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70화 (70/116)

00070  아르핀(Arpin)  =========================================================================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나.’

모래사장. 반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채로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을 거니며 철썩거리는 에메랄드빛 바다의 파도를 감상하고 있던 지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수하게 게임의 제작만을 목적으로 룸으로 이동해온지도 3년이 다 되어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요점은 그것이 아니다.

이미 작업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직 조금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혁은 이제 떠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애니메이션의 작업에 비하면 4분의 1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임을 만든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은 명백한 일이지만, 지혁의 작업속도가 가속화되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게임의 제작에 엄청난 공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해결되는 부분들이 많은 것도 한몫했다. RPG 게임의 경우 스토리라인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지금의 지혁이 그쪽을 걱정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게임이든 BGM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을 하는 편인데, 만들어둔 곡들이 많다보니까 그쪽도 단번에 해결이 되어버렸던 것.

그렇게 곳곳에서 작업시간이 줄어들만한 요소들이 있었고, 때문에 지혁은 꽤 빠르게 게임들을 완성해나갈 수 있었다. 가장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던 것은 ‘리프’로, 무려 2년에 가ᄁᆞ운 시간을 혼자서 독차지했다. 다른 두 개의 시간을 따지면 하나가 4 달. 다른 하나가 반년 정도의 시간을 잡아먹었을 뿐이다.

3년 중 2년에 가까운 시간이 3D MMORPG 장르의 리프를 개발하는데 사용되었던 것.

그마저도 이제는 끝났다. 반복작업이 주된 업무라서 좀 지루했었지만 결국 끝냈고, 지혁은 이제 현대로 돌아갈 일만은 남겨두고 있었다.

“가볼까.”

3년이라는 적지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미련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이전에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위해서 룸을 찾았을 때의 복잡오묘한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스아아아악.

룸을 뒤로하고 현대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 본체를 갖고 이동한 지혁은 침실 한쪽 구석에 그것을 잘 놔둔뒤에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생활패턴이 어긋나지 않도록 일부로 잠을 자지 않고 왔기 때문에 수마가 몰려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                 *                 *

일어나 보니 사위는 어두웠다.

지혁이 잠든 시간은 새벽 2시쯤이었으니까, 그리 오래 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혁은 주위를 둘러보다 스탠드 등을 켠 후에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으로 간단하게 잠을 깨운 지혁은 거실로 나가보았다.

“…….”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는 것은 금방이었다. 다시 침실로 돌아가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오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꼬박 17~8시간 정도를 잠에 취해있었던 것이다.

‘…많이 피곤하기는 했지.’

쌓였던 피로가 한번에 쏟아졌던 모양이었다. 많이 자도 10시간을 넘기는 일이 없었던 지혁에게는 흔치않은 겨울잠 수준의 시간이라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솔직히 리프의 제작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시간보다도 재미없다고 느끼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애니메이션도 분명 그런 부분은 존재했었지만, 분야에 가지는 애착의 농도가 다르다보니까 생긴 차이인 것 같다.

‘진짜 이제 당분간은 가지 않을 거야.’

룸을 너무 무분별하게 사용했다는 느낌이 있다. 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가슴에 새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해볼까.”

오늘은 12월 1일.

바쁜 일정의 시작과도 같은 날이다.

지혁은 차현진에게 관련된 사항을 일러준 뒤에 곧장 컴퓨터를 켜서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생일날의 너에게의 차기작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으며, 관련하여 성우 오디션 일정을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화의 상영 예정일이 1월 1일이라는 것까지.

사실 아직 아무것도 한 건 없지만, 지금부터 하면 된다.

- 네, 선생님.

신호가 채 두 번이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임유선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갑작스럽게 전화를 하니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요즘 좀 바쁘시다고.”

-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공치사를 들으려고 전화를 한 것은 아니기에 지혁은 곧장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신작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디션 일정을 잡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미리 일정을 빼두셔야 합니다.”

지혁은 연이 닿아있고, 전작의 주인공을 맡았던 임유선 역시 오디션을 예외없이 치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그녀는 별다른 반발 없이 순순하게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지혁이 일을 함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공과사를 구분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이제 그녀는 아는 것이다.

- 그럼….

“네. 12월 8일부터 13일까지 오디션을 볼겁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주인 15일부터 녹음을 들어가게 될거고요.”

작업을 언제 끝낼지는 알 수 없다. 성우들이 지혁의 생각대로 잘 따라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최소한 1월 1일이 되기 전까지는 끝내야만 할 것이다. 지혁은 그 사실을 염두해두고 오디션을 꼼꼼하게 볼 생각이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아이펜 공지사항에 추가로 기재를 할테니까, 그것을 확인해보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네 분한테도 전달좀 부탁드립니다.”

- 넵 알겠습니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지혁의 성적은 훌륭했다. 원하는 곳을 골라갈 수 있을 정도. 지혁은 성적이 나오는 즉시 서울로의 이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준비는 차현진이 거의 다 끝내놓았다. 지혁은 점검을 하는 식이었다.

‘…아직도 열기가 사그라들질 않네.’

생일날의 너에게 다음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짧은 텀을 두고 또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미리 제작을 해두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지배적인 의견이었고, 사실이기도 했다. 물론 지혁이 오피셜로 그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아이펜의 공지사항에 떠있는 성우 오디션에 관련된 글귀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한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이웃나라의 성우들도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개중에 한국어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과 작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이번작품이 대성공을 거두어서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의 위상… 아니 조커 유에 대한 선망의 시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면 다른 국적을 보유한 성우들이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좀 미래의 일일 터였다.

“잘할 수 있지?”

“응. 너무 걱정하지 마.”

결국 은서는 지혁을 따라오지 않고 이곳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녀가 선택한 길이고, 지혁은 말리지 않았다. 1년이 적은 건 아니지만, 경호원들도 붙여둘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혁도 시간이 날때마다 틈틈이 부산으로 내려올 것이고.

“간다.”

은서와 헤어지고 내려간 지혁은 새로이 고용한 운전기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혁과 나이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았다. 유창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지혁보다 7살이 많은 27살의 사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유창현이 운전하는 차가 부드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거리 주행이었지만 평일 대낮이라서 그런지 차가 크게 막히지는 않아서 오전 일찍 출발하니 점심때쯤 도착할 수 있었다.

스르륵….

차고의 문이 열리고, 유창현이 차고에 주차를 하는 사이 밖으로 나온 지혁은 거대한 정원이 딸린 그의 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돈값은 제대로 하네.’

멋들어진 정원이 딸린 집. 수백억의 돈을 들여서 구입한 보람이 있었다.

“괜찮네.”

그걸로 끝. 감상을 끝낸 지혁은 곧장 걷기 시작했다. 정원을 가로질러서 집의 입구로 도착한 지혁은 차현진이 열어주는 문을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도 뭐 그냥… 평범하고.’

룸에서 여러 가지 저택을 겪어본 적이 있어서 지혁의 반응은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이 이미 차현진으로부터 각종 사진을 건네받으면서 외형과 내부의 모습 등을 어느 정도는 익혀두기도 했었고.

가볍게 집을 둘러보던 지혁은 그의 작업실이라고 할 수 있는 2층에 관심을 가지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잘 되있군.’

지혁은 차현진에게 3가지를 요구했다. 지혁이 필요한 방은 크게 3가지로 좁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작업실과 방송실, 침실이 그것이었다.

작업실은 일종의 서재 느낌으로 되어 있었다. 거대한 책장에 책들이 꽂혀있고, 원한다면 커튼으로 3면을 가릴 수 있는 넓직한 공간이었다. 당연히 컴퓨터와 노트북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푹신해보이는 원형의 소파 등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통유리로 되어있는 벽면 너머에는 연못이 자리한 정원이 자기를 좀 봐달라는 듯 자연의 모습을 적극 어필하는 중이었다.

방송실은 그리 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집이 워낙 커서인지 공간은 넓었다. 방음에 신경써달라고 했는데 잘 처리해둔 것 같았다.

침실이야 뭐, 말할 것 없이 정갈한 모습이었다.

“신경 많이 썼네요.”

“아닙니다.”

그 이외에도 은서가 서울로 상경할 경우 쓸 수 있게 미리 만들어둔 방부터 와인창고에 이르기까지 아주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차현진의 세심한 성격이 드러나는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지혁은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혁은 앞으로 가사일을 도맡아해줄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집이 큰 만큼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따로 머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고용인은 운전기사인 유창현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이었다. 그 중 세명은 경호원이니까 실질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두명인 셈이다.

“회사에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집구경이 대강 끝났고, 지혁도 흥미를 잃은듯한 모습을 보이자 차현진이 그렇게 물어왔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은 굳이 부산에 있는 회사를 처분하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직원들을 모두 빼내올수도 없는 일이었고, 하려면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냥 거점을 부산으로 해 두고, 서울에 따로 또 하나를 만들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애니메이터들과 하는 작업은 장기간을 바라보고 시작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은서를 보기 위해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틈틈이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만약 은서가 서울로 와서 부산에 더 이상 볼일이 없게 된다면 그때가서 이주를 생각해도 늦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스튜디오와 집무실만 일단 꾸며 두었습니다.”

성우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요청했는데, 급하게 어떻게 어떻게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을 터인데, 11월부터 미리 준비해두라고 일러두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차를 타고 회사로 이동해서 시설의 점검을 해본 지혁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이틀 뒤에 있을 성우 오디션을 행하는 데는 차질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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