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71화 (71/116)

00071  아르핀(Arpin)  =========================================================================

“안녕하세요!”

“어…?!”

지혁은 인사와 함께 등장한 성우를 보며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늘은 성우 오디션이 있는 날. 준비는 탄탄하게 해두었기 때문에 예정된 일정대로 오디션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주말간 지혁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지원서를 꼼꼼히 확인하면서 각 배역의 인선을 추려나가는 작업을 진행했다(심지어 이것들도 최종적으로 추려진 것들이었다). 그렇게 5일에 걸쳐서 진행될 오디션의 일정이 확정된 것이 바로 어제. 그것을 감안해서 지혁은 오전 10시라는 넉넉한 시간으로 오디션의 시작시간을 잡았다.

지혁이 이번에 내는 신작은 4부작이다. 그리고 1부작에 나오는 배역을 적절하게 추려보니까 51명의 성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각 배역마다 최소 수십명의 성우들이 몰려들었다. 주연의 경우에는 100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생일날의 너에게처럼 역할이 한정적인 것도 아니고,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보니까 비중있는 역할이 스무 개에 달했음에도 말이다. 시장이 아주 크다고는 볼 수 없는 한국성우계이니 이 정도면 어지간한 업계 종사자들은 대부분이 지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일날의 너에게에서 알 수 있듯이 지혁은 굳이 경력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발탁한 성우들을 지혁이 직접 키워줄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선별작업에 애를 먹어야했다. 회사의 직원들을 동원해서 한참을 고생했다고 해야 하나. 결국 오디션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대표작이 존재하는 유명성우들이거나 여타의 다른 성우들의 추천을 받아 마땅한 실력자들에 한하게 되었다. 정말 싹수가 보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육성했던 성우들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맞는 배역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선점하여 제의를 해왔다. 물론 그들 역시 오디션을 피해갈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솔직히 지혁은 최근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콧대가 높아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기우였다. 지혁이 예전에 호되게 혼낸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조커 유의 인지도가 이미 국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인지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오디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열의를 보였다.

오늘 오디션 일정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는 세상이 다시 한 번 떠들썩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은 생일날의 너에게처럼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형식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컸다. 저번 주 내내 조커 유의 신작에 관한 이야기로 인터넷이 뜨겁게 달궈졌을 정도로 많은이들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지혁은 배역을 맡아줄 51명의 성우를 평일 5일에 걸쳐서 선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살짝 빡빡한 일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다소 급하게 진행한다고 해서 소홀히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서류작업을 통과한 성우들과 함께 치러지는 공개 오디션의 모든 자리에는 그가 존재할 것이다.

“네. 다이어트를 좀 했어요. …이상한가요…?”

여주인공 시아나 역의 오디션을 보러 온 임유선은 통통했던 지난 체형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몸매를 가지고 들어섰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 기준으로, 한예리나 서하린 등에 비하면 다소 뒤처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전에 만났던 은행원(이름이 기억은 안난다)보다도.

그러나 이전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녀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아뇨. 보기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지혁의 말에 임유선은 민망한 듯 시선 처리를 못했다.

“잠이 안와서요.”

시아나는 주연 중에서도 주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역이기 때문에 특히 오디션을 볼 인원이 많았다. 서류를 추리고 추렸음에도 23명이나 된다.

제일 일찍 도착한 임유선을 시작으로(그녀는 무려 7시 반에 왔다) 오디션 시작시간인 오전 10시가 되기 2시간 전인 아침 8시부터 성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혁은 오디션의 준비를 하면서도 그들의 면면을 은근하게 살펴보았다. TV에 간간히 모습을 보이며 활약하는 유명성우 한소은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보았자 한예리 앞에서는 인기의 인자도 꺼내지 못할 사람이었고, 때문에 지혁은 그녀를 잠깐 쳐다보았다가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허나 지혁은 이제껏 성우들과 그리 큰 인연이 있었던 것이 아니여서 아는 얼굴은 없었다. 굳이 꼽자면 나이가 좀 드신 분들도 상당하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지혁 역시 어떤 사람들이 왔는지 궁금해서 본 것일 뿐이다.

‘벌써 다 모였네.’

9시까지는 한 시간 반이 남은 시점. 지혁은 23명의 예비 여주인공들이 모두 모였음을 확인하고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제 오후에 급하게 일정에 관한 공지를 하고 양해를 구했고, 배려를 했다고는 하나 일정에 쫓기는 상황이여서 오전에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만큼 성우들이 이번 오디션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하다는 뜻이리라. 지혁은 잠깐 공지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작업중인 것을 멈추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주목해 주시겠습니까?”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경직된 자세로 무릎에 손을 얹고 있던 이들 등이 일순간에 지혁을 쳐다보았다. 임유선을 포함해 몇몇을 제외하면 지혁이 조커 유라고는 생각 자체를 안하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지혁이 어리다보니까 그냥 잡일을 도맡아하는 막내 정도로 인식되는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저는 신작, 아르핀(Arpin)의 원작자이자 총괄 디렉터이며, 이번 성우 오디션의 총책임자를 맡고 있는 유지혁이라고 합니다.”

짝짝짝짝.

“……?”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한 임유선을 따라서 박수를 치는 성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이내 핫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원작자’라는 말에서 지혁이 조커 유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니면 막내인줄 알았던 사람이 예상외로 높은 직위에 있어서 놀랐거나.

큼 하고 목을 한 번 가다듬은 지혁은 스물 셋의 여성의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기본적으로 유한 사람입니다만, 창작자 조커 유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는 그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습니다. 그 점을 분명히 유념해주시고, 저와의 인연이나 관계 등이 배역을 따내는 것에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점을 지금 분명히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임유선 씨께서 계시기 때문에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로지 실력. ‘시아나’라는 배역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성우분을 뽑겠다고 장담하겠습니다.”

실제로 지혁은 임유선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성우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성우를 시아나 역에 선점할 것이다. 그 사실은 임유선도 잘 알고 있을 터. 예상대로 그녀를 쳐다보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지혁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수제자라지만, 여기있는 스물두명은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수십년의 경력을 보유한 이들도 많았으니까 긴장하는게 정상이었다.

다른 성우들도 지혁이 확실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안색을 굳히는 모습이었다. 이만하면 된 것 같아서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일정은 9시였는데, 일찍 시작해도 좋겠죠. 기다리시기도 지루하실 것 같은데, 준비도 거의 마무리 단계니까 한 시간 빨리 오디션을 볼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

“저도 괜찮습니다.”

거부감을 표하는 인원은 없었다. 지혁은 알겠다고 하며 그들과의 첫 만남을 마무리지은 뒤에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8시가 되었다. 그 순간 지혁은 오디션을 실시했다. 한번에 오디션을 다 볼 수는 없었기에 4명씩 끊어서 보기로 했다.

“네, 간단한 자기소개와 대표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PR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지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의 이력이 적힌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하자, 처음 들어온 4명의 성우들이 자신들의 소개를 시작했다. 지혁은 그녀들의 소개를 전부 들은 다음 오디션의 진행 방식을 알려주었다.

애니메이션의 일부를 틀어주면, 그에 맞는 대사를 마치 녹음하듯 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상대역인 주인공 아렌은 지혁이 직접 해주었다. 물론 대사와 상황 등은 사전에 공고를 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충분한 연습을 하고 왔을 것이다.

“나는 동쪽으로 갈거야. 그렇게 정했고, 가는 일만 남았어.”

지혁이 먼저 대사를 치자, 첫 주자인 한소은이 맞받았다.

“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 동쪽은 높으신 분들이….”

“알아!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깜짝!

성우들은 지혁의 솜씨에 진심으로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연기하고 있는 한소은은 비교적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도 당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쪽은….”

“그래, 너는 갈 수 없겠지. 좋겠다 넌. 아무래도 상관 없을테니까.”

“왜 말을 그렇게 해? 나도….”

오디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지혁과 나란히 앉아있는 직원들도 순식간에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렇게 첫 주자인 한소은의 오디션이 종료되었고, 지혁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종이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100점 만점에 89점. 적은 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지혁은 애당초 90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85점 정도면 무난한 합격선이라고 봐도 된다.

그렇게 다음 차례가 진행되어가는 과정이 이어지고, 그들의 점수는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그리고 마지막 5명 중에 섞여있던 임유선의 차례가 된 순간 지혁은 미묘하게 웃었다.

임유선은 94점이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배역을 따내고 지혁에게 연신 인사를 하는 성우를 좋게 얘기해서 돌려보낸 지혁은 의자에 드러눕듯 앉았다.

‘…끝났다.’

마침내 5일에 걸쳐 진행되었던 성우 오디션이 모두 종료되었다. 총 51명의 성우를 뽑았으며, 그들 중 5명은 생일날의 너에게를 담당했던 성우들이었다. 쟁쟁한 후보들과 경쟁을 해야 했지만 그들은 당당하게 실력으로써 배역을 따낸 것이다. 지혁과 보냈던 두 달이 다른 성우들의 년 단위의 시간을 커버해주었다는 것은 지혁의 입장에서도 좀 놀라웠다.

지혁은 각 배역의 오디션이 시작할 때마다 후보들을 모아놓고 공정한 평가를 약속했고, 다섯은 분명히 지혁의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그 이외에 50명 중 일부는 자신이 합격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지혁이 무조건 점수만으로 성우들을 뽑은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지금 당장에는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지혁과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조금만 조언을 해준다면 충분히 배역에 걸맞는 매력있는 성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을 뽑았기에 생긴 결과였다. 물론 그런 경우는 일부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실력대로 뽑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도 고생하셨어요.”

지혁은 이번 오디션의 진행을 가장 많이 도와준 이진우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유능한 애니메이터이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었다. 더불어 그는 서울이 고향이어서 부산에 잔류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로 따라온 사람이기도 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여자 배역도 그렇게 위화감 없이 잘 소화를 해내시는지….”

“하하… 별 거 아닙니다.”

남자 배역때는 여자의 목소리도 흉내내었기 때문에 그는 진심으로 감탄한 기색이었다.

잠깐 지혁과 대화를 나누던 이진우는 지혁의 강권에 따라 먼저 퇴근했다.

‘그럼….’

어쨌든 오디션은 종료되었고, 지혁은 녹음 일정에 대한 설명도 확실히 해두었다.

‘더 바빠지겠군.’

신작 아르핀은 총 114화로 구성이 되어있고, 그 중 6편이 외전이라서 108편이 본편이다. 그리고 그 108편은 각각 27화로 이야기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끝나도록 되어있다. 즉, 1기부터 4기까지로 구성을 해둔 셈이다.

이번에 작업할 것은 당연히 아르핀 1기. 총 27화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지혁은 그 모든 부분의 녹음을 아무리 길어도 2주에 걸쳐 모두 끝마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성우들은 촘촘하다고 생각되는 일정에 경악하는 기색이었지만, 지혁은 자신이 있었다. 될 거라고 생각해서 잡은 일정이고, 뽑은 성우들의 실력도 하나같이 초일류급이다. 생일날의 너에게때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당장 녹음이 가능한 프로들만 모아놓았고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니 가능할 것이다.

‘방영일은….’

1화의 방영은 사전에 공고했던대로 1월 1일. 만약 예상치못한 변수가 생겨서 그때까지 녹음을 완전히 다 끝내지 못하더라도 지혁은 사전제작을 끝내고서 선보인다는 기존의 계획을 접고 1화를 방영할 생각이었다.

이렇듯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을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지혁의 욕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에 딱 첫 스타트를 끊고 싶었다. 매주 목요일마다 1화씩. 1기는 외전이 1편이기 때문에 딱 28화로 떨어지니 정확히 7월 9일날 28화로 1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난리가 났군.’

오늘 오디션이 있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하는 각종 기사와 신문들을 보며 지혁은 피식 웃었다. 몇몇 성우들은 자신이 뽑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이라도 한 것인지 실명이 공개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아르핀이라는 작품 자체가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에 성우들도 자신들의 배역이 정확하게 어떤 역할인지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기사는 말을 빙빙 돌려가면서 이러이러했다는 정황만을 얘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식적인 오피셜이 없기 때문에 그들도 많이 답답한 모양.

[ 진짜 너무 기대된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

들어가본 블로그에 적혀있는 기대감 어린 글귀에 지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정말…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생일날의 너에게가 예상외로 대박을 쳤지만, 애당초 그건 그냥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본편은 아르핀부터 시작이다. 지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공지사항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일정을 확실히하는 것이다.

아이펜 홈페이지의 캘린더 1월 1일의 일정에, ‘Arpin, Frist Episode’ 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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