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히트 =========================================================================
홍창식쯤 되는 만화가면 개별적인 공간이라도 주어지는 걸까.
그를 따라 들어간 공간은 조용했다. 물론 주위의 소란은 들려오고 있지만 최소한 그들이 있는 공간은 고요한 편이었다. 지혁은 그를 따라 들어가서 남자 한명을 볼 수 있었다.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쯤 되어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냥 홍창식과 연배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홍창식은 남자의 옆에 서더니 곧장 말했다.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이정욱 작가님입니다. 대표작으로는….”
…?
“신들의… 전쟁?”
지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홍창식이 말을 멈추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는 군요. 하긴, 제 작품도 보실 정도라면 신들의 전쟁은 당연히 보시겠죠.”
“네.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그는 지혁이 반말을 했음에도 별로 개의치않는 기색이었다. 지혁도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을 뿐이었기에 얼른 수습했다.
사실 만화를 보는 독자라고 해서 만화가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모르는 쪽이 더 많을 터였다. 당연하다. 만화에 만화가의 얼굴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독자는 그저 재미있게 웹툰을 즐기고 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지혁도 이정욱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나랑 보기 위해서 사인회를 잠깐 연기한 건 아니겠지….’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정황이 너무 확실하다. 어찌되었든 그의 사인을 받지 못해서 내심 실망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쪽은… 말씀드렸듯 조커 유 님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신들의 전쟁은 홍창식의 연풍이 연재되는 플랫폼에서 1위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정욱은 내는 작품마다 최소 히트를 칠 정도의 거장인데 그가 이렇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민망하기는 하다.
“아… 예.”
지혁은 떠름하게 답하며 그가 건네는 악수를 받았다. 지혁과 손을 마주잡은 그는 다소 심하게 감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지혁은 맞잡은 손이 떨어지자마자 말했다.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사인회가 연기되었다고 되있길래 실망했었는데.”
“아… 제 사인을요? 혹시 제 부스에 가셨었나요?”
지혁이 탈을 쓴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도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저도 홍가인을 그려주셨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저는 이태곤 그려주십시오.”
지혁은 신들의 전쟁의 주인공을 그려달라 요청한 뒤에 홍창식이 건네는 종이와 펜을 받아서 사인을 시작했다. 그저 흑색 선으로만 그려내는 것이지만 굳이 채색을 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그림 정도가 되었을 때쯤 지혁의 손이 멎었다.
“감사합니다.”
…저건 어디서 났대?
지혁의 사인을 받아든 이정욱은 연갈색의 액자를 집어들더니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지혁의 사인을 모셨(?)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지혁은 매고 있던 가방을 옆으로 돌려 파일철을 꺼낸 뒤에 그의 사인을 조심스럽게 넣고 닫았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우리가 그렇게 사인을 주고받는 사이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는 것 같던 홍창식이 물어왔다. 지혁은 순순히 답하며 그의 안내에 따라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홍창식이 이정욱에게 녹차 먹을거냐 커피 먹을거냐를 물었고, 그는 커피라고 답했다. 그리고 홍창식이 지혁을 쳐다보았고, 무언의 질문에 지혁은 녹차를 달라고 했다.
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종이컵을 지혁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는 사과해왔다.
“죄송합니다. 미리 준비를 해뒀어야 하는건데. 정신이 없었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잘 마실게요.”
지혁은 종이컵을 들어 올려 녹차를 한모금 머금었다. 이거 의외로 맛있는데?
“저를 부르신 건 이정욱 작가님 때문이었나요?”
“네? 아, 네. 맞습니다.”
그가 사인을 요구했냐는 의미에서 물어본 것인데, 그들은 뭔가 추가로 할말이 있는 것 같았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지혁의 물음에 대답한 홍창식이 이정욱을 힐끔 쳐다보더니 팔꿈치로 그의 팔을 툭툭 치는 것이 보였다.
“아 사실은… 저희는 오래전부터 같이 만화를 그려온 사이입니다. 10년이 넘었죠.”
허물없는 사이인 것 같아 보이기는 했다. 승현과 지혁의 사이같은 느낌? 아니 그보다도 더 끈끈한 것 같다.
여하튼 뜬금없는 말인 것은 사실이었다. 지혁은 그게 어쨌냐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기에.
“만화를 그려온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저희는 만화에 미친놈들인 거죠. 그렇게 만화를 그려오면서 다른 사람들의 작품도 많이 봐왔습니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만화계의 흐름도 빠르게 바뀌어가고, 그에 적응하고 도태되지 않으려면 현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끄는 만화가 무엇인지 알아야한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바람직한 마인드라고 본다.
이정욱은 십몇년 전부터 성공을 거둔 케이스였다. 초창기부터 잘 풀린 경우. 그때 한 번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을 때에도 다른 사람의 작품을 세세하게 관찰하면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는 자세를 관철해 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가 최정상의 자리에 있는 것일 터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 시대를 주도하는 것은 조커 유 작가님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겠죠. 이미 작가님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지만, 조커 유의 진가는 지금까지의 것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별다른 긍정의 언행을 하지는 않았으나 지혁은 그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저 시험작에 불과했던 생일날의 너에게가 공개된 이후 보였던 파급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는가. 자만은 금물이나 자기 자신의 실력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꼭 뵙고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뭔가 장황하게 말을 한 것 치고는 마무리가 싱겁다?
지혁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때 홍창식이 이정욱을 째려보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진짜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겨버린 것을 질책하는 기색이었다.
“저… 사실은 말이죠.”
할 수 없다는 듯이 홍창식이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지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저희는 작가님의 소설 미니게임천국을 만화로 그려보고 싶습니다.”
미니게임천국?
‘아하….’
그들의 목적은 아무래도 미니게임천국이었던 모양이었다.
미니게임천국의 인기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소설계에서 미니게임천국이 가지는 팬덤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뒤를 ‘왕(王)’이나 ‘생일날의 너에게(소설 버전)’ 등이 바짝 추격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생각되는 미니게임천국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 3부가 끝나려면 1년은 더 있어야 하기도 하고.
작품성으로 따지자면 왕이 더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만 인기를 결정하는 요소가 그저 잘 쓰여진 작품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어떤 타이밍에 세상에 나왔는가, 어떤 시대에 그 작품이 흥행하고 있는가. 무엇이 더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가. 사람이 태어나고 성인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환경에 큰 영향을 받듯,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하여 소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결정하는 것이다.
글을 읽고 재미를 느끼고 열광하는 것은 결국 독자이기에, 작품을 내놓는 것은 작가이나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가 되는 것. 지혁은 그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었다.
“혹시 연락을 주셨었나요?”
“네? 네. 하지만 연락이 닿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비단 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이펜이 핫한 키워드로 떠오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각종 매체와 플랫폼 등에서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다는 것은 지혁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저 모든 측면에서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가신 일로 번져나가지 않은 것일 뿐 그와 공동작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의 작품을 2차적인 창작물로 제작하고 싶어 하는 인물들, 지혁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사람들 등등 지혁에 무언가를 원하는 이들은 넘쳐난다.
허나 소통창구라고 할 수 있는 문의 시스템은 유명무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올라오는 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지혁이 일일이 다 확인을 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너무 많은 요청들이 있어서 전부 확인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들도 지혁만큼은 아니지만 한 인기를 누려온 사람들이다. 비교적 지혁의 입장을 잘 이해해줄만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행히 성품도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양해를 구하는 과정이 끝나자 지혁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음… 미니게임천국을 만화로요….”
생각보다 괜찮은 제안이라서 더 당황스럽다. 이건 NG의 강호산이 요구했던 조건과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 있는 문제였다. 그는 지혁이 얻어야할 정당한 수익을 같이 나눠서 챙기기를 원했으나, 이들은 지혁의 작품을 추가로 제작해서 얻는 이득의 일부를 그들이 갖고, 일부는 지혁이 갖는 형태를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한마디로 지혁은 가만히 있는 상태로 그들이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얻어내는 결과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지혁의 작품을 내어주는 형태가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야.’
지혁은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의 기세에 휩쓸려서 덜컥 결정하기 보다는 일단 대답을 보류하고 고심을 한 뒤에 그들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저희는 방금 전까지 이를 놓고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홍창식이 갑자기 말했다. 지혁이 그를 쳐다보자 그는 지혁을 마주보면서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가 손가락을 뻗어서 액자에 보관되어있는 지혁의 사인을 가리켰다.
“아까 작가님의 그림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오랫동안 그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그림을 봐왔고, 제 자신의 실력에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밥 먹고 해온짓이 그런거라 당연한 일이죠.”
그는 액자 속의 홍가인을 바라보면서 지긋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만화가입니다. 작가님께서 웹툰 생일날의 너에게를 그린 장본인이라는 것은 그저 이 데생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액자의 유리부분을 슥슥 쓰다듬고 있었다. 지혁의 입장에서는 그저 10초 정도만에 그려낸 그림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감정은 아니었다. 지혁 역시 누군가의 작품에 매료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아이펜 홈페이지의 문의나 출판사로 직접 전화를 해보는 등등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었으나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혁은 그에 관해서 할 말이 없었다.
말했듯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불가항력. 문의시스템이 무명무실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로 지혁에게 쇄도하는 러브콜의 숫자는 엄청난 수준이다. 지혁이 그것을 일일이 다 확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죄송합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접촉을 해오는지라 저로써는….”
“아뇨아뇨. 그러지 마십시오. 책망하려고 꺼낸 말이 아닙니다.”
지혁이 사과하자 홍창식은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지혁은 말을 멈췄다.
“어쨌든… 그때는 저희가 몰랐기 때문입니다. 소설로써 정점에 오른 사람이 그림조차 20년을 넘게 그려온 저희를 뛰어넘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접근이 가능했었습니다. 생일날의 너에게를 그린 작가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도 좋은 만화를 그려낼 수 있다는 식의 어필을 할 생각이었죠.”
지혁은 이제 그의 의중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이해한 내용을 홍창식이 그대로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을 보자마자 작가님이 웹툰을 그린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받았던 충격은 차치하고서라도, 저희는 그런 제안을 선뜻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작가님께서 쓰신 소설을 전부 만화로 직접 제작할 의사가 있으시거나, 아니면 이미 제작을 해둔 상태인 것이라면… 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미니게임천국을 욕심냈다는 뜻일 터였다.
“혹시 결례였다면 사죄드립니다.”
두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여오는 것을 보고 있던 지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다.’
즉흥적인 선택이기는 하지만 추후에도 후회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의 진솔한 태도에서 지혁은 만화라는 것에 대한 마음가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설령 작품의 퀄리티가 지혁이 만족할만한 정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문제없다. 이들이라면 지혁이 반려한다고 하더라도 불쾌해하지도 않을 듯 하고, 지혁이 그들에게 만화에 대해서 가르침을 준다고 하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혁은 그들의 제안에 대한 호오(好惡)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마음에 들어버렸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하죠.”
“예?”
그들의 사과에 지혁이 동문서답하자 그들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 보였다. 약간은 멍청하게 보이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으나 지혁은 꾹 참으며 말했다.
“하자구요. 미니게임천국을 만화로 만드시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