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58화 (58/116)

00058  리플라워  =========================================================================

이게 무슨 상황이지? 대표라는 사람의 표정은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뻗어서 앉으라는 말을 하며 그도 자리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그의 뒤로 차현진이 슬며시 다가와서 시립했다.

지혁이 권유하고,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앉으세요.”

지혁이 다시 한 번 강권하자, 그들은 그제야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였다.

“약속시간이 아직 40분이나 남았는데, 제가 늦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저희 분명 어제 전화로 약속시간 12시로 잡았었죠?”

“네, 네. 저희가 빨리 나온 것이니까 너무 유념치 마십시오.

대표의 말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시간보다 40분이나 일찍 온 지혁이 사과하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다. 그들이 멋대로 빨리 온 것일 뿐이니까.

“근데 혹시 저희 애들이랑 아는 사이이십니까?”

“네 뭐….”

“선생님.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아, 부탁해요.”

그의 질문에 지혁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차현진이 말해왔고 지혁은 수락했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입구로 이동해서 나가서 문을 닫자 지혁은 입구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3인조 걸그룹 리플라워와 그녀들이 소속되어있는 RTF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호준.

“문하얀 씨를 통해서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날 잘 들어가셨습니까?”

지혁의 질문에 대표가 리플라워 소속의 여성들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서하린과 이나희가 급히 대답했다.

“네!”

“네. 잘 들어갔습니다.”

그녀들은 이제 상황파악이 되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정보를 이해했다고 해야할까. 그저 노래방에서 우연히 만나서 같이 놀았을 뿐인 어수룩했던 청년이 알고 보니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장르소설가 조커 유이자 그들에게 곡을 주겠다고 했던 작곡가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인 것 같아 보였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당혹감을 느껴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서하린과 이나희는 물론이고 중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문하얀조차 지혁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지혁은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여낼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저보고 노래를 잘하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근데 저는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게 아닙니다. 작사, 작곡도 제 특기중에 하나죠. 물론 노래보단 소설을 더 잘 뽑아내기는 합니다만.”

“하하하! 하. 하….”

지혁의 농담같지 않은 농담에 과도하게 반응하던 소속사 대표는 옆을 힐끗 쳐다보곤 그의 휘하 소속연예인들이 그 누구도 웃고 있지 않자 민망한지 표정을 굳히며 끝을 흐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무거운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희인가요?”

문하얀이 물어왔다. 예상되는 질문의 범주에 들어가있는 물음이었기에 지혁은 즉시 답했다.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동정같은 것도 아니고요. 그냥 제가 몇 개의 곡을 작곡했는데 썩히기가 아까워서 그것들을 써줄 사람들을 찾아야만 했고, 리플라워 여러분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제가 아는 연예인이나 가수가 거의 없는지라.”

지혁은 그녀들의 실력을 모른다. 관심도 없었다. 키워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막연한 생각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그들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위해서 룸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OST, BGM 등을 작업하기 위해서 연습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그들의 곡을 만들어서 가지고 온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새 차를 타왔는지 차현진이 그들의 앞으로 살며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혁은 그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한모금 마신 뒤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딸깍.

“솔직히 말씀드리죠. 여러분들이랑 같이 일해보고 싶었다거나,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뽑았다거나 등의 이유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바라는게 있어서 이러는 것 역시 아닙니다. 그때의 작은 인연이 거대한 행운으로 돌아왔다고 속 편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제 노래를 훌륭히 소화해내기까지의 ‘노력’만을 요구할 것이며, 여러분은 제가 기회를 드리는 만큼 진지하게, 성실하게 임해서 꼭 성과를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답니다.”

그때의 지혁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지혁에겐 차현진이 있다. 이 일을 빌미로 서하린을 꼬셔서 어떻게 잘 해보겠다는 생각은 좁쌀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전의 성우들에 비하면 이들은 양반이다. 그들은 지혁과 연줄이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남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사이였고, 실력적인 측면에서도 부족한 부분들이 엄청 많았다. 리플라워 역시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고는 확신할 수 없으나, 최소한 그들은 이미 활동하고 있는 프로였다.

“단 저의 정체는 어디가서 말하고 다니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발설하면 죽여버리겠다. 뭐 이런 말을 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괜히 귀찮아질까봐 그러는 거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에요.”

이나희가 빠르게 답해왔다.

그녀들은 여전히 당황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하얀과 서하린과는 다르게 이나희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뜬금없다는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조커 유가 굳이 그들에게 이런 매력적인 제안을 해온 이유가 무엇일지 불안감부터 느꼈을 터였다. 그들은 이뤄낸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현재 가장 뜨겁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그들에게 접촉을 해왔다는 사실 자체가 꺼림칙했을 거라고 본다. 어쩌면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터였다.

근데 그저 작은 연이기는 했었지만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그들을 선택했다고 말해주었으니 그녀는 이제 지혁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를 잡기만 하면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이쪽에서 사정을 많이 봐준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지혁은 이호준 대표롤 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너무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받겠습니다만, 그래도 이쪽의 조건은 들어보셔야 할겁니다.”

당연히 지혁은 그냥 얼렁뚱땅 그들과 계약을 끝낼 생각은 조금도 없다. 지혁이 조건이라는 말을 하자 리플라워 멤버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조건… 말씀이십니까? 무슨….”

그때 때마침 차현진이 차를 바쳐왔던 쟁반을 밖에 두고서 다시 들어왔다. 지혁은 그녀가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손에 쥐고있던 파일철을 넘겨받았다.

“일단 제 기준에 맞는지를 테스트해보고 싶습니다. 리플라워 여러분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는게 가장 정확하겠죠?”

지혁의 말에 대표의 표정이 확 굳었다.

“만약… 자격미달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당연히 가르쳐주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대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래서 지혁은 일부로 심각한 표정으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제가 프로듀싱을 하는 과정에서 가르침을 주겠죠?”

“아….”

지혁은 부연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저희의 작품인 생일날의 너에게를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생일날의 너에게의 목소리를 녹음한 다섯 명의 성우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학원에 다니는 성우 지망생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몇 달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그 결과 생일날의 너에게에 걸맞는 훌륭한 성우가 되신 것이죠. 리플라워 여러분들은 그분들과는 다르게 기본적인 실력이 있으시니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당초 지혁의 노래는 그들에 맞춰서 제작되었고, 난이도가 그렇게까지 높다고도 볼 수 없었다. 아무리 길어도 한 달이 채 안 걸릴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 시간이 딱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성우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그의 내면이 다져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으니까. 한 마디로 성장의 일환으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은근히 가르칠 때 얻어가는 것도 많았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성우보다는 가수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공개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으나 생일날의 너에게에 사용된 모든 OST, BGM은 제가 직접 작사, 작곡하고 불렀다는 점을 참고해 주십시오.”

지혁의 말에 넷의 눈동자가 일시에 크게 떠지는 것이 보였다. 그 반응으로 추측컨대, 그들은 전부 생일날의 너에게를 본 것 같았다.

“딱히 페이를 후려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알아보니까 분배는 대충 이 정도인 것 같아서요. 제 이름값이 높다고 가격을 더 받으려는 건 아니니까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지혁은 파일철을 넘겨주었다. 이호준은 꼼꼼이 확인을 해보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표정이 점점 밝아져가고 있었다.

“3년 무이자로 해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성공해서 갚을 수 있으시겠죠.”

지혁이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스쳐 지나간 인연 정도로 노력해서 만들어낸 곡을 공짜로 퍼줄 일은 없다. 정당한 가격을 책정해서 받을 것이나 당장 그들이 그 금액을 지불할 여건이 안 된다고 판단해서 3년의 유예기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가격이 쌘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신 없으면 시도도 안하는 사람입니다.”

지혁의 곡은 실제로 질도 좋았다. 아마 지혁이 이들에게 제시한 가격으로 팔겠다고 하면 사겠다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널려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낮은 가격은 아니지만, 지혁의 곡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것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비싸다고는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성공해서 유명 아이돌이 될 경우에 저의 요청에 따라 무언가를 해주셔야 합니다. 자주 부르지도 않을 거며, 대단한 요구도 아닐 겁니다. 잠깐 제가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에 까메오로 출연을 해달라거나. 그 정도가 다일 거에요. 정당하지 않은 요구라면 거절하셔도 되고, 일한 만큼 출연료 같은 건 당연히 지급 될겁니다.”

머릿속에선 이미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지혁은 그들의 인기를 가정하고 얘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지만, 지혁은 이 점을 확고히 하기를 원했다. 꽤 중요한 조항인 셈이었다.

“그 정도야 당연히 괜찮습니다.”

이호준 대표가 시원시원하게 답하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일단 여러분들이 감수해야할 조건은 이 정도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혜택을 설명드리도록 하죠.”

혜택?

대표와 지혁의 대화를 앉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여인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지혁은 곧장 말했다.

“일단 여러분들의 데뷔에 맞춰서 제가 생일날의 너에게의 모든 곡들을 작업했다는 사실을 알릴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게 드린 곡도 제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그건 아이펜에서도 이루어 질거고 간단한 홍보도 해 드리죠. 캘린더 시스템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곳에 제 곡을 받은 여러분들의 컴백일자와 장소 등을 간략하게 표기해드리겠습니다. 아마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팍팍 밀어주는게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제 소설 창연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제작중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OST 하나를 맡게 될 거고 여주인공 창소이를 맡은 한예리 씨와 개인적인 친분이 좀 있는데, 그분이랑 얘기해서 예능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하는 식으로 진행을 해보겠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혁이 한예리나 박진형한테 부탁한다면 그들은 거절하지 않을 터였다. 아마 어떤 방식으로든 방법을 찾겠지.

“이야기는 이상입니다. 혹시 질문 있으실까요?”

폭풍처럼 쏟아진 지혁의 말에 압도된 것일까. 넷은 그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저어보였다.

꼭 아이돌 육성 게임 같은 것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혁은 그들의 멍청한 반응에 슬며시 웃었다.

리플라워라는 그룹이 어떻게 커갈지, 사뭇 기대가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