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학교생활 =========================================================================
“…고맙습니다 형.”
“정신이 좀 드냐? 어제 너 옮기느라 죽는줄 알았다.”
“네. 이제 좀 괜찮아요. 그것도 있는데… 어제 분명 제가 토를 해놨거든요.”
“…내가 치웠다.”
지혁이 표정을 굳히며 말하자 남선혁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가 형이랑 다시는 1:1로 술 안마십니다. 아직도 죽겠어요 형.”
엄살을 피우는 것 치고는 꽤 말짱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지혁은 그가 맡아둔 자리에 앉으면서 아까 강의의 내용에 대해서 알려주기 시작했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크로키를 해야 한다는 말에는 남선혁도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엄청 까다롭다고 볼 수는 없었다. 30장이라고 해봤자 실력이 조금만 있다면 1~2시간 정도면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문제는 첫 주부터 과제를 내버린 악독한 교수가 있다는 점이겠지.
“…그래서, 지금 바로 조를 짜주시면 되겠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짝을 짓는 것이 좋겠죠? 최소 다섯에서 많게는 열명까지 조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자, 움직이세요.”
이번 수업은 한 학기 동안 2개의 단편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학기 내내 같은 조원으로써 활동할 사람들을 모집하라는 안경 쓴 중년 교수의 말에 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된게 하나같이 만만한 것이 없다. 1학년부터 이 지경이면 대체 고학년이 되었을 경우엔 얼마나 빡센 수업이 진행된다는 말인가? 한 학기에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형. 아는 사람 있어요?”
“없어.”
“너는?”
“없어.”
남선혁의 물음에 지혁과 손현석이 차례로 부정했다. 그러자 남선혁이 중얼거렸다.
“조졌네….”
지혁이 있는 이상 셋이서 만들어도 충분하겠지만 최소인원이 다섯이라니까 문제다. 그때, 지혁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물들이 지혁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녕. 혹시 조원 모집하고 있지 않아?”
“…어, 세 명?”
강은솔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뒤를 따라온 여인들이 은근히 지혁의 눈치를 본다. 지혁은 그제야 그녀들이 지혁이 그림에 감탄하면서도 미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방금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과목은 이번에 신설되었고, 필수전공으로 채택되어버렸기 때문에 2학년이 된 그녀들은 부랴부랴 이 수업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지혁의 그림솜씨와 그가 수석이라는 점 때문에 지혁과 같은 조가 되고 싶었기에 탐색을 하러 왔던 모양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이걸로 조원은 확보된 셈이다. 지혁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저… 저희도 낄 수 있을까요?”
지혁이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여성 둘이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조 없어요?”
“네….”
근데 왜 내 허락을 받듯이 말하는 거지. 지혁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남선혁과 손현석은 물론이고 강은솔 패거리까지도 지혁의 의사에 따르겠다는 듯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네, 뭐…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지혁의 허가가 떨어지자 그녀들이 기뻐한다.
그렇게 남자 셋, 여자 다섯으로 구성된 8인조가 결성되었다. 조별로 자리를 재편성한 뒤에 조장을 뽑고(지혁이 되었다), 조이름을 짜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업은 종료.
“목요일부터는 본격적인 수업을 하겠습니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조별로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해야할 일이 많을 거에요. 목요일날 허둥대지 않으려면 오늘 기본적은 틀은 잡고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첫 주차가 꿀이구나.
수업마다 다 빨리 끝나니까 시간이 널널하다. 하지만 바로 강의실을 나갈 수는 없었다.
“일단 단톡방부터 파죠.”
남선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들의 번호를 신나게 따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조원들로 구성된 톡방을 만들어냈고, 지혁은 그가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아직 여자가 어렵다.
“파트를 좀 나눠야 될 거 같은데, 각자 하고 싶은 쪽이 있으신가요?”
조원들은 다소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저 그림만 잘 그린다고 애니메이션이 뚝딱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제작과정에는 여러 가지 절차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들은 지혁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율을 해 나갔고, 지혁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원화를 담당하게 되었다. 지혁은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다 하려고 하지 말자.’
그래서는 의미가 없다. 물론 지혁의 손을 탄다면야 뛰어난 작품이 탄생하겠지만, 이들의 실력은 전혀 늘지 않을 것이다. 지혁 역시 좋은 성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딱 1인분만큼만 할 생각이었다.
“근데 오빠가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요?”
지서윤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물었다. 손현석과 강은솔 등이 원화는 무조건 지혁이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아버리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직접 보는게 빠를 거 같은데.”
손현석이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아까 남겨두었다고 생각되는 A4지를 한 장 꺼내서는 지혁의 앞으로 스윽 내밀었다. 지혁은 ‘뭐. 어쩌라고.’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거나 그려주세요.”
결국 지혁은 펜을 잡고 손을 빠르게 놀렸다. 약간의 복수심을 담아서 손현석을 그려낸 것이다. 심지어 연필도 아닌 볼펜으로 작업을 하였으나, 불과 20초 정도만에 누가봐도 손현석이라고 생각할만한 그림이 탄생해버렸다.
“…우와.”
“커허….”
남선혁이나 여인들은 물론이고, 아까 지혁의 그림솜씨를 보았던 손현석도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봐도봐도 신기한 모양이다.
“…속도도 엄청 빠르네.”
“아까 크로키 30장을 5분 만에 하시던데요.”
강은솔이 작게 중얼거리자 손현석이 마치 자기의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뻗대었다. 지혁은 민망함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그림을 그린 종이를 손현석에게 건넸다. 손현석은 조심스럽게 받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A+은 따논 당상이네.”
지혁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서 조별과제는 악명이 그렇게 높다던데. 막상 해보니까 단합도 잘되는 것 같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웅-
그때, 지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만 나 전화좀.”
“네.”
지혁은 곧장 차현진과 통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애정행각으로 시작하여, 끝은 업무보고였다. 그렇게 통화를 끝내니 그의 옆에 남선혁과 손현석이 서 있었다.
“누구에요 형? 여친?”
“…어.”
지혁이 긍정하자, 그들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형 정도 되면 없는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시끄럽다. 회의는?”
“회의랄 것도 있나요. 이미 다 갔습니다. 저희도 놀러 가시죠!”
지혁의 손을 잡아끄는 그의 손을 슬며시 빼냈다. 어제 그렇게 놀았으니까 오늘은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안되겠네.”
“아,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이 치트 키로써 작용한 것일까. 질척댈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남선혁은 꽤 담백한 모습을 보이며 순순히 물러났다. 그것은 손현석도 마찬가지. 덕분에 지혁은 빠르게 그들과 헤어질 수 있었다.
헤어지자마자 유창현에게 연락을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빠져나와 조금 떨어진 부분까지 이동하자 그가 마중을 나왔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차현진을 발견한 순간 지혁은 반색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리게 한 뒤에 서둘러 뒷좌석에 나란히 탑승했다.
운전을 시작한 유창현의 눈치를 보는 차현진의 심정이 어떻든, 지혁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혁이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이진우 팀장이 올라와 있습니다.”
“어? 그래요?”
지혁은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진우는 애니메이터들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저번 성우 오디션 이래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긴 채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모종의 성과를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몇 달의 시간동안 지혁이 지적했던 사항들을 얼마나 잘 개선했을지가 관건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 차현진이 이렇게 급하게 그를 찾아올 리가 없는데 역시나 그에 상응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지혁이 수업이 끝났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유창현에게 연락해서 호출을 받았는지를 확인해본 것 같았다.
“바로 회사로 가죠.”
“알겠습니다.”
유창현이 기민하게 대답하고선 차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차현진에게서 간단한 보고를 받으며 이동하여 회사에 도착한 지혁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자 신입사원처럼 바짝 긴장하고 있던 이진우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지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예 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허나 작품에 있어서는 타협이 없는 지혁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그의 긴장감이 사라지지는 않는 듯 했다. 10월쯤에 있었던 첫 회의에서 지혁은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게 그들을 쏘아붙였었던 것이다. 그건 성우들의 일례로 그저 당근만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보였던 모습이었다.
여하튼 지혁의 입장에서는 나쁠게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어디 볼까요?”
지혁의 말에 이진우가 곧장 영상을 틀어보았다.
영상은 10분짜리였다. 지혁은 일단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영상에 집중해나갔다.
‘확실히 나아졌네.’
지혁은 생일날의 너에게 역시 성우들의 목소리가 입혀지기 전에도 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소리 없이 영상의 질만 평가하는 것도 충분히 잘해낼 자신이 있었다.
이전에 형편없었던 것에 비하면, 이번에는 봐줄만은 했다. 물론 아직 지혁의 기준에는 못미치지만 그래도 확실히 노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좋아요. 좋은데….”
지혁은 곧장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진우는 경직된 자세를 하고서는 지혁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에 부산에 내려가게 됐을 때, 팀장급들 다 모아놓고 얘기를 해보죠. 개선은 되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제 평입니다. 보니까 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신 것 같은데요?”
이진우는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지혁이 생각보다 유하게 반응해주어서 기쁜 것 같았다. 꼭 혼날줄 알고 교무실로 불려간 학생이 선생님이 예상외로 타이르듯 말하자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이쪽은 아직 멀었나.’
그러나 지금 당장 그들에게 성과를 다그칠 생각은 없다. 하고 있는 일이 하도 많으니까. 지혁이 바라는 것은 그저 거시적인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