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과제 =========================================================================
“아, 오셨어요.”
순간적으로 시선이 쏠린다. 지혁은 가볍게 흘리며 슬그머니 남선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희안하게도 중간자리를 고집하는 특이한 성향이 있었다. 무조건 구석진 자리가 최고로 좋은 지혁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색이었다.
“뭐해?”
“오늘 아르핀 나오잖아요. 이전화 복습하고 있었죠.”
무슨 학교공부도 아니고 복습은 개뿔. 솔직히 손현석은 굉장히 착실한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허나 남선혁은 약간 뺀질대는 편이었다. 그간 공부만 해왔을 게 뻔한 학창시절을 대학생활로써 보상받으려는 느낌도 조금 있는 것 같고. 그는 강의에 집중하거나, 강의의 내용을 되새기는 일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혁이 슬쩍 보니까 확실히 아르핀이었다. 지혁은 가방을 벗어서 책상위에 올려둔 뒤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손현석이 오고, 남선혁이 보고있는 아르핀에 흥미를 보였다.
남선혁이 말했다.
“우리 아렌은 대체 언제 강해질까?”
“제단처럼 되려면 백년은 멀은 듯.”
지혁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시킨채로 남선혁과 손현석의 말을 엿들었다. 이것은 비단 둘만의 화제는 결코 아니었다.
아르핀의 인기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최근, 주인공인 아렌의 인성과 실력적인 부분으로 논쟁이 끊이질 않다고 들었다.
적어도 1기에서의 아렌은 완전히 쭉정이 수준이다.
사실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소년에 불과한데다가, 그저 복수심에 불타서 무작정 길을 떠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배우지도 못했고, 아르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핀’ 이라는 이름의 기운도 다스리지 못한다. 당연히 그는 굉장히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말인즉, 1기는 그저 아렌이 동쪽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투씬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여행을 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그것을 통해 일종의 힐링하는 느낌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에서 아르핀을 시청하고 있고, 작품은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며, 앞으로 많은 일이 있을 거라는 암시를 주는 것.
아렌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은 2기부터다. 1기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신세와 상황을 깨닫는 에피소드가 주어지게 되고, 그는 그를 통해 ‘저항군’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된다. 2기의 초반, 동쪽에 편향되어있는 권력의 집중을 타파하고자 만들어진 약자들의 단체 저항군에서 힘을 기른 주인공은 몇 년의 시간이 지나서 강해진 상태로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1기는 일종의 프롤로그 느낌을 주는, 전초전(前哨戰)에 불과한 것이다.
‘아렌맘’이라고 불리우는, 주인공 아렌을 두둔하는 팬덤에 가까운 타입의 남선혁과 초반부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제단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푹 빠져서 그 뒤로 감감무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제단을 칭송하는 ‘제단빠’에 가까운 손현석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종래에는 언성을 높여가면서 내가 맞네, 니가 맞네 다투기 시작한 것이었다.
둘의 싸움은 지혁이 짜증을 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보기드문 지혁의 화가 난 모습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깨갱하는 모습이었다.
지혁은 그제서야 그와 관련된 기사를 차분하게 확인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조커 유, 그의 한계는 어디인가? ]
지혁의 인지도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어딘가의 유명 평론가가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를 두고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름대로 그건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고 아는데, 지혁은 그러한 전설적인 인물과도 비견될 정도로 한국인으로써 전무후무한 인지도를 가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서구권 쪽에서 동양의 문화가 이렇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드물다 못해 거의 없었다는 식인 모양.
지혁이야 그냥 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관심도 가져주는 구나하고 생각하고 말았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지혁이 직접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소설이나 자막을 사용한 것이 그들을 놀랍게 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다채로운 표현들은 조커 유라는 이름의 값어치를 높이는데 한몫을 당당히 했다는 듯하다.
그것은 지혁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언어라는게, 각자의 색이라는게 존재한다고 본다. 한글로만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정서라는 것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지혁은 다양한 언어를 활용하자는 결심을 하고부터 각 언어의 특색을 파악하고, 표현의 폭넓음과 날카로움, 자연스러움을 확고히 확립하고자 부던히 애를 써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처럼 지혁의 작품을 보는 수많은 독자들은 그것을 확실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지혁은 개인적으로 한 사람이 자신이 평소 사용하는 언어로 소설을 잘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칭송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지혁은 단순히 한글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언어를 습득한 것도 모자라 그것을 통해 문학작품을 만들어내고, 그 질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니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간에서는 이미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천재가 탄생했다는 식의 말이 오갈 정도라는 것 같다.
“하이. 일찍왔네?”
강은솔이 창가쪽, 지혁의 앞쪽 자리에 앉으면서 밝게 말했다. 그녀를 따라 두 여인도 합류했다.
오늘은 다름아닌 그들이 만든 첫 번째 영상의 상영회가 있는 날이었다. 축제가 끝난 다음주, 중간고사 기간에 하기로 되어있었고 그게 오늘이었다.
‘작품의 제한시간은 10분.’
지혁의 조가 만든 작품은 정확히 6분 35초였다. 풀 타임에 맞추지는 않았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무조건 길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제는 프리. 기말고사때는 주어진 상황이나 조건에 맞게 영상을 만들어내야 하지만, 중간고사때는 자신들이 원하는 뜻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영상을 빨리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무거나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다.’
지혁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관여했다고는 하나, 아무리 봐도 미숙하다. 솔직히 지혁이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면 졸작이라며 단번에 폐기처분을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제작자로써 이제 막 걸어가기 시작하는 새내기에 불과하다. 완성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시청했던 지혁은 결과물에 나름대로 만족했다. 어디까지나 학교의 과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좋으면 좋았지 뒤떨어지는 퀄리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와….’
첫 영상이 등장하고, 지혁은 속으로 탄식했다. 다른 조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막상 영상을 보게되니까 말이 안나왔다.
열심히 놀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영상은 너무나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영상 길이조차 5분이 채 안되는 3분 41초였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그냥 모든 부분에서 지혁의 조와는 비교자체가 안되었다. 그들은 ‘기본’ 조차도 제대로 지키질 못하고 있었다.
“…….”
그 증거로, 담당 교수님 역시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지혁은 거기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건 그저 지혁의 추측일 뿐이지만 1학년의 첫 학기이고, 일정이 느슨했던 것도 아니니까 대단한 기대는 없었으리라.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 사실을 인지한 상태로 보아도 형편없는 작품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지혁은 그 자신의 창작물에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애착을 가지는 만큼, 타인의 작품도 존중하는 편이었다. 허나 이건… ‘형편없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음 조.”
영상이 끝나자마자,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2조를 호명했다. 1조의 조원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나태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닌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기는 좀 괜찮네.’
그러나 역시 수준미달인 건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며 애들 장난도 안되는 느낌이었다. 조잡하다고 해야할지, 시대착오적이라고 해야할지. 지금으로부터 족히 20년은 전에나 있었을법한 간결하고도 부족한 작품이었다. 물론, 1조에 비하면 정상적인 영상이었지만 말이다.
“잘 봤어요. 훌륭합니다.”
근데, 교수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지혁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그와 교수의 기준치가 현저히 다른 것인지, 아니면 그냥 립서비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까지 머금고 칭찬을 늘어놓는 교수의 태도에 지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조에 비한다면야 2조는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혁의 조와 비교하면 많은 격차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음 3조.”
그리고 세 번째 조의 영상을 보게된 순간, 지혁은 아차 싶었다.
2조의 영상이 담당교수가 생각한 작품들의 평균치, 혹은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3조 역시 2조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교수는 작품을 보며 연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저건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힘을 너무 줘 버렸다.’
지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3조의 영상이 끝났다. 교수는 2조때만큼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어도, 나름대로 호평을 내세우며 감상평을 마쳤다.
지혁의 조는 4조. 어어 하는 사이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지혁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의 작품이 퀄이 떨어지길 바랬다. 1조와 합쳐져서 평균이 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랄까. 그러나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제작한 영상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
가장 큰 차이는 당연히 ‘작화’에 있을 것이다.
지혁이라는 성능좋은 원화가를 보유한 지혁의 조는 좋은 그림을 뽑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지혁은 그리는 속도도 굉장히 빠르지 않은가.
사운드는 말할 것도 없고 bgm도 어딘가에서 갖다 쓴 것이다. 연출이 뛰어나지도, 스토리가 빼어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그려진 그림 하나가 모든 것을 커버하고 있었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영상이라고 해야할까. 지혁은 그것뿐이기 때문에 실패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다른 조에 비해 지혁은 최소한 ‘그림체’하나 만큼은 제대로 잡고 들어간 셈이었다.
“와…!”
벚꽃나무 아래, 벚꽃잎이 예술과도 같이 흩날리는 장면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좋아해…!”
대학생이 된 여주인공은 오티의 자리에서 남주에게 반하게 된다. 그 뒤로 대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다양한 과정(시간이 많이 할애된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부분적인 장면들이 여러번 나오는 정도로 설명이 되었다)을 통해서 점점 마음이 깊어지던 그녀는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다잡고 첫사랑의 대상인 남자주인공에게 고백을 했다.
4월. 벚꽃나무가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시기. 그녀의 고백을 끝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열린 결말.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지혁이 연출, 스토리적인 부분으로 마음에 쏙 들었던 점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그림만 그렸지, 그 이외의 부분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가볍게 한 마디씩 툭툭 던져주는 정도였을 뿐.
지혁은 긴장한 기색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