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히트 =========================================================================
지혁이 커피를 받아서 자리로 가자 차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커피를 받아들었다. 아직 그녀의 태도가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꼭 상전 대하는 듯한 모습이다.
차현진은 노트북을 세팅해두고 있었다. 지혁은 그의 계정으로 로그인을 한 다음 그녀와 함께 홈페이지의 상태를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소설은 순항 중이었다. 연재를 하는 도중인 작품들도 그렇지만 완결된 작품들 역시 빠르게 조회수가 상승하는 중이었다. 특히 미니게임천국 1,2부는 초콜릿페이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일날의 너에게를 통해서 홈페이지에 유입된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미니게임천국이 많은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이게 그렇게 재밌나?’
지혁의 취향은 약간 묵직하고 진중한 타입의 글이다. 미니게임천국은 손이 가는대로 가볍게 쓴 느낌이 강하고, 그냥저냥 시간을 때우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평이라는 건 또 다른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미니게임천국은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음원을 듣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네요.”
“네. 다운 받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혁은 생일날의 너에게의 OST, 사운드트랙 등의 모든 곡을 홈페이지에 게재했을 뿐만 아니라 무료로 다운이 가능하도록 설정을 해두었다. 유일하게 공짜로 이용이 가능한 컨텐츠인 셈이었다. 물론 룸에서 만든 모든 곡들을 무료로 공개할 생각은 없다.
“저, 선생님.”
그때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지혁은 고개를 들었다.
“어? 임유선 씨?”
“안녕하세요.”
녹음을 끝내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서 있었고, 지혁은 마주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요.”
대화가 끊겼다. 사실 그녀와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지라 원활하게 대화가 흘러갈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차현진과의 업무를 가장한 데이트 중이기도 했었고.
“그래요. 아, 그리고 제가 입금한 돈은 확인해 보셨나요?”
성우들마다 페이의 차이는 존재한다. 임유선은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인 홍가인을 맡았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많은 금액을 받게된다. 지혁이 그녀에게 약속한 금액은 ‘천만원 [email protected]’. 여기서 말하는 알파(@)는 판매량에 따른 지분율이었다.
지혁이 기억하기로 그녀의 비율은 0.1%였다.
생일날의 너에게가 세상에 공개된지 일주일이 되었다. 정확히는 오늘이 8일째인데, 지혁은 어제까지의 판매실적을 합산한 데이트를 보유중이었다. 그동안 생일날의 너에게의 판매실적은 1370만. 첫 날에 150만개 정도가 팔렸는데, 일주일의 마지막날인 어제 270만 정도를 기록했던 것이다. 갑자기 확 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판매량은 착실하게 숫자를 불려나가는 중이었다.
생일날의 너에게는 구입가가 2천원으로 책정되었으므로 단순 계산을 할 경우 어제까지 생일날의 너에게를 판매하여 벌어들인 돈은 274억. 그것의 0.1%면 무려 2740만원이다. 지혁이 그녀를 완숙한 성우로 키워낸 것까지 감안하면 이건 결코 적은 액수라고 볼 수 없었다. 지혁은 녹음이 끝났을 무렵에 성우들에게 천만원씩을 입금해주었고, 어제 2740만원을 정산해서 그들에게 지불하는 과정을 거쳤다.
“네.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돈이 들어올 겁니다.”
“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혁이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왠 여성들이 그녀에게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혹시 홍가인 녹음하신 성우 아니신가요?”
“네? 아, 네….”
“꺅! 저 팬이에요. 사인좀 해주세요.”
지혁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납득했다. 판매량을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현상도 아니었다. 1370만 중에서 340만은 국내에서 이뤄낸 실적인 것이다.
비록 2천원이지만 그 금액의 대부분이 지혁에게 꽂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영화의 관객수처럼 생각해도 큰 문제는 없는 수준이었다. 생일날의 너에게는 이미 어마어마한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유선이 당황한 얼굴로 지혁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허락을 받는 것 같아보여서 지혁은 사인해주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그녀와 더 할말도 없었다.
“저기로 가서 해드릴게요.”
그렇게 임유선이 물러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혁은 다시 차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인기가 많네요.”
“다 선생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은 못하겠다. 아무리 그녀가 성우를 담당해주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생일날의 너에게가 이 정도의 인기를 얻게된 것은 임유선이라는 성우의 실력때문이 아니라, 지혁이 만들어낸 작품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니까.
‘왠지 좀 부럽기는 하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모습을 보니 부러움이 밀려온다.
임유선의 자리는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소문이 퍼진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그만큼 그녀를 많이 알아본 것인지 사인을 받으려고 줄까지 서있을 정도. 그녀는 친구들이라고 생각되는 여성들과 같이 앉아있었는데, 밀려드는 주문을 받느라 쩔쩔매는 중이었다. 심지어는 카페의 직원들조차 그녀의 사인을 받기 위해서 늘어선 줄에 대기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
“집중하시죠.”
잠시 그것을 보고 있던 지혁은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 *
“안녕하세요.”
지혁은 박진형의 JHP 사옥을 찾았다. 한예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편한 복장을 입고서 대기하고 있다가 지혁을 보고는 깍듯이 인사했다.
“바로 시작해볼까요?”
“아, 네!”
지혁은 곧장 미리 뽑아온 대본을 펼쳐보았다.
얼마 전, 지혁은 룸에 다녀왔다. 소설의 형식으로 되어있는 창연화를 시나리오로 바꾸는 작업을 함과 동시에, 한예리에게 연기를 가르쳐줄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애당초 그쪽에 재능이 있었는지 지혁은 그리 오랜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복귀할 수 있었다. 딱 예전에 노래실력을 다지기 위해서 찾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지혁은 입고있는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본격적으로 하고자 함이었다.
“저는 대충이라는 게 없고, 한예리 씨는 이미 드라마의 주연을 3개나 맡은 배우입니다. 기본 이상을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볼 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중지시키거나, 다시 해달라는 요구를 할 생각입니다. 하루 내내 단 한 문장도 오케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각오한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인 지혁은 곧장 연습에 들어갔다.
“다시 하겠습니다.”
한예리의 실력은 딱 예상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니, 그의 예상보다 조금 더 못했다.
드라마든 영화든 장면들은 마음에 들지 못하면 다시 찍거나 많이 찍어서 최고의 장면을 뽑아낼 수 있다.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그러니 스크린에서 보이는 연기가 그 배우의 평균적인 실력이라고는 볼 수 없다. 지혁이 보았던 한예리의 연기는 편집된 것에 불과한 셈.
“아뇨. 그게 아닙니다. 잠깐 와보세요.”
20분 정도 한예리의 연기를 지켜보기만 하던 지혁은 그녀를 불렀다.
“창소이는 기본적으로 차분한 성격입니다. 말투가 안정되어 있어야 해요. 딕션에는 큰 문제가 없으신 것 같으나….”
배우는 성우와 다르다. 소리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제스처, 표정, 행동 등 많은 것들이 연기를 결정한다. 당연히 그 다양한 요소들 전부를 고려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배우다. 나아가, 실력있는 배우는 그저 단순히 완벽한 것이 아니라 ‘맛’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보는 맛이 있는 배우. 지혁은 그런 배우로써 한예리를 택하길 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예리는 노력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대중들에게서 욕을 먹은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독기마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략 6시간 정도 레슨이 진행되었으나 그녀는 그 시간동안 첨예한 모습을 보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혁이 해주는 조언 모두를 바로 수용하는 모습은 아니었으나 고민하고 연구하고 끙끙앓는 것이 가르치는 맛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성우들처럼 풀어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땀에 젖은 얼굴로 지혁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는 걷었던 소매를 다시 내리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저…. 선생님.”
어쩌다보니 지혁은 그녀를 ‘예리 씨’라고 부르고 그녀는 지혁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되어버렸다. 차현진에게 많이 들어온 호칭이라서 그런지 어색함은 없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제작 쪽에 관한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작이요?”
“네. 작가님께서 감독을 맡으실 예정인지를….”
지혁은 마이를 걸치며 말했다.
“아뇨. 저는 제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창연화의 제작에 기여하는 거라곤 예리 씨의 연기지도를 해주는게 전부일 예정이죠. 안 그래도 오늘 겸사겸사 들른 것이기도 합니다. 대표님을 만나서 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려고 했거든요.”
지혁의 말을 듣는 한예리의 표정이 애매모호했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모르겠다.
“대표님은 계실 거에요.”
“아, 제가 미리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박진형과 한예리. 그리고 지혁. 세 명이 한가한 날의 일정을 조율하다보니 오늘이었다. 아마 그는 지혁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혁은 핸드폰을 꺼내서 박진형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이제 끝났다고 하자 그는 지금 바로 내려가겠다는 말을 해왔다. 지혁은 내심 그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나 좀 막막했으므로 기다리겠다는 답변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저….”
그때 한예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선생님. 저는 어디서 기다릴까요?”
“네? …아.”
기다린다.
지혁은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달음과 동시에,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지혁은 그녀에게 연기지도를 해주고 창소이 역에 그녀를 꽂아주는 대가로 그녀를 요구했다. 그렇게 잘못 시작된 관계는 아직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혁이 원하면 언제든 자신의 몸을 내어줄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그녀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싶지만, 그만큼 창소이라는 역이 탐나고 또 지혁의 얼굴이 반반하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게 지혁의 추측이었다.
한예리는 지금, 오늘 그때와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냐고 묻고 있었다.
“아닙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때, 그런 부탁을 드렸으면 안 되었던 것인데. 죄송합니다.”
지혁은 사과했다.
강제성은 결코 없었다. 실제로 한예리는 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었다. 그러나 찝찝한 마음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충동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기는 했었지만, 여성의 몸을 사고파는 것 같은 뉘앙스의 언행 자체에 은근한 거부감이 있는 지혁으로써는 미안한 감정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 그가 한예리의 입장이었다면 초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 것인가. 지혁은 그렇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 날의 일은 그만큼 한예리라는 여성을 품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이기지 못했기에 생긴 사고.
“네? 아니….”
덜컥.
한예리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언제든 튀어올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나타났다.
그런데 나타난 박진형은 혼자가 아니었다. 중후한 인상의 장년인이 옆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그런데 이분은?”
지혁이 곧장 묻자 나타난 양복남이 손을 뻗어왔다.
“이렇게 보게되서 반갑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지혁은 그가 청한 악수를 받으면서도 건네오는 명함을 받았다.
[NG그룹 회장 강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