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리라 센토(lyra Cento) =========================================================================
[ 3월 4일 PC방 게임 순위 ]
[ 1위 레전드 리그 28.52% ]
[ 2위 리라 센토 28.38% ]
[ 3위 기습공격 11.05% ]
…
[ 레전드 리그, 1015일 연속 1위 유지 ]
늦은 저녁. 차현진을 만나기 위해 회사를 찾은 지혁이 그녀의 업무가 끝나기까지 잠깐 컴퓨터로 PC방의 점유율을 확인하고 있을 때 문이 덜컥 열리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진우 팀장이었다.
“아, 팀장님.”
“선생님.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까 특별강의 시간때 눈이 맞았던 것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지혁은 슬며시 웃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저도 놀랐습니다.”
“저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앉아계신 것을 보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눈을 의심했습니다.”
말투와 표정에서 이진우가 그때 느꼈던 감정이 얼마나 컸는지가 전해져 온다. 그는 평소에 차분한 편인데.
지혁은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한 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진짜 놀랐어요.”
“저희 학교 학과생이셨습니까?”
“네. 이번에 입학했습니다 선배님.”
지혁이 툭 장난을 쳤으나 이진우는 장난처럼 여길 수가 없는 듯 했다.
“아닙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지혁을 만류하는 그를 보면서 지혁은 농담이었다고 말했다. 뭔 말을 못하게 한다. 반응이 너무 격렬해서 순간적으로 찔끔했을 정도였다.
“그, 그런 무서운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
안도한 모습을 보이는 이진우를 보며 지혁은 그가 새가슴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진우 팀장이 물어왔다.
“정체는 언제 밝히실 생각이십니까?”
지혁도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다할 계기가 없다면, 당분간은 숨길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지혁은 여러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는데, 신기하게도 그들 중 누구도 지혁의 정체를 까발리(?)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좀 봐서요.”
지혁은 그렇게 이진우 팀장이랑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이어 그는 돌아갔고, 지혁은 다시 책상에 앉아서 화면에 집중했다.
3일. 월요일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리라 센토는 3일만에 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렐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본다면 렐이 망하는 일이라는 건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솔직히 지혁도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점유율 차이는 고작해야 0.14%. 사실상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9900원의 가격을 지불하고 리라 센토를 구매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전혀 장애물로 작용을 못하는 것 같았다. 렐은 무료인데도 이런 기세라면 판도가 바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재밌긴 했지.’
아까 남선혁, 손현석과 팀을 이루어서 리라 센토를 플레이할 때 지혁은 정말 재미있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다. 주객이 전도될까봐 캐릭터당 보유한 특성은 단 하나로 제한을 했는데, 그것이 적절한 안배처럼 느껴질 정도로 밸런스가 잘 맞았다.
“어쨌든….”
리라 센토가 스타트를 아주 잘 끊어주었다.
* * *
“너무 재밌더라.”
“진짜. 빨리 다음주 목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슬며시 뒷문으로 강의실에 들어선 지혁은 들리는 대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동기들의 화제는 당연히 오늘 공개되었던 아르핀 11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혁의 ‘애니메이션 영상’은 다양한 언어자막을 서비스하기 때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생일날의 너에게가 대히트를 쳤던 일본과 중국, 미국 등은 애당초 아르핀이 공개되기 전부터 지혁이 부탁한 것도 아닌데 이미 곳곳에서 화제로 삼고 있었을 정도다.
“우리가 그런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까?”
“여기있는 사람 전원이 달라붙어서 맨날 밤을 새도 최소 5년은 걸리지 않을까?”
역시 애니메이션 학과답게 단순히 평가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그러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토론도 뜨겁다.
지혁이 앉아서 핸드폰으로 관련된 기사를 검색해보고 있는데, 옆자리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형. 어제 아르핀 11화 보셨어요?”
“어.”
“진짜 대박이지 않아요? 저 보면서 울었다니까요.”
뭐, 지혁 또한 판매실적을 통해서 아르핀의 흥행성적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2억이라니.’
오늘 일어나자마자 확인을 해본 결과 현재까지 아르핀의 결제 회수는 2억에 달했다. 아르핀은 생일날의 너에게와는 다르게 회당 가격이 500원이니 현재까지 벌어들인 순 수익은 천억 원 정도인 셈이다.
어떤 곳에서는 이미 캐릭터 인기투표도 진행하고 있고, 거기서는 제단이 압도적으로 높은 표를 받으며 1위를 찍고있다는 모양이다.
허나 유감이지만 제단은 1화 이후로 당분간 출연하지 않는다. 스토리상의 마지막화인 27화 바로 전인 26화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점차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의 인기도 사그라들 것이라고 본다.
국내에서 어떻게 말하든, 해외에서 어떻게 관심을 표하든 기사에서 기자들이 어떻게 떠들어대든 지혁이 전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혁은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검색을 하면서 정보를 모으던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12화는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될까?”
지혁이 딴짓을 하는 사이 손현석과 남선혁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려왔다.
굉장히 슬픈 에피소드였던 11화가 끝나고, 12화부터는 새로운 전개가 시작된다. 중요한 캐릭터인 맘모루와 페케도가 나타하게 되고, 1기의 악역들 중에서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로페네라는 여성 캐릭터도 등장한다.
물론, 그 사실을 말해줄 수는 없다.
지혁은 입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으며 교수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그리고 이어진 강의에서 아르핀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그것을 그대로 모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지혁은 자기가 그린 작품을 자기가 본뜬다는 사실 자체가 민망했지만, 최대한 티가 안나도록 모작을 하며 수업을 받았다.
대강 수업을 끝냈었던 저번주와는 다르게, 이번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월요일에는 빡빡한 수업시간에 미묘하게 피로함을 느꼈었는데, 그것도 며칠 겪다보니까 적응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리고 리라 센토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전. 저번주 목요일에 오픈 4일차로써 부동의 1위를 고수하던 렐을 제치고 왕좌를 찬탈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는 꺾이지 않고 도리어 상승하여, 현재는 점유율 40%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렐 또한 20%이상의 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으니, 둘이서 절반 이상을 양분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 급한일 끝나신 거에요 그럼?”
“어. 신나게 놀자.”
며칠간 차현진과 데이트하느라 수업이 끝나면 회사로 출근하기 바빴기 때문에 남선혁과 손현석이 내심 서운함을 내비추고 있었다.
물론 놀 시간은 없었다. 애니메이션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만 하는 상황. 아직 시일은 많이 남았으나, 중간점검은 벌써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최소한의 성과를 내야한다는 뜻이었다. 바로 다다음주, 축제기간을 보내면 그 다음주가 중간고사 기간이다. 그 주 화요일에 현재까지 진행된 만큼 상영회가 열리게 된다. 제대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다음주 정도라는 뜻이었다.
“근데 저희 일해야 돼요.”
“아….”
남선혁의 말에 손현석이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말했듯 애니메이션 제작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최근 손현석은 리라 센토에 푹 빠져서 하루가 멀다하고 지혁과 남선혁을 PC방으로 끌고가려 들었다.
‘나는 재밌는데.’
축 처진 모습을 보이는 둘과는 다르게 지혁은 달뜬 마음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
지혁에게 있어서 이번 협작은 독특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모든 것을 그가 혼자서 만들어야만 했던 그의 애니메이션 영상과는 다르게 이것은 여덟 명이서 합심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트를 분담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으로 밀려올뿐더러 자신이 건드린 일부가 건드리지 않은 대부분을 만나 전체가 된다는 것이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혁이 만든 작품에 비하면야 부족한 부분은 많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혁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담당한다는 것은 늘상 혼자 모든 것을 도맡아했어야만 했던 지혁의 입장으로써는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머리로 알고는 있었으나 겪어보는 것은 또 느낌이 달랐다. 그 느낌을 계속 겪어보고 싶어 그는 구태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한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방관하는 느낌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작정하고 나서면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닐 것 같아서였다.
‘이것도 나름대로 기대가 되는데.’
그들의 조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어떤 모습일지, 사뭇 기대가 된다.
“왜 사람들이 조별과제, 조별과제 하는지 잘 알겠네요.”
손현석의 말에 지혁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협동해서 다같이 하면 빨리 끝날 일인데 스케쥴 조율도 쉽지않고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다행히 참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없는데, 여러모로 삐걱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혁은 그러한 과정조차 즐기는 중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남선혁과 손현석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우웅-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선생님.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 지혁이 받자, 너머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은 정신이 팔려있는 둘을 힐끗 쳐다보고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네. 한예리 씨.”
- 혹시… 그 저번에 한국대학교에 입학하신다던거, 사실인가요?
“네. 맞습니다.”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할 때, 한예리가 말했다.
- 어, 그러면… 이번 축제때 제가 초대가수로 가볼까 하는데. 괜찮겠죠?
“…예?”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