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학교생활 =========================================================================
“으….”
어젯밤 참 많이도 마셨다. 완전히 뻗어버렸던 남선혁을 데리고 어떻게어떻게 인근의 모텔까지 왔던 건 기억이 난다. 지혁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어나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기절한 듯 자고 있는 남선혁이 보였다.
‘씨팔….’
다행히 침대에 토를 해놓진 않았다. 지혁은 바닥에 있는 남선혁이 널어놓은 것 같은 오물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방치해두고 싶지만 치우기는 해야될 것 같아서 지혁은 휴지로 남선혁의 토사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지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만행을 삭제시키는 동안 남선혁은 쥐죽은 듯이 기절해 있었다. 방을 치우고서 그런 그를 보며 인상을 구기던 지혁은 냉장고의 물을 꺼내 마신 뒤에 욕실에서 샤워를 시작했다.
당연히 지혁이 샤워를 마치고 학교갈 준비를 끝낸 상태에서도 남선혁은 그 자세 그대로 실신해있을 뿐이었다. 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남선혁을 흔들어서 깨우기 시작했다.
“야. 학교 가야지.”
“으… 형. 저 못가요. 혼자… 가세요.”
그런 것 같다. 그래도 혹시 안 깨웠다고 원망할까봐 확실히한 것이었다. 애당초 기대도 안했던 것이었기에 지혁은 미련없이 몸을 일으키며 가방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남선혁을 인근의 모텔에 던져두고 온 지혁은 늦기전에 무사히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옷가게에 들러서 새옷으로 바꿔입는 여유도 부렸다. 물론, 기존의 옷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던 가방안에 잘 개서 넣어두었다.
‘이게 대학생의 생활인 걸까?’
보통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일까.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턱을 괴었다.
“…식으로 진행이 될겁니다. 중간고사 이전에 모작과 크로키로 과제가 각각 하나씩. 중간고사를 보고나서는 또 다시 만화 구성, 그러니까 칸 만화와 관련된 과제가 둘. 그리고 기말고사는 아직 정확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앞선 다섯 개만큼 힘든 작업이 될 겁니다. 작년을 예로 든다면 그때는 단편 만화의 제작이었습니다.”
엄청 빡세다. 지혁의 입장에서도 당황할만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기말고사에 대해서 단단히 경고하는 언행으로 보아,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는 ‘애니메이션 제작’ 등의 미친 요구사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만화가 까다롭다한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경우 헬 게이트가 열렸다고 봐도 될 터.
‘…뭐, 괜찮겠지.’
설령 애니메이션 제작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만들면 그만이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하루면 과제물로 제출할만한 퀄리티로 영상을 제작해낼 자신이 있었다. 지혁의 하루로 안 되는 요구조건이라면, 아마 다른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일 것이다.
“이상입니다. 질문 있습니까? …없군요. 그럼 바로 다음 주에 해와야할 과제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심지어 다음주에 바로 과제 하나를 내라고 한다. 얼이 빠지는 건 지혁만이 아닌지 학생들 전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다음주 이 시간에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과제물을 이곳 책상 옆에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수업이 시작되고 제출하는 것은 무효입니다. 지각도 마찬가지고요. 이번주 목요일에는 수업을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아, 그리고 지금 자리에 없는 3명한테 누가 대표로 전달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상입니다. 다음주에 봅시다.”
자기 할 말만 끝낸 30~40대 정도 되보이는 여자교수님은 그렇게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미쳤네 진짜.”
그 순간 학생들이 이게 뭐냐는 듯 다음주까지 어떻게 크로키를 30장이나 하냐는 둥 난리도 아니었다. 지혁도 그 사이에 끼고싶은 입장인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상황이 나았다. 크로키 정도야 하나 하는데 10초면 된다. 사실 지혁으로써는 큰 부담은 아니었다. 10분도 걸리지 않을 거니까.
‘그래도 수업은 금방 끝내주네.’
그리고 목요일에 있을 수업도 안한다는 것은 지혁의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다. 솔직히 누가 9시에 수업을 들으러 오고 싶겠는가.
“형.”
“음. 손신자씨가 아니신가?”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혁은 남선혁과의 이야기를 손현석에게 해주었다. 어제 둘을 버리고 가버린 그에 대한 괴씸함의 의미로 지혁과 남선혁은 배신자와 손현석을 합쳐서 손신자라고 그를 부르기로 했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아니, 그건 제가 할 소리죠 형. 저 튄게 아니라 다른 방에 잠깐 불려갔었던 건데 그 사이에 둘 다 없어져놓고 뭔 소리에요.”
엥?
“아, 그런 거였어?”
“네. 다시 방으로 돌아가니까 오히려 두 사람이 없어서 제가 당황했습니다. 심지어 형 없어졌다고 분위기도 곱창 나있고. 배신당한건 오히려 저죠.”
지혁이 없다고 분위기가 곱… 아니, 좋지 않았다고?
‘…….’
하긴, 여자들만 있었던 방이니까 아예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솔직히 그가 갔다고 해서 분위기가 싸늘했다는 건 손현석이 살짝 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그렇게 오해를 푼 손현석이 지혁을 보며 물었다.
“근데 남선혁은요?”
“어제 그렇게 몰래 튀고서 우리둘이 술 한 잔 했거든.”
지혁이 손현석의 눈치를 보며 말하자 아니나 다를까 손현석이 분개했다.
“아니 자기들끼리만 마시고.”
“미안. 니가 먼저 집에 간줄 알았다고. 어쨌든 그래서 둘이서 술을 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셔가지고 남선혁은 지금 근처 모텔에 뻗어있다.”
“그런 것 치곤 형은 멀쩡해 보이네요.”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룸으로 갔을 때 지혁은 가벼운 느낌으로 술을 즐겨 마셨다. 때문에 그는 상당히 술이 쌔져있는 상태였다. 작정하고 마신다면 술을 항아리채로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술이 좀 쌘 편이라. 아, 그럼 내가 남선혁한테 강의내용 전달해 주겠다고 말하고 와야겠다.”
지혁은 아까 교수님의 제안을 덥썩 수락했던 남자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그… 남선혁한테는 내가 전달해줄 수 있는데요.”
“아, 그래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형님.”
“아… 다음부터는 그럴게.”
지혁이 한 살 많다는 것은 자기소개시간을 통해서 이미 다 퍼졌다. 동기중에서 지혁과 동갑은 두 명 뿐이고, 그들은 전부 여자애들이었기 때문에 남자애들은 다 스무 살인 셈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지혁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손현석과 대화를 나누었다.
“근데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으면 돈도 많이 깨졌겠네요.”
“내가 내기로 했었어.”
지혁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손현석은 자기도 사달라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혁은 그냥 미안하기도 하니까 오늘 점심 사주겠다고 했고, 그는 감사하다며 알랑거렸다.
“그럼 그동안 뭐할까요?”
“과제나 하는게 어때?”
지혁의 제안에 손현석은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도 한국대생이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지혁은 그와 함께 A4용지를 구매해서 근처의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스스스스스슥. 스슥. 슥. 스스슥.
스스스슥. 스스슥. 스슥. 스슥.
“…와.”
멍하니 지혁이 그리는 것을 보고있던 손현석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혁과 그림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지혁의 당구실력을 보았을 때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전공분야다보니까 느끼는 경외감 등이 더 큰 모양이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만에 벌써 다섯 번째의 종이에 그려내고 있는 지혁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트린다.
“뭐해? 빨리하고 놀자.”
“아… 네.”
속도도 속도지만, 지혁의 크로키는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기계가 달라붙어서 기존의 그림을 복사해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그의 손은 신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일필휘지(一筆揮之)의 기세로 그림을 완성해내었다. 그렇게 차 한잔 마실 짧은 시간에 30개의 그림을 다 그려낸 지혁은 그림을 그려낸 A4용지를 한데모아 탁탁 치고서 파일철에 잘 넣었다.
그와 반대로 손현석은 여분의 A4지까지 사용해가면서 시행착오를 겪어나가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A4용지를 좀 넉넉하게 구매했기에 다행이었다.
‘차라리 연습장이 나았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지혁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생각보단….’
잘 그린다. 솔직히 지혁은 좀 놀랐다. 손현석의 그림 실력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지혁은 옆에서 그의 그림을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개선점을 파악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형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리세요? 저는 1분도 부족한 거 같은데.”
“많이 해보면 돼. 음료수 마실래?”
“아… 넵. 저는 그냥 커피요.”
지혁은 이온음료와 커피 하나를 자판기에서 뽑은 후 커피를 그에게 건네고서 캔을 땄다.
“아니지. 봐봐.”
지혁은 손현석이 그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그의 연필을 빼앗아들었다. 곧이어 지혁은 그가 망쳤다고 생각해서 미뤄둔 그림의 한쪽 구석에 손현석이 그리고 있는 그림과 똑같이 그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이게, 똑같은 숫자의 선이 있어도 강약에 따라 깊이가 달라져.”
지혁은 결국 그에게 강의를 시작했다. 손현석은 지혁의 그림실력을 직접 봤기 때문인지, 그의 설명에 집중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기술이나 노하우 등을 전수해주기 시작하다보니 시간은 훌쩍 흘러,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사실 그냥 손현석이 알아서 하게 놔뒀더라면 오히려 시간이 더 적게 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혁의 속성강의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좀 애매한데요. 그냥 학식 먹는게 나을 거 같은데.”
그렇게 지혁은 손현석과 학식을 빠르게 먹어치우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아슬아슬하게 정각에 맞출 수 있었는데, 다행히 아직 교수님은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유난히 큰 강의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빈자리를 찾던 지혁은 뒷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남선혁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