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리라 센토(lyra Cento) =========================================================================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수고하셨습니다!”
지서윤의 말에 팀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고사를 준비하며 열심히 만들었다. 사실 아직 혼자서 만드는 것에 비하면 고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업이었으나, 지혁은 엄청난 보람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지혁은 역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만의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 남들이 감상할 수 있는 그들의 시간을 잠깐 빌릴 수 있는 작품. 그것을 통해 지혁은 성취감이라는 것을 얻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학교에 가면 많이들 논다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팀원들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던 지혁은 짝짝 박수를 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회식하자. 내가 쏜다.”
“진짜?”
“오빠 최고!”
여자 팀원들의 열렬한 반응과 함께 회식을 무사히 마치고난 다음날. 애니메이션 영상의 상영회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건 그저 중간점검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만큼 진행이 되었느냐를 확인해보는 일이라고 해야하나. 다른 조들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것에 비해서 지혁의 조는 이미 완성에 가깝게 작품을 만들어낸 상태였다.
“와… 여기는 잘 만들었는데? 이제 2주차인데 작업 속도가 뭐 이렇게 빨라?”
지혁 팀의 영상을 본 담당교수의 극찬. 팀원들은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듯이 서로를 보며 히죽 웃는 모습이었다.
‘빨리 만들어보고 싶다.’
지혁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최근들어 이런저런 것들에 손을 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허나 그 어떤 것도 이 정도의 감정을 가지게 해주지는 못했다. 결국 지혁은 예술가의 혼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진우 팀장이 지혁이 던져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놀리고 있으니, 새로이 만들고 있는 작품은 없다고 봐도 된다.
‘하나 만들어봐?’
게임의 제작도 끝났고 무료하던 찰나였는데, 지혁은 창작욕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수고하셨어요.”
“뭐할 거에요? 술 한 잔 하시죠?”
남선혁의 말에 지혁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손현석이 먼저 말했다.
“나 어제 작업하느라 아르핀 못봤어.”
“아 참. 나도.”
오늘은 아르핀 12화가 나오는 날. 이미 아르핀의 독주는 진행중이었다. 살아생전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에 관심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도 빠져들어가고 있을 정도로 아르핀에 대한 평가는 엄청났다. 물론 발매하고나서 언제든 결제를 통해 볼 수 있다지만, 나오자마자 바로 보고싶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죽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이 이번 일을 계기로 활성화될 것이라며 관심을 모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판국이었다. 기자들은 시대에 남을 명작의 탄생을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영광이라는 등 부산을 떨었다. 아르핀의 녹음에 참여한 성우들은 하나같이 예능 프로그램 등에 섭외가 되며 전성기, 제 2의 전성기 등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절반도 오지 않았음에도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종주국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닌 일본에서도 판권을 사들여서 자국에서 방영하고 싶다는 식의 제안이 수도없이 들어오는 중이다. 일본 성우들은 ‘자기들도 녹음 잘 할 수 있는데’라는 식의 표정으로 SNS에 조커 유가 한국인인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사에는 한국사람들이 지혁을 탐내는 일본의 모습에 국뽕을 느낀다느니 댓글을 달고 있었다.
[ 1위 : 핫도그 ]
그리고, 한때는 아르핀 3화에 등장한 한국식 핫도그가 너무 맛있어 보였는데 온종일 검색어 순위에 핫도그가 등재되어 있는 모습으로써 지혁의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외국에서도 저 핫도그는 뭐냐는 식의 말이 나왔었던 것 같다.
단언컨대 지금은 아르핀의 시대였다.
“나는 오늘은 안되겠다. 갑자기 일정이 생겼어. 내일 놀자.”
확실하게 일을 해놓고 놀자는 취지에서 조원들끼리 모여서 바짝 작업을 했다. 때문에 지혁의 조가 진도가 빠른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알게 모르게 지혁의 존재가 작업속도에 가속화를 붙였겠지만.
“내일 되는거 맞죠?”
“그래. 간다.”
둘과 이별을 고한 지혁은 곧장 회사로 이동했다.
일이 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임유선을 비롯한 여섯명의 성우가 지혁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지, 스튜디오 들어서자마자 벌떡 일어나며 일시에 인사를 해왔다. 저도 모르게 그 기합소리에 압도된 지혁은 주춤하며 대답한 후에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표정이 변한 지혁은 오늘 해야할 추가녹음에 대해서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저번의 녹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작품에 분량을 추가했기 때문에 그에 관련해서 추가적인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과 일정을 조율해서 오늘 녹음을 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임유선이나 다른 어린 성우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이 지긋한 노년의 성우분들조차 지혁에게 깍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좀 부담이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니. 좀 더 차분한 느낌으로 부탁드릴게요. 이피드라의 성향이 그러하니까.”
“좋았는데, 다시 한 번만 해볼게요.”
지혁은 살짝이라도 마음에 안들면 타협하지 않았다. 방금 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기 때문인지 그의 감각은 평소보다도 더 날카로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임유선씨는 잠깐 남아주십시오.”
“네?! 네, 네.”
뭘 그렇게 놀래. 지혁은 화들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높은 어조로 되묻는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가, 스튜디오를 대강 정리했다.
지혁은 바짝 긴장한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임유선에게 다가갔다.
“오늘로 진짜 녹음이 끝났거든요. 간단한 뒤풀이 회식 정도는 하는게 좋을 거 같아서, 혹시 대표로 성우분들 일정을 좀 조율해주실 수 있을까요? 날짜는 언제여도 상관없습니다.”
“아~! 네. 제가 한 번 괜찮은 날 잡아보겠습니다. 저희들 톡방이 있거든요.”
“그런게 있나요? 그럼 부탁합니다.”
“저….”
지혁이 감사인사를 할 때, 임유선이 슬며시 운을 떼었다.
지혁이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이 쳐다보자, 그녀는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제가 요즘 방송이나 라디오에 출연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네.”
“아, 저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다른 성우분들은… 그… 약간정도는 말을 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지혁 역시 성우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조커 유 선생님이 잘생겼다느니 섹시하다느니 떠들어대는 것을 기사로나마 단편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언제고 정체가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예정된 일이 일어났을 뿐인 것이니까.
“괜찮습니다. 임유선 씨도 저를 팔아먹으셔도 괜찮아요.”
“네? 정말요?”
“네. 마음껏 쓰십시오.”
아마 임유선도 지혁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그에 대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성우들이 있어서 왠지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그럼 괜찮은 거군요.”
“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하고 싶은 얘기 있으시면 마음껏 하십시오. 임유선 씨는 다른 성우분들에 비해서 저랑 지낸 시간도 기니까, 스토리도 많겠죠?”
지혁은 걷어 올렸던 셔츠의 소매를 내리고 손을 들어 올려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의자에 걸어두었던 블랙 슈트 상의를 걸쳐 입는데 임유선이 그런 지혁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아, 저… 저희 부모님이 선생님 사인을 받아와줄 수 있냐고 하는데, 혹시 가능할까요?”
“아. 물론이죠.”
지혁은 임유선이 건넨 종이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간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성우들이 지혁에게 조심스럽게 사인을 요청해왔었는데, 임유선은 예전에 해준 적이 있어서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 근데 그녀의 부모님도 지혁의 작품을 보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기 딸이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는데 부모님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지혁은 임유선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교수님들에게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가는 이후에 후폭풍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점테러를 당한다던지 하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지혁은 유명 성우들이 떼거지로 모인 회식자리에서 지혁의 부탁을 받고 지도교수님을 모셔온 이진우 팀장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누군지 모르시는군.’
나이 지긋한 지도교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지혁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지혁의 얼굴을 익히지 못하신 것 같았다. 사실, 직접 뵌 건 몇 번 안되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솔직히 수석입학을 했었던지라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인상은 쥐뿔도 없었던 모양이다.
테이블을 돌면서 성우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지혁은 마침내 아이펜의 애니메이션 2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 저는….”
“안녕하세요 교수님.”
지도교수 신동훈은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것도 잠시, 그를 모셔온 이진우가 자신에 대한 소개를 했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한 것인지 표정을 푸는 기색이었다.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말씀 낮추셔도 됩니다.”
“어… 사회에서는 나이가 전부가 아니죠. 초면에 조커 유 선생님쯤 되시는 분께 함부로 말을 놓기가 조금….”
“네 물론 그렇습니다만…. 저도 학과 학생이니까요.”
지혁의 말에 그는 잠깐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저 이번에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수석으로 들어왔는데,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네요.”
신동훈이 지혁의 말에 잠깐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이진우와 지혁을 번갈아 쳐다보는 기색이었다. 지혁이 이진우에게 듣기로, 그는 신동훈 교수과 꽤 친한 편이라고 한다.
“그럼…?”
“네. 교수님한테까지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지혁입니다.”
“교수님 그렇다고 진짜 저 대하듯 하시면 안됩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저는 깍듯이 모시고 있거든요.”
신동훈은 그제야 이런 자리에 자신을 초대한 이유가 그것 때문인 것을 알아차린 듯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본의 아니게 서프라이즈를 하게된 셈이라 지혁은 가볍게 웃었고, 이진우 역시 본래 신동훈이랑 친해서인지 곧장 장난을 치는 모습이었다.
“그럼…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지혁이 웃으면서 말하자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는 것 같더니,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사인 한 장만 해줄 수 있나?”
이번에는 지혁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곧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