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이별 =========================================================================
신기하게도 혼란스러운 감정은 조금도 없었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굉장히 무덤덤했다.
“…그렇군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가서 쉬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고개를 숙인 유창현이 물러가고, 지혁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일단 알아보자.’
어찌하여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졌는지 경위는 파악해야할 것 같았다. 지혁은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휘적휘적 걸어가서 작업실에 도착했고, 컴퓨터를 켰다. 그의 눈에 핸드폰이 보였고, 충전기에 꽂아서 충전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제껏 세상에 나오지 않고 자신을 꽁꽁 싸매던 조커 유가 송하은의 실수로 인해 자신의 정체가 공개될 상황에서도 오히려 그녀를 배려해주는 언행을 보였다는 것에서 의심을 한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왜 그것이 열애설까지 퍼진 것인지는 지혁도 모르지만, 아마도 무개념 기자 한명이 나서서 방아쇠를 당긴게 아닐까 한다.
대강의 정황을 파악한 뒤에 핸드폰을 키자, 유창현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특히 송하은. 그녀는 무려 15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새벽시간이었음에도 전화를 하면서 초조해했을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니 괜시리 미안해졌다.
- 여보세요?
통화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고, 그녀가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접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다시 사과했다. 지혁은 또 어제의 일을 반복하며 그녀를 만류했다. 열애설이야 부인하면 그만 아닌가. 실제로 사귀고 있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지혁에게는 차현진이라는 매력적인 여자친구가 존재한다.
“네. 강경대응 해주시구요. 저도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식으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후속조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지혁은 송하은과의 통화를 끊고 통화기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자고 있어서 몰랐나.
차현진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지혁은 입술을 삐쭉이고 공기소리를 내며 연락처에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십시오.
“…?”
역시나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로 이동하던 지혁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기계음에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분명 차현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
다시 걸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없는 번호라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설마.
그러나 우연이라기에는, 시기가 너무 맞물린다는 느낌이었다.
지혁은 등줄기가 굳으며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특유의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 * *
[ 레전드 리그 KR서버에 갑자기 나타나 생태계를 파괴중인 의문의 고수들을 정리한 문서 ]
7월, 기존의 프로들도 범접이 불가능할 정도의 미친 괴물이 갑작스럽게 넷이나 등장했다.
하나도 아니고 넷. 사람들은 처음에 챌린저 유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들과 챌린저 유가 같은 게임에 잡히는 경우가 발생했고,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게된 많은 관전자들은 그들이 챌린저 유의 클론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저 밴픽만 한 것이 아니라, 게임이 시작되고 실제로 같은 게임안에서 게임을 진행했다.
혹자는 그들이 챌린저 유가 비밀리에 키운 네 명의 제자라고 주장한다. 자신까지 다섯 명이서 팀을 만들어서 세계대회를 제패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현재 가장 유력한 설로는 2명의 플레이어가 아이디 두 개씩을 활용하고 있다는 이신이신(二神二身)이다. 그 이유는 사신성 중 셋 이상이 동시에 게임을 돌린 일이 등장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론은 여기까지. 아래엔 갑자기 등장한 초신성들의 아이디와 특징을 정리해두었으니 참고 바란다. 순서는 랭크승률이 낮은 유저부터다.
1. Akad.NC
순혈 정글러.
정글이 뺏기면 칼닷지를 시전함. 만약 챌린저 중 누군가가 이 문서를 보고 있다면, 그리고 자신이 윗픽이고 정글러인데 우리 팀에 이 아이디가 존재한다면. Akad.NC go jug만 치면 그 순간 당신의 캐리다.
물론, 지금 시점에 사신성의 특성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챌린저는 거의 없겠지만.
/ 총 전적 295승 68패(승률 81%).
놀랍게도 사신성 중에서 가장 저조한 승률을 가지고 있다(이게?). 7월 28일 오후 3시 35분 기준, 현재랭킹 2위.
2. Belefo.NC
순혈 미드.
Akad.NC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유저. 그와 모든 것이 동일함. 대신 미드를 설 뿐.
/ 총 전적 309승 42패(승률 88% - 이제부터 승률이 괴랄해지기 시작). 7월 28일 오후 3시 35분 기준, 현재랭킹 1위.
3. For Lesid
올 라이너(괴물 중에 괴물).
출시된 레전드 리그의 챔피언 126개를 모두 랭겜에서 사용하였음. 라인을 가리지 않으며 픽을 하는 그 직전까지 무엇을 고를지 예측이 불가능한 유저. 모든 챔피언을 다루는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챔피언 숙련도를 보여줌. 앞서 언급한 둘과는 다르게 라인 양보같은 건 받지 않으며, 이건 사신성의 공통된 특징인데, 일체 채팅을 치지 않음.
추가적으로 얘는 핑조차 안찍음
/ 총 전적 168승 11패(승률 94%) 7월 28일 오후 3시 35분 기준, 현재랭킹 3위.
4. IC.No15310
원딜(신)
정확히 5개의 챔피언만을 사용함. 예전에 앱도가 내세웠던 5마스터 이론에 입거한 느낌이 들 정도의 모습을 선보이는중. 상대팀이 픽창에서 이 플레이어의 존재를 깨닫고 3개를 저격밴하고, 상대 원딜이 1개를 가져가도 남은 1개를 픽해서 경이로운 피지컬로 게임을 터트림. 만약 상대가 3개를 밴하고 조합구성 상관없이 어거지로 원거리 딜러 2개를 가져갈 경우 인식하는 순간 칼닷지를 하는 듯.
/ 총 전적 133승 2패(승률 98.5%) 7월 28일 오후 3시 35분 기준, 현재랭킹 4위.
챌린저 유가 최근 렐의 랭크게임에 관심을 그다지 많이 두지 않아서 사신성과 챌린저 유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난지에 대한 것은 의견이 분분함. 1등을 계속해서 지킬것만 같았던 챌린저 유가 요즘엔 1위자리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리라 센토, 아랜디).
그들이 같은 게임에 잡히는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 않은데, 같은 게임에 잡힌다고 하더라도 Akad.NC와 Belefo.NC가 같이 잡힌 적은 한 번도 없고, For Lesid와 IC.No15310이 같은 게임에 잡힌 적도 단 한 번도 없음. 그 이외에는 넷 중에 둘이 만난 경우는 다양하게 존재.
프로팀에서 그들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기위해 애가 닳아있다는 모양이지만, 말을 걸어서 답장을 받은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는 듯함.
“…….”
지혁은 게임을 돌리며 어딘가의 게시글을 읽어보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신성이라는 유치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의문의 유저들은 전부 지혁이다. 대략 3주. 그는 그 정도의 기간동안 집에 박혀서 렐만 했고, 무려 천판의 게임을 플레이했다. 잠도 줄여가면서 게임에 몰두했고, 사람이 피폐해져 있었다.
물론 지혁이 뛰어난 실력으로 게임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아서 게임 하나에 들어가는 플레이타임이 그리 많지않아서 가능했던 판수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심지어 지혁은 챌린저 최상위권의 랭크게임을 2개 돌리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5명이서 팀을 이루어 대전하는 렐에서, 각 팀에 지혁이 한명씩 존재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10명이 있어야 하는데, 9명이 게임을 하고 있는 상황. 지혁은 그 경우 그저 마우스 컨트롤만으로 게임을 플레이했다. 두 개의 화면을 동시에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챈 사람이 적었다. 당연히 양손으로 하는 것에 비하면 실력이 딸리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러겠거니 생각하고 마는 것 같았다.
우웅….
- 콜렉트콜입니다. 상대방을 확인하세요.
꾹.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를 받자 이제는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고, 지혁은 곧장 통화를 연결했다.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뭐하노? 나 휴가 나왔다.
“…어.”
- 야. 이제는 반갑지도 않나보다? 이제 나도 병장이니까 뭐. 어쨌든 어딘데. 점심이나 먹자.
지혁이 말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지혁이 서울로 이사한 사실을 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근처에 있긴 한 모양이었다.
“난 됐어. 별로 나가고 싶지 않다.”
- …?
지혁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다시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두 개의 계정을 동시에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난다긴다하는 정점에 가까운 플레이들과 같이하는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지혁은 그런 과감한 도전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처음에야 어색하고 고생도 했지만, 이제는 마치 이렇게 제작된 게임인 것처럼 이것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물론 어려운 챔피언은 사용할 수 없다. 최대한 스킬의 사용에 의존이 적은 평타기반의 챔피언을 다뤄야만 한다.
승리와 패배. 지혁은 하나의 게임에서 두 개를 모두 얻었다.
“얌마.”
“……?”
지혁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승현이 서 있었다.
“뭐고. 면도도 안하나? 뭔 폐인이 되있노.”
“어떻게 왔어?”
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게임의 매칭을 시작하고, 동시에 옆에있는 패트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얼마 있지도 않던 물을 완전히 마셔버린 지혁은 패트병을 옆에다 휙 던졌다.
“이 좋은 집을 뭐 이리 해놨노. 난장판이네 아주.”
청소부 아주머니한테 들어오지 말라고 일러두었기 때문에 지혁이 있는 작은 게임방은 말 그대로 돼지우리가 따로 없었다. 정리정돈을 잘 하는 성격인 지혁으로써는 용납을 할 수 없을 만큼 3주간 먹었던 대부분의 결과물이 방안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나가자. 아니, 그 전에 좀 씻자. 대가리도 씻고, 턱에 칼질도 좀 해야되겠다.”
“싫어. 귀찮아.”
지혁은 무기력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고서는, 때마침 잡힌 게임을 수락하기 위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모니터 화면이 팍 꺼졌다.
“까불지말고 나온나. 주 패버리기 전에.”
지혁은 이승현에게 끌려나왔다. 3주만에 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지혁과 승현은 옥신각신하면서 방밖으로 나와 거실에서 투닥거렸다. 지혁이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듯 떼를 쓰면, 승현이 등짝을 찹찹 때리는 형식이었다.
“어… 그, 안이 좀 많이 더럽습니다. 정리를 좀….”
“네, 맡겨두세요.”
그렇게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부탁한 이승현은 지혁을 욕실로 밀어넣었다.
“상판대기 볼만해지게 만들어서 와라.”
승현에 의해 떠밀리듯 욕실로 들어온 지혁은 거울에 비치는 사람을 잠깐 멍하니 쳐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