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축제 =========================================================================
“그냥 여기 있는거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야?”
“네. 아직 메뉴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그냥 자신 있으신 걸로 하면 그걸로 괜찮습니다.”
과대의 말에 지혁은 있는 식재료를 눈으로 쭉 스캔했다. 그는 펜을 들고 종이에 있는 재료로 가능한 메뉴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15개정도를 적은 그는 종이를 과대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지혁은 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만 일하는데, 만약 그의 요리가 이래저래 입소문을 탄다면 지혁이 축제기간동안 계속 이곳에 틀어박혀야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과대가 고르는 메뉴를 주된 것으로 삼고, 나머지는 그냥 해놓고 퍼서 주기만 하면 되는 간편메뉴로만 구성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여야만 한다.
“이 중에서 골라봐.”
“어… 이걸 다 할 줄 아세요?”
지혁은 놀란듯한 과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씻고 있었다. 요리를 해왔던 그의 본능이 재료를 손질하라 외치는 중이었다. 그는 손을 씻으면서도 식재료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였다.
“그럼… 계란볶음밥이랑 닭볶음탕 해주세요.”
“오케이. 좀 도와줘.”
남선혁은 지혁의 시선을 받고는 알겠다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혁은 그에게 감자껍질부터 벗겨달라고 했다.
그 사이 지혁은 닭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볶음밥은 금방 끝내지만 닭볶음탕은 볶음밥에 비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먼저 이쪽부터 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막내는 과정에서 살로 파고든 닭뼈 쪼가리를 손질하고, 내장도 긁어냈다.
그 다음 한쪽에 자리한 도마와 식칼을 쳐다본 지혁은 봉지채 있는 청양고추를 뜯어서 식칼을 잡고 고추를 썰기 시작했다.
탕탕탕탕탕.
엄청난 스피드로 칼질을 해서 바로 고추를 잘게 썰어낸 지혁의 모습에 과대와 여자애들이 입을 벌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혁은 씻은 대파도 리듬을 타며 순식간에 썰어내고선 남선혁이 건넨 감자를 받아서 먹기좋게 잘라냈다. 버섯과 당근도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급하게 만드는 거니까 일단 생략.
‘이쪽은 다 되었고….’
그렇게 양념까지 잘 해서 닭볶음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단계에 이르자 지혁은 미리 손현석에게 지시해두었던 사항들을 확인했다.
당근과 새우, 강낭콩, 양파 등등 없는 재료가 많으나 없어도 없는대로 할 수 있다. 지혁은 달군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뒤 계란을 볶고, 곧장 밥을 넣어서 국자로 열심히 부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가 후라이팬을 열심히 돌려가며 숙련된 스킬로 볶음밥을 볶아내기 시작하자, 남선혁이 입을 떡 벌렸다.
“자, 완성. 먹어봐.”
지혁은 볶음밥을 접시에 담아내고, 닭볶음탕도 그릇에 부어서 냈다. 과대는 지혁을 슬쩍 올려다보더니, 조용히 플라스틱 수저로 볶음밥을 한 입 떠먹어보았다.
“우와 맛있다.”
그의 솔직한 반응에 씨익 웃은 지혁은 확인이 끝났다는 생각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메었다. 그 사이 여자애들도 지혁이 만든 요리를 맛보고선 감탄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닭볶음탕도 예술인데요?”
“근데 재료가 부족한 것들이 있는데 그런 건 내 임의로 살 수 없어? 그냥 있는 것만으로 해야 되는 거야?”
“아뇨 괜찮을 거에요. 제가 선배님들한테 말씀드려볼게요.”
“언제 오면 돼?”
“어… 재료 준비하는게 오래 걸릴까요?”
지혁은 잠깐 멈칫했다가 말했다.
“마트에서 장보고 하는 시간 감안해서 생각해보면… 1시간 정도?”
“그럼 3시까지 C동에서 모이는 걸로 하면 되겠는데요.”
“오케이.”
지혁은 그렇게 정리를 끝내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여자애들이랑도 어영부영 헤어지고 셋이서 걷던 와중 남선혁이 물어왔다.
“형. 요리를 뭐 그렇게 잘하세요?”
“그냥. 집에서 많이 해먹으니까 실력이 붙은 거지.”
파카가강!
‘…!?’
남선혁의 말에 대꾸하며 이동하던 지혁은, 문뜩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려와서 고개를 돌렸다.
소극장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익숙한 영상이 틀어지고 있었다.
아르핀 12화였다.
[ 네 쟤가 맘모루 ]
[ 얘가 페케도에요 ]
니디아의 소개에 주인공 아렌이 눈을 반짝인다.
하얀 피부의 다람쥐가 있었다. 등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칼을 비스듬이 차고, 두툼한 앞니와 살이 통통한 앞발로 찹찹찹 도토리를 마음껏 음미하는 중이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꼬리가 천천히 살랑인다. 녀석은 곧이어 아렌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도토리를 휙 집어던졌다.
곧이어 타고있는 휠체어를 끌어서 한쪽에 걸어두었던 자신의 기타같이 생겨보이는 악기를 들어 올리더니 디링디링 연주를 한다. 연주 솜씨는 형편없다.
녀석의 이름은 페케도.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이쪽에는 관심도 없는 듯 옆모습을 보인 채로 보석과 금화를 쥐고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짙은 갈색의 원숭이가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녀석은 껄렁껄렁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녀석이 바로 맘모루였다.
[ 근데 페케도는 왜 다리가 없어요? ]
[ 페케도는 말도 못해요. 대신 맘모루가 휠체어를 끌어주고, 말도 대신 해주죠. ]
그 순간, 원숭이 맘모루가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 뀌에엑! ]
[ 말을 할 줄 알아요? ]
[ 지금 돈 줬다고 기분이 좋아서 재롱부리는 거에요. ]
그러면서 니디아가 슬쩍 은화 하나를 더 쥐어주자, 맘모루가 곧장 말했다.
[ 큼. 험. 내가 돈을 바라고 이러는 건 아니란 말이야. ]
“아하하… 진짜 완전 웃겨.”
지나가다 멈춰서서 아르핀을 보게된 지혁은 남선혁이 옆에서 포복절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맘모루와 페케도. 보기에는 그저 새로운 마스코트 정도로 인식될 수 있으나, 둘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결말까지 연계되는 핵심 중에서도 핵심. 심지어 이 둘은 개개인으로 따져도 현재까지 등장한 인물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패왕도 뛰어넘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들이다.
물론 캐릭터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인기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맘모루는 좀 능청맞은 캐릭터다. 페케도는 말을 하지 않을 뿐 은근히 악질. 장난도 많이 치고 아무 일도 아닌 척 사람을 물 먹이기를 좋아한다.
‘…….’
지혁의 작품을 저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튼다고 해도 전혀 문제는 없다. 그 사실을 아이펜 홈페이지는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자기가 돈주고 구입만 했다면, 그것을 어떤 방도로 사용하든 지혁은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적당히 놀다가 3시가 다 되어갈때쯤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여자애들과 함께 장도 보고, 재료손질도 다 하니 때맞춰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요리 한 번 해볼래?”
“아, 네.”
지혁은 학과장이라는 사람의 요청에 따라서 요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원하는 재료를 다 모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더 완벽한 요리를 해낼 수 있었다.
지혁의 요리를 맛본 그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너 요리 진짜 잘한다. 그럼 일주일만 고생해라.”
…?
지혁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이번주에 여는 주점에서 내내 요리나 하고 있으라는 뜻은 아니겠지?
“우리 대박나겠다 아주. 진짜 개쩔어.”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고, 이미 그렇게 확정을 지은듯한 분위기였다. 시작하기 전에 밥이나 먹고 오라는 듯한 어조였었기에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혁은 입을 열었다.
“한 주 내내 계속 요리를 하라는 말인가요?”
“그래. 걱정마. 일당은 충분히 챙겨줄게.”
지혁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학과장이라는 사람은 설마 1학년이 자신의 말을 거부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하는 모양이었다. 인상이 그렇게 나빠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는 꽤 권위적인 타입인 모양이었다.
“아뇨 저… 매일 못 오는데요.”
“왜? 알바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지혁이 그의 말을 부정하자 학과장이 지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 저번에도 주점을 했었는데 완전 말아먹었거든. 학과를 위해 니가 좀 희생해라. 돈도 많이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잠깐 단기알바하는 셈 치면 되잖아.”
지혁이 화요일과 금요일에 일정이 있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방식은 잘못되었다.
하다못해 사전에 미리 얘기라도 했으면 생각은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치 학과를 위해 지혁이 희생하는 것 자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혁은 이런 더러운 기분으로는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작년에 사정이 어땠건 그건 지혁이 알바가 아니었다.
“…….”
그때, 지혁의 눈에 그를 쳐다보고 있는 동기들이 보였다. 그들은 지혁과 학과장의 갈등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약속이 있어서 그건 안될 거 같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지레 겁먹어서 물러나거나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납득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의 지혁은 굳이 상대방의 폭거에 대항하지 않고 접어줄 이유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지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인 ‘시간’을 허튼 일에 소모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다른 동기들도 다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남은 4일동안 주점에서 요리나 하고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뭐? 야. …따라와봐.”
오라니 가봐야지.
지혁은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지혁이 따라오는지 확인하려는 듯 뒤를 살짝 돌아보았던 걷고있던 지혁과 눈을 마주치자 넌 죽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누가 죽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렇게 되면….’
굳이 지도교수 신동훈을 찾아가서 그의 정체를 밝힌 것이 안전장치로 작용하는 셈이니 다행이다. 물론 그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