. 뒤늦게 생일날의 너에게를 접한 사람들에게서 화제에 오르게 되면서, 아직까지도 생너를 좋아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르핀.
이미 40억의 결제를 돌파한 대작. 물론 28화를 다 합쳐서 낸 수치이기는 하지만, 화당 결제도 1억 5천만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결제만으로 2조가 넘는 돈을 벌어들이게 해준 효자작품이지만, 수익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완결이 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결제가 쏟아졌던 것이 얼마전의 일. 외전격인 28화가 나오고 3주가량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열기는 아직까지도 뜨거웠다.
‘피규어 작업은 내가 자리를 비워도 알아서 잘 진행한 것 같아 다행이야.’
피규어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생산하는 족족 없애지는 지경. 그리고 지혁의 예상대로 그로 인한 수익이 영상의 판매보다도 월등히 높았다. 이쪽의 수익도 이미 조단위에 이르렀다.
이미 어지간한 재벌조차 건드릴 수 없을 정도의 자산을 쌓은 지혁이지만, 영 실감은 나지 않는다. 딱히 쓸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섯 번째로는 게임이 있었다.
리라 센토는 지금까지 6천만개 정도가 팔려나갔다. 따라서 수익은 6천억.
아랜디는 지금까지 2천5백만개 정도가 팔려나갔다. 따라서 수익은 2천5백억.
둘 다 피시방 점유율을 렐에게 좀 먹혀서 현재는 리라 센토가 40%. 렐이 30%. 아랜디가 10%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한국 기준이다.
‘차기작이 나오면 또 어찌될지 모르지.’
리프는 아직 발매예정에 없다. 조금 묵혀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장일이 개발하고 있는 배틀로얄 장르의 FPS 게임이 있다. 한창 개발을 진행중에 있으니까, 만약 그게 발매된다면 또 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로는 작곡이 있었다.
가수로써의 활동이라고 해야 할지. Gee.H로써 불렀던 곡들과 리플라워에게 넘겨주었던 곡들이 있다. 그리고 지혁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상과, 제작한 게임 리라 센토, 아랜디에 넣어둔 BGM들이 존재한다.
‘많이도 해먹었네.’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일을 진행했다. 실패한 적이 없었고, 건드리기만 하면 대박을 쳤다.
그것은 당연히 신이 내려준 악마의 재능 때문이겠지만, 지혁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이것들 이외에도….”
애니메이션 팀이 진행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작업이나 송하은과의 작업 등 자잘한 부분들이 더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리해보면 일단 이 정도였다.
9월에 개학하게되면 다시 학교생활을 해야하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바빠질 것이다.
지혁은 정리해둔 내용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하나 정도는 더 추가를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