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히트 =========================================================================
다음날.
‘오랜만이네.’
지혁은 해가 쨍쨍한 오전부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차현진이 운전기사를 자처하고 난 뒤로 지혁은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간 그녀를 얼마나 부려먹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월급을 지불하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이런 일요일에는 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원래였다면 같이 데이트나 하는 느낌으로 갔겠지만 어젯밤에 급하게 결정한 일이라서 그럴 틈도 없었다. 전화를 하면 되는 것이지만 일요일이니만큼 그녀도 푹 쉬고 있을 터였다. 지혁은 오전에 잠깐 만화축제 행사에 들렀다가 오후부터 그녀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
주변의 시선이 은근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몇 달간 계속해서 봐왔더니 면역력이 생겨버렸다.
‘갈때는 그냥 택시타자.’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돈을 지불하고 내린 지혁은 3분 정도를 걸어서 핸드폰 지도가 가리키고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대되는데?”
천막으로 된 부스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사람들도 많았다. 만화축제의 마지막 날. 지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서 천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야?’
탈이나 가면 같은 것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일종의 코스프레 가게인 것 같았다. 광선검 같은 것과 스티커 등등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지혁이 잠깐 고민을 하고 있는데, 광대 가면이 보였다. 붉은 입술에 하얀색 피부. 복슬복슬한 초록색의 머리칼까지.
“이거 하나 주세요.”
지혁은 가면을 구입해서 곧장 착용했다. 그러자 은연중에 쏠리던 시선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혁은 착용감에 흡족함을 느끼면서 이동을 시작했다.
‘오.’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지혁은 즉시 부스로 들어가보았다. 사인회가 한창인 내부엔 그의 목표인 작가가 한명 있었다.
[ 연풍 - 홍창식 ]
개인적으로 재밌게 보고 있는 만화였다. 작가님이 이런 40대 아저씨일 줄은 몰랐으나,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다.
‘사인 받아야지’
지혁은 줄에 섰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다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혁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류은화 그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연풍은 사극만화인데, 류은화는 다름아닌 주인공이었다. 앞서 사인을 받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요청한 것인데, 홍창식 작가님은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곧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그의 손놀림이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지혁은 룸에서 혼자 만화를 그려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지혁은 만화를 좋아만 할 뿐, 직접 그려본 경험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만화를 그리는 것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와 잘 그리시네요.”
“아,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성함이…?”
빠른 속도로 얼굴이 완성되어 가는 것에 그렇게 말하자, 그가 감사하며 물어왔다. 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줄이 ㄹ자의 형식으로 서게 되어있고, 대열에서 살짝 떨어져있는 것이라서 작게 말하면 뒤에는 들리지 않을 듯 했다.
“조커 유라고 써주십시오.”
“아, 네. 조커….”
거의 완성된 그림의 왼쪽편에 영어로 ‘To.’ 이라고 적으며 가볍게 답하던 홍창식이 손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뭐라고요?”
“조커 유요. 영어로 써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J랑 U는 대문자로 써주시고, 조커의 r이랑 U 사이에는 살짝 띄워 써주세요.”
지혁이 그렇게 말하자 그는 반신반의하는 기색으로 물어왔다.
“혹시 제가 아는 그… 맞나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몰래 온 거라서.”
그가 믿든 말든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지혁이 조커 유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는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서 사인을 완성해냈고, 지혁은 잘 받았다.
“연풍 잘 보고 있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사인을 잘 갈무리해서 가방에 넣은 뒤 부스를 빠져나왔다.
“자, 잠깐….”
뒤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착각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만화축제의 규모는 컸다. 단순히 유명 웹툰작가들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공연이나 이벤트, 코스프레 등등 다양한 컨텐츠가 자리잡고 있었다.
‘저건 뭐지?’
그때 지혁의 눈을 사로잡는게 있었다. 다름 아닌 타블렛이었다. 만화를 한 번 그려보라는 의미에서 전시를 해둔 것 같았다.
지혁은 호기심에 타블렛으로 다가가서 펜을 잡았다.
콘티 등을 짜거나 할 때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스케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각잡고 채색까지 하려고 드는 것은 좀 오랜만이여서 왠지 느낌이 생소했다.
‘뭘 그릴까…?’
펜을 잡고 잠깐 고민하고 있던 지혁은 그냥 무난하게 홍가인을 그리기로 했다.
거침없이 펜을 놀린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만에 영화에서 보던 홍가인의 모습이 선만으로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그녀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지혁은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채색을 시작했다. 저고리는 하얀색으로, 치마는 연한 분홍색으로 칠하고서 배경작업을 시작했다.
애당초 바닷가에서 바람이 불어 그녀의 밀짚모자가 날아간다는 설정으로 그릴 계획을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에 작업은 취지에 걸맞게 진행되었다. 햇빛이 짱짱한 날씨를 재현했고, 푸른 하늘 아래 하얀 구름도 몇 개 그려 넣었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부는 바람에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짓는 것은 덤.
만약 작중의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이런 밝은 모습으로 웃었을 것이다.
‘괜찮군.’
전체적인 작업은 3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지혁은 작품을 완성하고서 슬며시 펜을 내려놓았다. 몇 달간 손을 놓았더니 감을 잃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다. 오히려 쉬는 사이에도 솜씨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큼.”
왠지 민망해진 지혁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그들을 헤치고 자리를 떴다.
“자, 잠깐만요….”
그때, 지혁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작가님.”
별로 뛰지도 않았는데 그는 저질체력인지 숨을 헐떡였다. 지혁은 가만히 서서 홍창식이 숨을 고르도록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저, 저도 사인좀 해주세요.”
“어… 네. 근데 저쪽으로 가서 해도 될까요?”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지혁은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근데 의심도 안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조커 유라고 말했는데 덥썩 믿는단 말인가? 지혁은 그런 의문이 생겨서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물었다.
“근데 혹시 의심은 안가세요?”
“네? 아, 작가님이 조커 유 본인이 맞는지요?”
“네.”
지혁의 말에 그는 간단히 답했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림 그리시는거. 그거 보고 확신을 가졌어요.”
대중들에게 조커 유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해도 소설가로 나온다. 물론 대외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음모론도 많았다. 사실은 조커 유가 그림도 잘 그려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니냐는 식.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에 지혁은 그것을 보며 뜨끔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웹툰이 아니라 영상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는 쏙 들어갔다.
‘웹툰을 내가 그렸다고 생각해왔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인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혹시 홍가인을 그려주실 수 있을까요?”
지혁은 수락했다. 그가 펜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10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만에 홍가인이 탄생했다. 그는 그 옆에다가 'Joker U'를 날려서 쓴 뒤에, To. 홍창식 이라고도 써놓았다.
“감사합니다.”
사인이 끝나고 건네주자 그는 정말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지혁은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혹시 제 작품을 보셨나요?”
“그럼요. 영화는 물론이고 웹툰, 그리고 나오는 소설들도 빠짐없이 다 챙겨보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팬이라는 건가. 지혁은 왠지 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저… 혹시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음… 그냥 둘러볼 생각에 있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홍창식은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그럼 나중에 가실 때 제 부스에 다시 한 번만 더 들러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지혁은 수락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렇게 홍창식과의 만남이 끝나고 지혁은 축제를 계속해서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다보니까 만화책을 판매하는 코너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고 싶지만, 가방이 무거워지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이거 하나만 사자.’
안 그래도 아까 종이에 사인을 받은 것이 좀 별로였는데, 다행히 연풍을 판매하고 있었다. 지혁은 그것만 구입하고서 다른 곳을 찾았다.
‘맛있다.’
가다보니 길거리 음식을 파는 푸드트럭 같은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꼬치구이를 구매했다. 그렇게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서는 전시회, 박물관 등을 거쳐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혁은 그 과정에서 세 명에게 더 사인을 받았다. 두 명은 그냥 사칭이겠거니 생각하고 마는 것 같았고 한 명은 살짝 의심하는 것 같았지만 지혁이 별다른 말없이 사인만 받고 물러나자 홍창식처럼 따라오지는 않았다.
‘이건 뭐야?’
[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정욱 작가님의 사인회는 오후로 연기되었습니다. ]
“아 뭐야.”
“광주에서 왔는데.”
지혁이 만화축제에 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였던 ‘신들의 전쟁’의 이정욱이 없었다. 제일 기대했었는데. 지혁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고문을 보고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아….”
오후까지 있을 수는 없다.
지혁은 탄식을 내지르면서 아쉬움을 뒤로한채 물러났다.
‘이제 슬슬 갈까?’
대충 다 돌아본 것 같다. 축제를 뒤로하고 가려던 지혁은 문뜩 아까 홍창식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선선히 대답했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좀 귀찮다.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잠깐사이 이렇게 변하곤 한다.
그러나 약속했으니까 가기로 한다.
부스에 도착한 지혁은 왠지 아까와는 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내부에 보이는 사람도 없었고 입구쪽에 스탭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지혁은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자 스탭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그를 제지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잠깐….”
“아뇨아뇨. 이분은 괜찮아요.”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에 홍창식이 끼어들었다. 스탭은 그의 행동에 지혁을 막아서던 것을 멈추고 물러났고, 홍창식은 지혁을 데리고 내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