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95화 (95/116)

00095  송하은  =========================================================================

강의실. 다가오는 기말고사에 맞춰져서 학과의 동기들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필기가 아니라 실기. 혹은 작품을 제출하는 것으로 시험을 대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위해서 자유시간을 할애해가면서까지 열심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강의시간에 빈자리가 꽤 많았다. 당장 내일 하나의 작품을 제출해야하는 상황이라서, 아직 작품이 완성되지 못한 사람들이 수업을 빼먹은 것이다.

오늘 수업의 담당인 신동훈 교수님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수업을 진행하는 기색이었다. 심지어는 출석도 부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기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제를 제출해야하는 작금의 상황은, 내일 수업의 교수님의 사정 때문에 급하게 시일이 앞당겨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수진들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있을 테니까, 빈 자리가 많은 이유를 뻔히 알기 때문에 굳이 짚고 넘어가질 않는 것이다.

후아암.

지혁은 입을 막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지혁은 그 모든 것을 다 끝내두었기 때문에 그들처럼 무언가에 쫓기듯이 생활할 이유가 없었다. 아, 동기들이 게을렀다는 것이 아니다. 딩가딩가 놀고먹다가 벼락치기를 하는 느낌으로 작업을 진행중인 사람은 드물었다. 대개는 이미 완성했지만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을 하거나, 당초부터 기준점을 높게 잡고 빡빡하게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였다. 그러던 와중에 일정조정이 생겨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그 사실을 통보받은 것도 오늘이었다.

애초에 욕심이 없었던 자, 아니면 정말 열심히 노력했던 자들만이 강의에 참석하여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지혁은 펜을 돌리며 강의 도중에 잡생각에 빠져있었다. 신동훈 교수가 지혁의 존재를 알게되고 최근 조커 유의 주가가 끝도 없이 치솟아 오르는 과정에서 그는 지혁이 자신의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 자체를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하는지 열과 성을 다해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책을 잡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뭣하지만, 지혁은 나서서 그의 수업을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개미발톱 밑의 떼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웅….

그러던 중, 갑자기 울린 진동에 지혁은 흠칫했다. 서둘러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잡아가던 지혁은 거기에 떠 있는 이름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남선혁과 손현석이 불가항력으로 수업에 빠져서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다행이었다.

[ 송하은 ]

물론,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교수님 저, 중요한 전화가 와서 잠깐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단언컨대, 지혁은 이제껏 수업을 받으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신동훈의 수업만이 아니라 다른 수업도 전부.

중간고사의 성적은 지혁이 최고였다고 들었다. 게다가 수업에 빠진 적도 한번도 없고, 실력도 좋다는 말이 이래저래 오가는 상황. 그래서 지혁은 알게모르게 교수진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물론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네네. 다녀오세요.”

유일하게 지혁의 정체를 알고있는 신동훈은 지나가다 농담으로 다른 교수들에게 정체를 밝힐뻔 했다고 말하곤 했다. 지혁이 조커 유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중요한 전화라고 하면 평범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직감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그는 말까지 더듬으면서 수락해주었고, 지혁은 강의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사실 엄청 중요한 전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루한 수업을 빠질 계기가 되어줘서 감사하다는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 그러나 송하은은 지혁의 번호를 뜯어(?)간 이후로 단 한 번도 전화를 한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지혁은 그저 안부인사 차원에서 전화를 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순전히 직감이었지만, 분명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전화를 걸었으리라 생각했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작가님.

“네, 안녕하세요.”

송하은의 목소리에 가볍게 답한 지혁은 이왕 나온김에 음료수도 하나 뽑아먹자는 생각에 자판기로 다가갔다. 천원짜리 지폐를 넣고 뭘 먹을지 고민할 때까지, 반대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지혁은 그제야 의문을 느끼고 의아함에 다시 물었다.

“여보세요?”

- 아… 저기, 그러니까 작가님. 제가 지금 예능프로그램 촬영… 녹화중이거든요. 그래서… 그, 선생님이랑 작업했고… 만나뵌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가 말하게 되었는데….

지혁은 별로 상관없었다. 애당초 숨길 필요 없다고 미리 말을 해두기도 했었으니까. 송하은은 그를 굉장히 어려워하는 사람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하고 있었다. 지혁은 그녀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네. 상관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신경쓰지 말라는 듯 개의치 않는다는 어조로 말하자, 그녀는 확실히 안도한 것 같았다.

- 아, 네. 감사합니다. 아, 저… 혹시 잠깐 다른 분좀 바꿔드려도 될까요?

갑자기?

지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안녕하세요. 조커 유 작가님. 여기는 무리한도전의 녹화현장입니다.

“…!”

지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헛기침을 했다.

“큼… 그렇습니까?”

목소리를 변조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방송에 그의 목소리가 나가게될지도 모르니까. 그의 본래 목소리로 말을 계속 해나가면 조커 유와 챌린저 유가 동일인물이라는 결론까지 도달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미 몇 마디 해서 이게 방송에 나간다면 여러모로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하하하!

그때, 수화기 너머로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의 목소리가 갑자기 바뀌니까 웃겼던 모양이다. 혹시나 했는데 이미 촬영중이었나. 지혁은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기호지세였다.

-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저희가 어떻게 하다보니까 작가님 얘기까지 하게 되었어요.

“괜찮습니다.”

- 아, 그럼 혹시… 잠깐 전화통화 괜찮을까요?

“방송에 나가는 건가요?”

- 네 그렇습니다.

지혁은 고민하다가 수락했다.

“네. 괜찮습니다. 잠깐정도면….”

- 어, 정말요? 야 빨리빨리 앉아!

뭔가 분주하게 이것저것 지시도 하고, 후다닥 정비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혁은 그들의 혼란이 잠잠해질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커 유 작가님. 저희가 갑자기 이렇게 사전에 언질도 없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실례가 아닐지 모르겠네요.

“아뇨. 제가 저번에 송하은 씨랑 같이 작업을 할 때 혹시 궁금한 거나 제안할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을 달라고 했었으니까요 뭐… 이렇게 방송출연을 하게될 줄은 몰랐지만요.”

자칫 잘못하면 논란이 생길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다. 송하은도 안심했으리라. 아마 그녀도 여차하면 편집을 해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지혁에게 통화를 건 것일 터였다.

- 어… 저 그럼 작가님. 혹시 인사를 한 번 해주실 수 있나요?

덜커덩.

조금 정신을 차린 지혁은 음료수를 뽑았다. 캔이 떨어지며 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잔돈으로 동전이 짤랑거리며 나오고, 지혁은 허리를 숙여 음료수를 빼내며 말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시청자 여러분. 저는 조커 유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짝짝짝짝!

와!

격한 반응이 쏟아진다. 지혁은 웃으면서 휴게실의 의자에 앉으며 캔을 깠다. 다행히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 어, 안녕하세요. 작가님.

“아, 네. 안녕하세요 유재승님이시죠?”

- 아. 절 아세요? 게다가 목소리만 듣고….

그가 연예대상을 탄 게 몇 번인가. 국민MC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를 모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연히 알죠. 무리한도전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 *&%^$#!

다시 격한 반응이 쏟아져서 지혁이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뗄 때, 유재승이 말했다.

- 아, 그래요? 근데 지금 저희가 마침 무리한도전을 찍고 있거든요.

방금 말했던 부분인데, 아무래도 제대로 촬영을 한다는 컨셉인 것 같다.

“아, 그런가요?”

이 프로그램 파급력이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럼 지혁이 뭔가 말을 할때마다 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바로 무리한도전의 멤버들인 건가?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료수를 한모금 마셨다.

- 네 이번에 저희가 정규적으로 하는 가요제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송하은 씨가 초대된 거에요. 이번에 기사가 크게 났잖아요? 아르핀의 곡 작업에 송하은 씨가 가수로써는 최초로 참가하게 되었다고. 그래가지고, 저희가 너무 궁금해서 직접 여쭤봤는데 조커 유 작가님을 직접 뵀다고 막 그러셔가지고. 그게 이렇게 전화연결까지….

역시나 말이 많은 분이로군. TV에서 볼때랑 별 차이가 없는 그의 모습에 옅게 웃은 지혁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아, 그렇군요.”

- 네. …저 작가님!

“네.”

- 혹시 제가 지금 너무 말이 많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니죠?

“아니, 아닙니다.”

정곡을 찔렸지만 지혁은 아닌 척을 했다. 개그맨 아니랄까봐 입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신가요? 오래 통화가 되시나요?

“아… 강의를 듣던 도중에 잠깐 나와서 통화를 받는거라 엄청 길게는 안되겠네요.”

-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듣기로 지금 21살이시라고… 대학생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유재승은 선을 잘 지켰다.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떤 대학인지 묻지 않았고 유들유들하게 바로 다음 화제로 넘긴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유재승만이 아니었다. 무리한 도전의 멤버들과도 몇 마디씩 나누었다. 거기다가, 그곳에 초대된 현재 잘나가는 대세 가수들도 지혁과의 통화를 원했다. 하나같이 다 정중한 어조여서 지혁은 왠지 좀 부담스러웠다.

- 그렇군요.

그들은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지혁은 적당히 답해줘도 괜찮다 싶은 것은 말해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거의 3분정도 통화를 진행했다. 지혁이 너무 오래 나와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무렵, 유재승이 통화를 슬슬 끝마치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 말씀을 아주 잘하시네요. 역시 작가님이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 언제 저희 프로에 한 번… 출연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냥 던져보는 말일 거였다. 애당초 기대도 안하고 있다는 것이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지혁은 지금까지 조커 유로써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비춘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난처한 듯 대처해야 맞지만, 지혁은 왠지 그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네 뭐… 언제가 되었든 기회가 되면 한 번 출연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네, 당연히… 네? 아, 정말요?!

“예예. 근데 지금은 안되고요. 어… 제가 언젠가 뭍…으로 나가게 되면 그때 한번 꼭 무리한도전에 출연하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격한 반응. 지혁은 웃으면서 다시 음료수를 마셨다.

- 어, 네… 그… 조커 유 작가님. 정말 전화 통화를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다시 송하은 씨 바꿔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 뒤로 지혁은 송하은과 가볍게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통화를 마쳤다.

“…….”

뭔가 폭풍처럼 지나간 기분이었다. 지혁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강의실로 복귀했다.

자리에 앉은 지혁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아르핀 1부도 끝나간다. 리라 센토와 ARD도 흥행에 성공했고. 피규어 작업을 필두로 공책이나 볼펜 등의 학기구로부터 컵이나 접시 등에 이르기까지 아르핀의 캐릭터들은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물론 지혁은 그쪽까지 챙길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열중하고 싶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칭호와 직업을 갖다 붙이지만, 지혁 본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한다면 그는 결국…

‘창작가’일 뿐이다.

그가 만든 예술 작품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 변한다면, 혹은 그 순간만큼은 감성에 젖을 수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족한다.

‘여름만은 좀 놀자.’

그러나 지혁은 지금껏 바쁘게 달려왔다. 이번 여름, 그는 차현진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자기 자신에게 휴식을 선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