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72화 (72/116)

00072  아르핀(Arpin)  =========================================================================

아르핀의 녹음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짬을 내서 크리스마스를 차현진과 보내며 바쁘게 생활하다보니까 12월은 훌쩍 지나갔다. 성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지혁에 관한 언급은 삼갔고, 아르핀은 조용히 도약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31일.

“오빠! 빨리 와!”

“알았다 알았어.”

지혁은 접시를 가지고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 손수 튀겨서 볶아낸 간장치킨과 오삼불고기를 내려놓은 지혁은 시원한 맥주캔을 곧장 잡아들고 탁 소리나게 깠다.

“시작한다.”

“…….”

꼭 이렇게 급하게 일정에 맞출 필요는 없다. 지혁이 원본을 가지고 있으니까 언제든 원하면 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은서는 또 꼭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르핀 1화를 보고 싶다고 고집했고, 결국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12시가 지나서 1월 1일이 되는 시점.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예약을 걸어두었던 아르핀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지혁은 은서의 요청에 따라 부산의 집에 내려와서 그녀와 함께 아르핀을 보기 시작했다.

“튼다.”

“응.”

쿠션을 껴안고 있는 은서를 돌아보며 허락을 맡은 지혁은 곧장 영상을 재생했다.

[ 제작 : 아이펜 스튜디오 ]

짤막하게 소개가 끝나고, ‘아르핀’ 이라는 한글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 후 영상이 시작되었다.

현실의 물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리얼한 모습의 바다가 나왔다. 마치 새의 관점인 것처럼 물을 가르듯 유유히 유영하던 시점이 부드럽게 전환되고, 이내 해변가에 놓여있는 길을 따라서 이동하는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그림같은 광경 속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시점은 천천히 기관차를 아우르듯 느리게 빙빙 돌다가 하늘로 솟아올라, 이내 아래에서 위를 내려찍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

자기가 만든 작품을 이렇게 보니까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지혁은 맥주를 쭉 들이킨 뒤에 안주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 사이 장면은 변화하여 주인공 아렌이 푸른빛을 머금은 언덕 위에서 창창한 하늘 아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의 위쪽에 자리잡은 다리를 건너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녀석의 눈은 바다에 닿은 햇살마냥 반짝이고, 이내 전차는 아렌의 시야에서 손가락 한 마디로도 가릴 수 있을만큼 작아졌다.

[ 아렌. 그만 가자. ]

임유선이 녹음한 시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시아나. 너는 동쪽에서 왔다고 했지? ]

아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시아나. 그러자 아렌이 더욱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사뭇 부담된 것인지, 시아나가 슬쩍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렌 역을 맡은 성우 진희원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 거긴 어때? 듣기로는 소금으로 된 산도 있고, 바다를 건너는 열차도, 하늘에 떠있는 섬도 존재한다던데. 정말이야? ]

[ …음…. 말했잖아.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곳은 아니라니까. ]

‘동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며 시아나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아렌의 모습은 채집한 약초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도 계속되었다.

빰빰. 빠라밤빰. 빠라밤밤.

상쾌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그들의 걸음과 조화를 이루었다. 모험이 시작되는 느낌의 곡. 물론 지혁이 직접 만든 것이다.

“와… 너무 예쁘다.”

햇살이 반짝이며 형광빛으로 일렁이는 나무들 사이로 뻗은 폭 좁은 연갈색의 길에 매료된 것인지, 옆에서 은서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상미. 지혁의 작품이 인기있는 것은 훌륭한 스토리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영상의 퀄리티는 물론이고 삽입되는 BGM, 작은 효과음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기 때문에 그야말로 엄청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작화진을 대체 얼마나 갈아넣으면 이런 애니메이션이 탄생하냐면서 극찬하는 평론가들도 꽤 많았다. 물론 그것은 생일날의 너에게에 내려진 평가였다. 하지만 아르핀도 그 이상으로 공을 들였기에 보다 호평을 들으면 들었지 그 이하는 아닐 것이다.

곧이어 큰 강에서 뻗어나간 작은 줄기의 끝에 자리잡은 소박한 마을이 나타났다. 아렌과 시아나의 고향인 센도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시아나와 헤어진 아렌은 그의 집으로 향했다.

아렌은 5인 가족이었다. 그가 장남이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부모님도 있다. 아렌의 부친은 마을 유일의 약사로, 아렌은 그에게 약초학에 대해서 전수받고 있었다.

아렌이 자신이 캐온 약초를 소개해주자, 부친과 모친이 그를 칭찬하며 잘했다고 한다. 하나뿐인 여동생은 오빠랑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 칭얼대고, 아직 어린 남동생은 아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 바쁘다.

평화로운 가정이었다.

[ 그래서, 니 가족이 죽은게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

그러나 그들의 평화는 1화의 끝에서 깨져나갔다.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괴물에 의해 부모님과 두 동생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뻔한 내용. 뒤늦게 등장해 괴물을 처리해준 강자는 자신에게 대드는 아렌에게 싸늘하게 대사를 날렸다.

[ 본래 내가 처리해야할 녀석인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네 녀석도 죽었겠지. ]

[ 손짓 한 번에 짓뭉개버릴 수 있는 강자 앞에서, 약자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게 맞나? ]

[ 억울하면 강해져라! ]

살려놓으니 보따리도 내놓으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아렌에게 쏘아붙이는 남자, ‘제단’이 칼을 뽑아들었다. 곧이어 그는 미련없이 주인공의 복부에 검을 찔러넣었다.

아렌이 흐려지는 초점을 억지로 부여잡으려 애쓰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에서 1화가 마무리되었다.

‘괜찮네.’

이후의 이야기는 뭐 진부하다. 아렌은 의식불명의 두 동생을 위해서 제단을 다시 만나기 위해 동쪽으로의 여정을 결심한다. 아렌을 구해준 의문의 여인 ‘에실라’에게 두 동생을 맡긴다는 말과 함께. 시아나와의 갈등을 통해 그녀를 떨쳐버리고 동쪽으로 이동한 아렌은 각종 고난과 역경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아렌을 따라 동쪽에서 왔었던 여인 시아나도 다시 동쪽으로 향한다.

‘꿈도 희망도 없지만.’

뭐, 사실은 부모님은 물론이고 두 동생도 이미 죽어버렸다. 아렌이 그저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을 뿐. 그는 그 사실을 1기의 끝자락에서 제단과의 재회를 통해 깨닫게 된다.

“너무 재밌어!”

지혁은 그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드는 은서의 힘에 따라서 좌우로 흔들리다가 핸드폰을 잡아갔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 제단 존나 멋있는데? ]

[ 전투씬 수준 미쳤다 진짜;; 숨도 못쉬고 봤다 리얼. ]

[ 믿고보는 조커 유. 다음주 목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

[ 그냥 영화보는 기분이었음. ]

‘혹평은 안 보이네.’

제단과 주인공 가족들의 원수인 테쿤세의 대결이 많은 사람들의 화제거리였다. 순수한 전투장면만 놓고 봐도 3~4분은 될 것이다. 그들의 혈투는 1화에서 강렬한 임팩트를 주길 바랬던 지혁의 염원이 가득 담겨서 특히 더 수준높게 뽑혔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제단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생긴 것 같았다.

테쿤세는 동쪽의 높은 서열을 가진 존재의 화신(化身)과 같은 존재다. 주인공 아렌이 목적없이 1기에서 힘을 키우는데 집중하다가 끝에 제단을 만날 때 테쿤세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되고 아렌은 테쿤세를 종속으로 부리는 위대한 존재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1기는 말 그대로 사건의 발단과 주인공 아렌이 기초 중의 기초를 익히는 과정을 잘 풀어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안에 각종 에피소드가 자리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웃고, 눈물도 흘릴 것이다.

“찬욱이가 너무 재밌었다고 전해달래.”

“그래. 고맙다고 전해줘.”

일전에 지혁에게 일러스트를 그려왔던 김찬욱과 은서는 이제 상당히 친해진 것 같았다.

은서한테 듣기로 예전에 은서랑 같이왔던 한지은이라는 여자애랑 둘이 사귄다는 모양이다. 본래 한지은은 김찬욱을 꽤 오랜기간 좋아했었는데 은서의 도움으로 결국 만나게 되었다는 것 같다. 한지은은 그 덕분에 은서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것처럼 군다는 모양.

둘이 연인사이로 발전하기는 했어도 셋의 우정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하다. 이제 공부에 집중해야할 시기이기도 해서 쉬는시간이나 식사시간에 빌때마다 모여서 가볍게 노는 정도의 느낌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 같다.

물론 거기서 주된 화제는 당연히 지혁의 작품이라는 듯.

본래 지혁의 사생팬 수준이었던 김찬욱과 굉장히 열성적으로 지혁에게 작품활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피력하는 은서뿐만 아니라 한지은 역시 지혁의 골수팬으로 자리매김 해버렸다. 이제 조커 유라는 이름은 매니아층만 관심을 가지는 정도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일날의 너에게가 대중에 알려지고, 5천만 이상의 판매율을 기록하게 됨으로써 조커 유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지혁은 단순히 소설을 잘 쓰는 소설가가 아닌 한 명의 예술가로써 역사에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신작 재밌게 보고 있어요 ]

[ 아르핀 잘 봤어요. 너무 재밌어요! ]

우웅-

지혁이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을 때 리플라워의 멤버들과 한예리 등에게서 각종 문자가 쏟아졌다. 지혁은 현재 창연화의 흥행성적을 눈으로 직접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예리가 이런 문자를 보내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연화는 38부작이고, 현재 21화까지 방영이 된 상태였다. 정확히는 오늘 22화가 방영될 예정. 20화의 평균 시청률은 33%정도에 최고 시청률은 47% 가까이나 된다고 한다.

[ 한예리, 물오른 연기력으로 대호평. ‘창소이’ 그 자체가 되다! ]

지혁에게 집중적으로 연기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한예리는 창연화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박혀있던 고정관념을 완전히 박살내는 중이었다. 극중의 여주 창소이 역을 맡은 그녀는 지혁이 보기에도 완성형 배우로써의 면모를 물씬 풍기는 중이었다.

‘시작이 좋아.’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긴 하지만,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아르핀이 떠있는 것을 확인한 지혁은 가볍게 웃었다.

아르핀의 도약은 지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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