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학교생활 =========================================================================
만화애니메이션학과라고 해서 그림 실력이 특출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심지어는 경우에 따라 한 학기를 마치는 동안 그림과는 전혀 관련없는 수업을 하기도 한다. 지혁이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한국시장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들도 아니라고 본다.
소설 시장만 해도 그렇다. 종이출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출판계가 버젓이 살아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상당수의 지분을 웹소설계에 넘겨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그것은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한 여파이기도 하나 애당초 장르소설을 돈주고 사읽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전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지혁 본인은 그에 구애받을만한 기성작가가 아니므로 그와 관련된 제반사항들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장르소설이 책으로 출판되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그때 당시에 이름난 스타작가들의 수입도 대단히 높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다. 만약 지혁이 웹소설 시장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종이출판계 쪽으로 가닥을 잡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수익을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상 해오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한국의 문화시장에서 출판만화, 애니메이션 등은 거의 인지도가 없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오는 대부분이 일본만화를 번역한 것이고, 애니메이션의 경우도 일본만화를 수입해와서 쓴다고 봐도 된다.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경과야 어찌되었든, 이런 실정에서 애니메이션 학과가 그림 실력을 무조건적으로 우선시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조사를 해보기도 전에 지혁은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실제로 사실이기도 했다.
지혁이 한국대학교의 만화 애니메이션 학과가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는데, 한국대학교의 이름값 때문인지 입시에는 단순히 실기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성적이 밑바탕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혁의 수능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원서를 넣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도 어디까지나 최근에 이어진 변화가 영향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바로 지혁의 존재. 정확히는 ‘조커 유’의 존재 때문에 시장에 대한 인식이 지난 1년간 크게 변모해버렸다는 것에 있었다.
한국대의 만애과(만화애니메이션과)가 추구하는 방향성은 애니메이터의 육성이 아니라 만화가, 혹은 게임 캐릭터의 디자이너 등 ‘만화’, ‘게임’에 그 뜻이 몰려있다고 봐도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만화애니메이션(만화만 추구), 게임애니메이션(게임만 추구) 중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대학교들도 많다고 했다(정확히는 그런 방향으로 커리큘럼이 굳어져있는 느낌). 하지만 최소한 한국대는 그 두 개를 동시에 쥐고 놓치 않으려는 양립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본래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 ‘생일날의 너에게’이라는 것의 존재가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한국대는 새로이 교육과정을 재편성하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로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이펜이라는 미증유의 거력을 가진 플랫폼에 학생들을 꽂아넣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유추해보자면, ‘한국대생이 들어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아이펜에 소속될 수 없을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생일날의 너에게가 한창 핫하던 시절, 지혁은 메일을 뒤지던 도중에 한국대학교 측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온 공문을 본 적도 있었다. 지혁에게 강의를 해달라는 일종의 요청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보며 내가 성공하기는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한국대라는 이름값은 적지 않았다. 사실 그 메일은 지혁이 한국대행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입장에서 대학교 생활이 지식의 보고와도 같은 역할로써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기에, 그저 한국에서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한국대에서의 생활이 가장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과의 인연이 지혁에게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혁은 그의 세상에서 편협한 사고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찝찝함을 느꼈으므로 대학생활을 해보기로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은 그냥 일생에 한 번 경험해볼 수 있는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그럼 아이펜에 들어간 분들은 전부 선배님들인 거에요?”
“전부는 아닌데 뽑힌 애니메이터들 중에서 한국대 출신 선배님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 같더라. 거의 동문회 수준이 되어버렸대.”
지혁이 아이펜의 애니메이션 부서에 관련된 직원들을 뽑는 기준은 그리 대단할 것이 없었다. 그림이든 연출이든 캐릭터 디자인이든 한 분야에 특출나게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우선적으로 뽑았다. 전문성을 봤다고 해도 좋다. 지혁은 넓고 얕게 아는 것보다 좁고 깊게 이해한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차피 지혁처럼 혼자 애니메이션 영상 전체를 만들어갈 것이 아니라면 자기의 전공을 살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현실적이고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이펜이 제작할 애니메이션들은 모든 분야에서 최고이기를 바라는 바램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이 아니라 강제라고 봐도 되었다.
부족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괜찮다고 여겼다. 지혁이 가르쳐주면 된다고 보았기에. 일단 한 번 자리를 잡고 전문가들을 육성해둔다면, 그들의 후임자들은 지혁이 아닌 그들이 직접 가르쳐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반에만 잠깐 고생하자는 의미에서 너무 기초적인 부분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있는 경우가 아니면 일단 받았다.
신기한 건 애당초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지원자들 중 상당수가 한국대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모바일 게임 시장이나 웹툰 쪽으로도 많이 진출해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쪽의 비전이 없다기보다는 아이펜이 그만큼 달콤한 과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아이펜행을 결정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뭐, 웹툰 작가라면 애당초 작품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이상 프리랜서의 개념이라고 이해해도 되기는 하겠지만.
“…….”
지혁의 테이블은 6인용이었다. 동성들끼리만 앉지 말라는 의미에서 남녀가 나눠앉게 되었는데 남선혁과 손현석, 지혁이 자리를 잡은 테이블에는 그들보다 선배 여성들만이 자리를 하게 되었다. 남선혁과 손현석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혁은 왠지 그들이 일부로 이렇게 구성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남선혁은 궁금한 것이 많은 듯 선배들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기색이었고, 손현석은 낯을 많이 가리는 것인지 돌처럼 굳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혁은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그저 묵묵히 고기를 주워먹고 있었다. 솔직히 바깥에서 아이펜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을 듣는 것, 만애과 학생들이 바라보는 아이펜에 대한 시선 등은 지혁에게 있어서는 은근히 재밌고 신선한 것들이었다.
“혹시 너는 궁금한 거 없어?”
“어… 네. 아직 없습니다.”
“동갑이니까 편하게 반말 써도 돼. 우리 과 그렇게 빡빡하지 않아.”
그들은 전부 14학번이고, 1년을 꿇었다고 해도 되는 지혁과 동갑이었다. 그 사실은 이미 밝혀져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지혁은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그래.”
이미 오늘 만났던 손현석과 남선혁에게도 말을 놓아버리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이펜의 입사라고 한다면 지혁은 그들에게 있어 까마득한 상관이라고 해도 되었다. 지혁의 직원들이 그들의 선배라고 하니까 족보가 제대로 꼬였다고 해야할지….
“근데 나 정말 궁금한 게 있거든….”
“뭔데?”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지혁은 왠지 불길함을 느꼈다.
“니가… 그… 수석맞지? 그 그림 정말 니가 그린거야?”
그림? 무슨 그림을 말하는 거지?
‘아….’
실기에서 그렸던 ‘상황표현’의 그림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집중해서 그릴 때 지혁은 대충 그리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막 1학년이 되려하는 새내기의 그림이 너무 뛰어나서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솔직히 지혁은 그가 수석이라는 것에도 상당히 놀라고 있는 중이다. 성적이 대단히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으니 필시 실기의 영향이었을 터인데 다른 사람들이 3~4시간은 그렸을 그림보다 그의 1시간 이하가 가치가 크게 느껴졌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혁과 다른 이들의 수준차이가 그만큼 클 것이라 그는 생각지 못했다. 무엇보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에 만애과로 몰린 이들 중 상당수는 그림실력이 지나치게 형편없기도 하다는 것 같았다. 아이펜이라는 플랫폼 자체에 매료되어서 이곳을 찾은 수험생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아이펜의 직원이 되면 어떻게 해야되냐는 질문이 인터넷 상에 올라오는 것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지혁은 그런 복잡한 과정이 섞여들어 지혁이 수석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다행이네.’
혹시 여자친구가 있냐는 등의 곤란한 질문이면 어찌 대답해야했는데 다행이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진짜? 와. 너 그림 진짜 잘 그리던데. 이, 이거. 이거 맞아?”
핸드폰을 들이밀길래 보니까 그의 그림을 핸드폰으로 찍어온 모양이다. 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다른 여성들과 눈빛교환을 했다.
‘…….’
뭔가 음모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기를 마저 집어먹었다.
“번호 교환할래?”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말이 나왔다. 지혁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떠들던 그녀들과 번호를 교환했다. 그러다보니 남선혁과 손현석도 번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서로 번호를 교환할 수 있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술도 적당히 들어갔고, 내부의 열기도 후끈했다. 곳곳에서 웃음소리, 왁자지껄한 수다소리도 들려온다. 지혁은 나쁘지 않은 분위기라는 생각을 하면서 술을 벌컥 들이켰다.
“너 술 잘 마신다.”
강은솔이라고 했던가? 지혁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여성은 은근하게 지혁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지혁도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 그녀의 외모는 주위의 누구와 견주어도 톱이라고 할만큼 뛰어났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별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
‘내가 눈이 높아졌나?’
그럴지도 모른다. 한예리, 서하린, 차현진 등등 빼어난 미모의 여성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다보니까 이제 강은솔 정도의 미인과의 시간도 그에게 큰 설렘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2차 갑시다!”
“노래방! 노래방!”
그리고 2차로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은근슬쩍 빠지는 사람이 있으면 지혁도 슬그머니 빠지려고 했는데, 그런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만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노래방에도 가게 되었다.
기존의 6명이 쓰기엔 방이 좀 컸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합치게 되었다. 10명이서 노래방에 들어가 있으니 당연히 선곡이 여러 개가 나왔다. 제집마냥 곡을 선택하는 이들을 보면서 지혁은 편안하게 그들의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4명이 추가되었지만 그 중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7명이 여성이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분위기를 즐기는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지혁은 굳이 그들의 실력을 지적할 생각도, 불편하게 여길 생각도 없었다. 잘 부르면 잘 부르는 대로 좋은 것이고 못 부르면 못 부르는 대로 흥겨운 것이니.
팔짱을 끼고서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데, 좀전에 노래를 부르고 돌아왔던 남선혁이 말했다.
“형. 현석이 놈 화장실간다 해놓고 안오는데요?”
“설마…?”
“짼 거 같네요. 뭐, 1차에서 빠질사람들은 진즉에 빠진 것 같지만.”
그랬단 말인가? 지혁은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애당초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세보지 않은 것이다.
“노래 한 곡 하실래요?”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로 생너 OST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별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금의 대화를 통해 지혁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지혁이 가진 실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라고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제작자로써, 그 부분은 지혁이 스스로 공부해서 충분히 습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즉 지혁이 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즐기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 하루는 굉장히 재미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리는 오히려 거북하기만 하다. 다들 가는 분위기여서 온 것일 뿐이지,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다.
‘튀자.’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노래방을 빠져나와 걷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남선혁이 헐레벌떡 나오고 있었다.
“같이 가요 형.”
“술이나 한 잔 더 할까?”
지혁의 말에 남선혁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아까 엄청 마시는 거 같던데. 괜찮으세요?”
“음. 뭐, 괜찮은데?”
“근데 저 돈 없어요.”
“내가 낼게.”
지혁이 선뜻 그렇게 말하자 남선혁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주시면 먹죠.”
“가자.”
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쿨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