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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재능-62화 (62/116)

00062  8월  =========================================================================

은서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통화하는 사이, 지혁은 자리에 앉아서 치킨 닭다리를 손으로 잡아 뜯기 시작했다. 편하게 다시 먹는 것에 집중하는 지혁과는 다르게 리플라워의 멤버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벌컥!

“아,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네, 안녕하십니까!”

은서가 교복을 입고 있어서 자신들보다 연하라는 사실은 잘 알텐데, 이나희는 굉장히 깍듯한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은서는 그녀들의 태도에 손사래를 치며 편하게 대해달라며 먼저 친하게 굴었다. 눈앞에서 지혁이 들들 볶이는 모습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긴장한 기색이던 리플라워 멤버들은 시간이 좀 지나서야 경직된 태도를 살짝씩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제 친구가 정말 팬이거든요. 혹시 불러도 될까요? 이미 불렀기는 한데….”

“아… 혹시 그 한지은이라는 분?”

문하얀의 말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저희가 처음 사인을 해준 팬인데 당연히 기억하죠. 저희는 괜찮아요.”

그나마 붙임성이 좀 좋은 문하얀은 은서와 금방 친해진 듯 부드럽게 대화를 해나가고 있었다. 리플라워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은서는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면서 방으로 다시 들어가고, 지혁은 그 사이 닭다리 하나를 다 뜯었다.

“여동생 분이 예쁘시네요.”

“쟤가요? …음.”

솔직히 여동생이다 보니 별 생각은 없는데,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은서는 예쁜 편이기는 했다. 지혁과는 다르게 부모님에게 유전자를 몰아서 받았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지금의 지혁은 신의 힘을 빌려서 미남자가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부정은 할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렸을 때 다시 은서가 파란색 후드티를 걸친 편한 복장을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정말 팬이에요!”

은서의 친구인 한지은도 그렇게 합류하고, 얼떨결에 술도 많이 마시다보니까 새벽이 되었다. 내일 학교를 가야하는 한지은도 돌아가고, 은서도 잠이 든 밤.

문하얀과 서하린은 어깨를 기댄채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화장실을 갔다온 사이 골아떨어진 그녀들을 내려다보던 지혁은 슬며시 손을 뻗어서 둘을 떼어낸 뒤에 문하얀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려서는 그의 침실로 이동, 침대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서하린도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옮겨서 문하얀의 옆에 내려놓은 뒤 걷어두었던 이불을 슬며시 들어 올려 덮어주었다. 솔직히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지혁의 앞에서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로 보이지 않는 건 아닐테고, 나 잡아 잡수라는 식이라 좀 당혹스러웠다.

“애들이 좋아서 그래요. 곧 해체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1위도 찍어봤으니까요.”

사실 지혁을 그만큼 믿기 때문일 것이다. 거실로 나온 지혁은 은서가 빌려준 편한 복장을 하고서 그를 쳐다보는 이나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쌩쌩하다는 듯 손가락 끝부분으로 맥주캔을 부여잡고 손목의 힘으로 빙빙 돌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역시 상당히 취해보이기는 한다.

“이나희 씨가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지혁은 그렇게 농담을 던지면서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지혁은 정말 어지간한 양을 들이붓지 않는 이상 술에지지 않을 정도로 도수가 늘어있었다.

이나희는 지혁의 말에 부정하지 않고서 처연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마시고도 멀쩡한데, 그때는 대체 얼마나 마셨던 건가요?”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노래방에서 그들과 마주쳤던 날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그때는 별로 안 마셨었습니다. 마시다보니까 늘더라고요.”

지혁은 맥주캔 하나를 휙 당겨던진 뒤에 한손으로 낚아채고선 곧장 칙 소리를 내며 깠다. 좀 더 마시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대작이라도 해줄 요량이었다.

꿀꺽꿀꺽.

맥주를 벌컥 들이킨 지혁은 입을 떼고서 속에서부터 느껴지는 쓴맛에 인상을 미묘하게 찌푸리며 물었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피곤해요. 피곤한데, 이상하게 정신은 말똥말똥해요. 들어가도 잠은 안올 거 같아요. 수학여행 떠나기 전날의 기분이랄까.”

지혁은 수학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서 그 기분이 어떤지를 모르겠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 것 같아요.”

거의 6시간이상이 지났는데도, 이나희는 자신이 1위를 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지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린 오징어 다리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잠시 나갈까요?”

“네? …갑자기요?”

뜬금없이 웬 산책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나희가 지혁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부담스러운 눈길에 지혁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그녀가 맥주캔을 내려놓고 기어서 그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이제 말씀하셔도 되요. 애들도 다 자는 거 같고….”

뭔가 핀트가 어긋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혁이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피하지않고 지혁을 마주보던 이나희가 말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뭘… 말입니까.”

이상한 일이다. 지혁은 그 순간 다시 마주친 이나희의 눈빛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이건….

‘…….’

예전에, 한예리에게서 보았던 눈과 비슷하다.

지혁은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당황하여 모르는 척 했다.

“저… 밤일하고 다녔어요.”

“…….”

“은근히 그런 경우 많거든요.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해서 다 연예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 이런 쪽에 발을 담근다는 건 외모가 기본적으로 바쳐준다는 소리니까… 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로 뛰어들게 되죠. 딱 1주년의 그날 이후 얼마 뒤부터 일탈이 시작되었어요.”

“실제로 저같은 년들 많았어요 거기. 돈만 준다면 손님의 비위를 얼마든지 맞춰줄 수 있었죠. 이러려고 호기롭게 집을 뛰쳐나와서 춤을 배웠나 싶으면서도… 현실에 순응한 거죠.”

전혀 몰랐다. 이나희는 첫 만남부터 늘상 당당한 모습을 관철했었다.

이나희는 내려놓았던 맥주캔을 다시 들어올리더니 고개를 숙여 맥주캔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그때 선생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말이에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거죠.”

노래방에서 지혁이 불렀던 노래가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다는 얘기를 그녀는 꽤 여러번에 걸쳐서 했었다. 작업을 하는 도중에도, 그의 프로듀싱이 있지 않는 쉬는 시간에도.

“이렇게 잘생겼는데 노래도 그렇게 잘하니까…. 이런 사람들이나 연예인이 되는 거구나 싶었던 거죠. 이런 사람도 그냥 평범한 일반인, 대학생에 불과한데 내가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가서 잘나가는 톱스타가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달까….”

그 말은 즉슨, 지혁이 그녀에게 일종의 계기로써 작용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로 그런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나희가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자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던 그 순간의 선택이 지혁 때문이라고 남탓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가요. 노출이 심한 복장을 입고 폐쇄된 공간에서 남정네들에게 아양을 떨어가며 술을 따르고 하는 그 순간에도…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던 여자에요.”

실제로 이나희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노래를 부를때는 열정적이지 않아도 춤을 출 때는 다른 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었던 사람이었다. 태생이 춤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춤을 잘 추기도 하고, 그녀의 춤은 ‘맛’이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대접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선생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저는 만난 이후로 매일매일 고민을 해왔어요. 그리고 제가 생각해낸 답은….”

스윽….

지혁은 입고 있는 옷을 잡아가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알고 있어요. 그… 비서분이랑 사귀시는 거죠?”

일전에 보인 모습 때문에 리플라워 멤버들은 지혁과 차현진의 관계를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았다. 오인할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지혁의 뜻을 분명히 이해한 것 같아 보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을 탐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에요.”

“무슨 뜻입니까.”

지혁이 얼굴을 굳히며 묻자, 이나희가 말했다.

“언제든, 저를 마음대로 가지고 노세요. 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활할 테니까요.”

그 순간 지혁은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진심이냐고 묻기엔, 이나희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게 없어요. 가진건 몸뚱아리밖에….”

이나희는 지혁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진해서 지혁에게 ‘그녀 자신’을 상납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혁이 그녀들을 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는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황을 만들어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제가 한 말이 우습게 들리셨던 것 같은데, 저는 정말 여러분한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정당한 계약관계를 원하고, 그렇게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까?”

지혁이 그녀의 말을 끊으면서 빠르게 말을 이어나가자, 이나희가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한예리와의 일로 지혁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무언가를 댓가로 여성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쓰레기같은 일인 지도 깨달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저는 제 여자친구를 존중하고, 그녀만을 바라보면서 생활할 겁니다. 물론 헤어질 수는 있겠죠. 그럼 다시 사랑할 연인을 찾을 겁니다. 그저 몸만 섞는 관계, 무언가를 빌미로 하여 정해지는 상하관계같은 건 제게 필요없습니다. 원하지도 않고, 원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큰 은혜를 입었고 그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이나희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라고 이런 선택을 하는게 쉬웠을 리는 없다. 이나희가 연예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녀가 겪어온 시간이 어떠했는지 지혁은 모른다. 단, 본래 이나희가 이런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고 믿는다.

“…….”

이나희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지혁이 그녀를 요구할 일이 없다는 건 확실히 자각한 듯 싶었다.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시간도 늦었고요. 그만 드시죠.”

지혁은 이나희의 손에 쥐어져있는 맥주를 슬며시 뺏어들었다. 뒷정리를 대강 해두었기 때문에 마른안주가 담긴 접시만 치우면 되었다. 상을 말끔히 정리한 지혁은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가져와 이나희에게 주었다.

지혁의 침실은 서하린과 문하얀이 점령했고, 그는 작업실에서 잘 생각이었다. 거실의 소파는 이나희에게 양보하려는 것이다.

“누우세요.”

“…네.”

이나희가 소파에 눕자, 지혁은 이불을 그녀에게 슬며시 덮어주었다.

“고맙습니다….”

돌아서서 작업실로 걸어갈 때, 뒤에서 울음기가 담겨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불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지혁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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