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축제 =========================================================================
“안녕하세요.”
“아… 네.”
한예리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현승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자팬들이 죽어나간다는 인기남이었지만, 그녀의 반응은 미적지근을 넘어 냉랭하기까지 했다.
“계속 비를 맞아서… 힘들죠?”
“괜찮아요.”
“아. 그, 그래요? 제가 커피라도 한 잔 사오려고 하는데 드실래요?”
“괜찮아요.”
한예리가 단호하게 끊어 말해서 대화의 여지를 아예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들유들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영화촬영의 현장. 신이 빗속에서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한예리는 계속해서 비를 맞아가면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계속된 NG속에서 그녀도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초저녁에 불과하고, 그녀는 이제 연기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랐다.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 큐!
“그래서?”
“니가 내 입장을 조금만 이해….”
언제나처럼 철벽을 치던 한예리는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그녀의 연기력은 물이 올랐고, 연륜이 있는 배우들조차 단 한 번의 오차없이 완벽한 연기를 해내는 그녀의 모습에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한예리는 연기력 논란이 있었던 아이돌 출신의, 흥행이 보장될뿐인 배우에 불과했던 그녀를 지금의 수준까지 끌어올려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촬영을 계속해나갔다.
우웅-
촬영간에 주어지는 잠깐의 쉬는 시간. 매니저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아서 확인을 하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화면이 전환되며 진동이 울리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은 배우로써 촬영에 임할때를 제외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만 고수하던 그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격한 감정변화에 옆에서 그녀를 힐끔거리던 이현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정도.
그러나 한예리는 그를 신경쓰지 않고서 누가 보지도 않는데 젖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겼다. 곧이어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던 그녀가 슬며시 전화를 받았다.
“큼. 흠. …여보세요?”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현승은 자신을 대할때와는 상반되는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추측컨대 어쩌면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한예리에게 연기지도를 해준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연기실력이 일취월장한 한예리를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 사실은 이현승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완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연배우로써 같이 촬영에 임하면서도 놀라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깊이부터가 달라진 것이다. 대중이 창연화부터 시작된 그녀의 놀라운 연기력을 볼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닥치는대로 작품을 하면서 연기자로써 왕성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넵. 넵. 네 들어가세요.”
이현승은 연예계에서 소문날대로 소문난 철벽녀 한예리가 누군가에게 저렇게 살갑게 대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통화를 끊는 그녀를 힐끔거렸다. 단순히 쩔쩔매는 수준이 아니라 아양을 떠는 착각마저 들 정도.
전화를 끊은 한예리는 홀릴 것 같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배시시 웃은 뒤 핸드폰을 매니저에게 건넸다. 방금 전까지 저기압이다 못해 우울하게까지 보였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폭우속의 촬영이 계속해서 지연되자 은근히 한예리의 눈치를 보던 감독도 갑자기 그녀가 기분이 좋아보이자 더욱더 힘을 내서 촬영을 진행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늘치 촬영이 끝나자, 그녀는 활기차게 인사하고선 곧장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쩝.’
파고들어갈 여지는 조금도 없어보인다. 입맛을 다시던 이현승은 그의 매니저가 몰고온 밴에 탑승했다. 그 역시 유명배우. 빡빡한 일정에 시달릴 정도로 바쁜 몸이었다.
* * *
‘…성대하게 하네.’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었기에 경험하진 못했지만, 듣기로 고등학교의 축제는 거의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수준이라던데, 확실히 대학교의 축제라는 건 느낌부터가 다른 것 같다. 지혁은 극악하게도 중간고사 기간 전에 잡힌 축제기간에 학교에 오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감상을 하고 있었다.
월요일,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평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와. 저 사람봐. 존나 잘생겼다.”
“연예인 아냐?”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며 학교에 들어선 지혁은 강의실에 도착해서 남선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형. 오셨어요?”
“응.”
간단히 대답하면서 가방에서 내용물을 꺼내는데, 갑자기 남선혁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 그 소식 들었어요?”
“무슨 소식.”
“이번에 저희 축제에 오는 초대가수들 그냥 대박이라던데요.”
“…….”
지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선혁은 흥분해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떠들어대었다.
“리플라워에 한예리까지 온데요. 역시 한국대라 그런지 축제의 스케일도 다른 것 같아요.”
“잘 됐네.”
그들이 오는 것은 지혁때문이지만, 지혁은 모른척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저….”
“음?”
지혁은 얼굴이 익숙한, 동기라고 추정되는 두 여자애가 그의 앞에 우물쭈물하면서 서있자 뜬금없는 상황에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뒤 그들을 올려다보며 의문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 중 한명이 양손으로 핸드폰을 슥 내밀었다.
“번호좀 주시면 안될까요?!”
“아… 그래.”
지혁은 떠름하게 답하고선 핸드폰을 받아서 그의 번호를 눌러주었다. 지혁에게 제안을 한 여자동기는 ‘해냈다!’라고 말하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애한테도 마찬가지로 핸드폰을 받아서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들은 감사하다며 90도인사를 하곤 멀어져갔고, 잠깐 그들을 쳐다보던 지혁은 다시 턱을 괴고 그의 핸드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 ‘쟤들도 받았는데 우리한테도 주겠지’ 라는 느낌인 건지 이제껏 지혁과 접점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던 애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지혁의 폰번호를 뜯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교수님이 올때까지 그들에게 번호를 찍어주는 헤프닝을 겪고 나서야 지혁은 겨우 그들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형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남선혁이 옆에서 그렇게 말해오자, 지혁은 헛소리하지 말고 집중하라면서 그를 타박했다. 지혁은 강의가 시작되자 정면을 쳐다보았는데, 막 수업을 시작하려던 교수와 그의 눈이 딱 맞았다.
지혁과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보며 미약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손현석.”
출석도중에 손현석의 이름이 불리자 지혁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지도교수 신동훈이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더듬거리며 물어왔다.
“아… 무슨… 일인가요?”
“현석이 오늘 병원갔다 온다고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거 너무 티나는데. 지혁이 그런 생각을 했지만, 동기들은 그다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혁은 안도하면서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혁의 정체를 알기 때문인 걸까. 신동훈의 수업은 굉장히 뻣뻣한 느낌이었다. 이전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다소 경직된 태도에 강의를 들으러 온 동기들도 이상함을 느끼는지 미간을 찌푸리거나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었다. 지혁은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그 모습에 한숨이 나왔지만, 차차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수업을 들었다.
“아 그리고… 오늘 김태석 교수님이 출장 때문에 오시지 못하니까, 여러분은 축제를 마음껏 즐기길 바랍니다.”
“와!”
월요일에 있는 수업은 두 개. 방금 하나 끝났고, 하나는 교수님이 부재중이라서 수업을 안한다고 한다. 그 소리에 신입생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지혁 역시 기분이 좋았으므로 은근하게 웃음을 지었을 정도니 그들이 느끼는 환희는 얼마나 클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신동훈은 그렇게 강의를 끝내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형. 축제 가실거죠?”
수업 도중에 들어온 손현석이 와서 물었다. 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선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메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과대가 단상에 올라가서 말했다.
“잠깐만 주목해줘. 우리 오늘 저녁에 학과 주점일 해야하는데 축제기간동안 한 번씩은 꼭 해야 하거든. 서빙이나 요리 같은거. 오늘 할 사람있어?”
정적.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와중에 지혁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화요일에 리플라워가, 금요일에 한예리가 온다고 했었던가?’
축제일정을 살펴본 것은 아니고, 당사자들에게 들은 것이니 맞을 터였다. 지혁 때문만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그녀들이 굳이 한국대 축제에 초대가수로 오는 것은 지혁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의 무대를 봐줄 필요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지혁은 그냥 첫날에 빠르게 찝찝한 것을 끝내놓고 쭉 노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지혁은 옆을 쳐다보았다.
“오늘 하자.”
“예? 어….”
“첫 날 후딱 해치우고 쭉 노는게 낫지 않겠냐?”
지혁의 말에 설득된 것인지 손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했다. 과제도 그렇고, 무엇이든 일단 해놓고 마음 편하게 노는 성향은 지혁이나 그들 둘이나 비슷비슷했다.
예상대로 남선혁도 동의하자 지혁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나랑 이렇게 둘. 셋이 지원할게.”
“어… 어? 그러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나 오늘 할게.”
“나도!”
그리고 뒤이어서 지원한 여자애들덕분에, 10명은 금방 채워졌다. 지혁은 그의 일행이 지원하자마자 7명의 여자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손을 든 것에서 왠지 찜찜함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 일할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가도 돼.”
과대의 말에 썰물처럼 애들이 강의실을 비워나갔다. 몇 명 남지 않은 공간. 과대가 단상에서 내려와 곳곳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앞에 섰다.
“혹시 이 중에서 요리 잘하는 사람 있어?”
당연히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 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손을 들었다. 이왕 요리를 해야한다면 잘하는 그가 하는게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어. 형님 요리 할 줄 아세요? 혹시 뭐뭐 하실 수 있으세요?”
“응. 어… 그냥 어지간한건 다 할 줄 아는데.”
“어. 그럼 혹시 지금 주점으로 가서 확인을 좀 해도 될까요?”
뭘 또 검증까지 한담.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지혁의 수락에 과대가 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너희들은 갔다가 나중에 4시까지 C동으로 와.”
그러자 여자애 한명이 받았다.
“우리도 그냥 같이 갈게. 나중에 일해야 되잖아.”
“그럴래? 그럼 더 좋지. 근데 가기 싫어하는 애도 있을거 아냐. 가기 싫으면 손 들어줄래?”
이번에도 손을 드는애는 없었다. 과대는 순간 살짝 당황한 것 같았지만, 좋은게 좋은 것인 듯 그럼 가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대학교 주점일이나 하려고 요리실력을 갈고 닦았던 것은 아니지만….’
룸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요리로 해결했던 지혁은 말 그대로 ‘어지간한 건 다 할 줄 아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주점의 메뉴가 무엇이든 맛있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