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히트 =========================================================================
“어….”
NG.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전자, 화학, 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 뿌리내려져 있는 굴지의 대기업이다. 대한민국 제일의 기업을 꼽으라고 하면 누구나 진성을 꼽겠지만, NG 역시 위대한 그룹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이 NG 그룹 회장이라고?’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박진형과 지혁이 이런 것으로 장난치고 그럴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마 이 노인은 틀림없이 NG그룹의 회장일 것이다.
“앉으시죠.”
강호산은 박진형의 안내를 받고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그런 그의 뒤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 한명이 양손을 모으고 조용히 시립했다.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지혁이 멀뚱멀뚱 서 있자, 박진형이 그에게 권유했고 지혁은 그제야 천천히 걸어와 앉았다.
‘…….’
재벌가의 회장이라서 그런 걸까,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진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권태로움 속의 여유. NG라는 단어의 상징성 때문인지 지혁은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쪽 용건 먼저 끝내지.”
“네. 회장님. 그… 제작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지혁은 박진형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저는 작업해야할 것이 많아서 드라마의 제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여유가 못됩니다. 그래서 제작은 NBC에서 자체적으로 했으면 합니다. 그쪽에 그렇게 전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한예리 씨의 연기지도는 계속하겠습니다.”
창소이 역에 한예리를 뽑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지혁은 한예리를 가르쳐줄 생각은 있으나, 그녀를 책임져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지혁과는 다르게 애당초 한예리를 여주로 찜하고 있는 그들이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변심하여 다른 배우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원작자로써 거기에 끼어들어서 중재를 해줄 생각은 없다.
그렇게 이야기는 싱겁게 끝났다. 사실 박진형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면 이런저런 사담부터 시작해서 이야기가 길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석에 앉아있는 노인 때문에 그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나?”
“네 회장님.”
자연스러운 하대. 그러나 박진형은 물론이고 지혁 역시 그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은 없었다. 박진형이 대답하는 것과 별개로 지혁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그저 앉아있었다.
박진형을 보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강호산이 찾아온 것은 지혁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이제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보지.”
지금까지는 뭐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였다는 뜻일까. 지혁은 그를 쳐다보는 강호산의 잔잔한 눈동자를 쳐다보았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요즘 세상 참 좋아졌지.”
흔한 이야기였다. TV만 보던 시절에서 미디어가 다양화되기 시작하며 그의 회사인 NG는 통신 서비스 부문에도 뛰어들었다는 스토리. 영화 배급사도 보유하고 있으며, IPTV 사업에도 뛰어들었다는 식의 이야기.
지혁이 이사한 집의 TV 역시 NG U+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았다.
‘…….’
지혁은 그가 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생일날의 너에게가 세상에 알려지고 최근에 아이펜이 보이는 미디어 점유율은 엄청난 수준이다. 하루 접속자 수만 100만을 우습게 넘기는 수준이고, 그건 외국을 제외하고 국내만으로 한정했을때의 수치다. 또한 아직 많은 컨텐츠를 공개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혁이 하루 사이 벌어들이는 돈은 100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실정. 실제로 아이펜 때문에 전체적인 시청률, 시청자수 등이 하락했다는 뉴스기사도 본 적이 있었다.
당장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사무실의 규모도 초라하다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것 치고는 성장세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아이펜이 있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생일날의 너에게’는 지혁이 만든 3개의 작품 중 시범작일 뿐이다.
지혁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봐도 무방한데다가, 이쪽 시장에서는 미증유(未曾有)의 거력(巨力)을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사정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야 지혁 이외에 아무도 없다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팩트들만 짚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아이펜이라는 존재가 한국 미디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적어도 지혁 본인은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목적이야 빤하다. 강호산은 지혁에게 사업 제휴를 제안하기 위해 이러한 자리를 만든 것 같았다. 이 자리는 지금의 NG를 일구고 이끈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가 직접 일선에 나설 정도로 이 사안을 중대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반드시 그것을 성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강호산은 말을 끝내고서는 지혁을 쳐다보았다.
“…어찌 생각하나?”
“그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지혁이 역으로 반문하자, 강호산은 멈칫하는 것 같더니 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그 고압적인 태도에 기분이 나빴지만 지혁은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이 자리를 어떻게 만드셨는지요?”
지혁과 박진형의 접점을 어찌 알았을까. 강호산이 지혁을 노리고 온 것은 분명하다. 지혁은 거기까지 도달한 경위가 궁금했다.
지혁의 질문에 강호산은 말없이 박진형을 쳐다보았다. 대신 답해주라는 뜻 같았다.
“아. 그것은… 아마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작가님이 정체를 꼭꼭 숨기신 것도 아니시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지금까지는 누군가가 직접적으로 접촉을 해온 적이 없었다.
‘간을 보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생일날의 너에게가 계기가 되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고 보자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그들이 하나 둘 발을 뻗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혁은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그들끼리 각축적은 벌이다가 NG의 등장으로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군요.”
납득했다는 듯이 대답한 지혁은 생각에 잠겼다.
금전적인 부분만 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는 생각한다.
당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인터넷상에서 깡패와도 같은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이 낼 수 있는 수익의 전부라고는 볼 수 없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인터넷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물론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고 TV에만 붙어사는 사람도 더러 존재한다. 지혁이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고착화되는 방식으로 운영을 해나간다면 그들은 어쩌면 평생동안 지혁의 고객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않은데, 나쁘지만은 않다 정도이기에 문제였다. 그것도 심지어 금전적인 부분만 따지고 봤을 때의 평가다.
굳이?
지혁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협업을 하게 된다는 것은 수익은 나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NG에서 지혁의 작품들을 서비스하게 된다는 것은, 거기서 지혁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지급한 돈을 NG와 지혁이 나누어갖는다는 것에 있었다.
앞서 말했던 부분들만이 적용된다고 하면 당연히 이득이다. 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수익을 내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요소였다. 허나 NG와의 콜라보가 이루어질 경우 아이펜을 통해서 결제를 했어야할 사람들 역시 NG의 시스템을 이용해서 결제를 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럼 기존의 고객들이 지혁에게 지불해야했을 돈을 NG에게 떼어주는 결과가 될 가능성도 있다.
‘…….’
강호산이라고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그는 직접 이 자리에 왔고, 그건 그만큼 설득이 힘들 거라고 전망했다는 뜻이다.
“NG와 힘을 합친다면, 내가 뒤를 봐줄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 어떤가?”
지혁이 고민하는 기색이자 강호산이 선심쓴다는 듯 덧붙여왔다.
아이펜은 지금도 충분히 잘 나가고 있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궁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다. 홈페이지가 공격받을 일도 없다고 보고 있고.
또한 지혁은 돈이 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많이 벌고 있다는 쪽이다. 그런 지혁에게 있어서 이 제안은 잘 풀려도 반반 정도의 결과밖에 도출해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이펜의 고객들이 NG의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봐주는 경우.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타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왜? 지혁은 아이펜에서만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상징성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강호산의 제안은 지혁에게는 계륵(鷄肋)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확실하게 많은 이득을 챙겨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협업이라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 수도 있다. 헌데 그와의 협동사업이 무조건적인 이득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아무리 지혁이 어리다지만 제안을 하러온 대상에게 초면부터 반말을 지껄이는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호산같은 권위적인 인물과 사업을 하게되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다. 물론 그가 유하게 나왔다고 하더라도 수락하지는 않았겠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린 지혁은 입을 열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지혁이 거절한 순간, 놀란 것은 강호산이 아니라 박진형이었다. 지혁이 그저 아 이 사람이 NG의 회장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바짝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는 아마도 NG의 회장이라는 이름값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지혁 역시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이상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지혁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젊어서 보이는 호기, 패기 등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가진 재능의 힘을 믿는다.
“…이유를 듣고 싶군.”
강호산은 지혁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 같아보였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랬는데, 그는 잠깐 침묵하다가 물어왔다. 그것에서 지혁은 그가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내심 놀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아이펜이 제 작품을 독점으로 서비스하는 창구로써 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금이 모였다 싶을 때쯤 빠르게 만든 것도 있죠. 저는 저만의 왕국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NG 회장? 확실히 듣기만 해도 움찔하게 되는 직위다.
그러나 지혁은 호구로 살지 않기로 했다. 만약 차현진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계산이 섰음에도 불구하고 수락했을지도 모른다. 유약한 마음을 품고서 위세에 눌려 그의 노력으로 인해 얻어낸 값진 결과물을 다른 이와 공유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했을 거라는 것이다.
떨리기는 한다. 다리가 부들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지혁이 이렇게 거절했을 때, 강호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이 되질 않았다. 어쩌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각종 더러운 짓을 동원해서 지혁과 아이펜을 괴롭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 지혁 역시 가만히 당해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약한 투쟁심이 생긴다.
그저 지혁의 상상, 가정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전개가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강호산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분노가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지혁이 가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상대의 치졸한 수에 대응하고 그들을 짓누를 것이다.
지혁의 머릿속에선 이미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하여, 승자로써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까지 전개가 되어 있었다.
강호산이 박진형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려서 성공했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건가? 맹랑하구만.”
“…….”
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를 쳐다보던 강호산이 말했다.
“NG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군. 이 한국에서, NG그룹의 회장인 나를 거스르고 사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
지혁은 자신있게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려는 것을 참았다. 괜한 도발을 해서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지.”
강호산은 집요했다. 니 까짓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도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혁은 다시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