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히트 =========================================================================
“누나….”
“깨셨습니까?”
지혁이 손짓하자 샤워타올로 주요부위를 가린채 물을 마시고 있던 차현진이 머리를 다가왔다. 지혁은 그녀의 뒷머리에 손을 가져가서 키스를 한 뒤에 입이 떼어진 순간 말했다.
“반말하기로 했잖아요.”
“선생님도 안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할 말이 없네.
“저는 누나라고는 불렀잖아요. 그럼 누나도 ‘지혁아~’ 라고 해야죠.”
“그건….”
이번에는 할 말이 없는지, 차현진이 입을 다물었다. 지혁은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눈에 담다가 다시 손을 뻗어 뺨을 붙잡은 뒤에 입을 맞췄다.
어젯밤, 차현진은 여러번 권유했어도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지혁은 포기하지 않고 구애했고 결국 그녀의 승낙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밤은 정말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황홀한 밤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고,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은 몰랐다. 어마어마한 충족감이 밀려왔다.
그 뒤로 부둥켜 안은채 이런저런 룰을 몇 개 정한게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사적인 자리에서 지혁은 차현진을 누나라고 차현진은 지혁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서로에게 반말을 하자는 것이었다.
“저는 방금 다 씻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하루아침에 될만한 일은 아닌 것 같기는 하다. 몇 달을 이렇게 생활을 해왔으니까.
“설마… 제가 자고 있어서 드라이기 사용 안하고 있었던 건 아니죠?”
지혁은 그의 손에 닿은 그녀의 머리에 물기가 있는 것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차현진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일로 와.”
지혁이 잘 걸렸다는 듯이 손을 까닥거리며 말하자, 차현진이 순순히 다가왔다. 지혁은 그녀의 두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를 잡고 좌우로 슬슬 흔들면서 말했다.
“으이구~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하, 하지만 이건 선생님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음. 그런가?
차현진이 변명하듯 말하자 지혁은 수긍했다. 차현진이 자고 있었고 지혁이 씻고 나온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그녀가 깰까봐 드라이기를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흠…. 미안해요.”
지혁은 헛기침을 한 뒤에 사과를 하면서 동시에 이불을 걷었다. 하얀 가운 차림을 한 그는 휘적휘적 걸어서 드라이기 앞으로 가서 섰다.
“앉아봐요. 말려줄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스읍.”
지혁이 바람소리를 내면서 재촉하자, 차현진은 마지못해 그를 등지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곧장 드라이기를 켜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말려주기 시작했다.
“우리 그냥 존댓말은 계속 할까요? 이게 더 편한 것 같기도 한데.”
“저는 좋습니다.”
12살이나 많은 그녀지만 엄연히 따지면 고용주와 고용인의 입장이기도 하다. 상호존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색한 관계인 것 같지는 않았다.
지혁과는 다르게 머리가 길어서 전부 말려주는데는 시간이 좀 오래걸렸다. 지혁은 그의 기준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드라이기를 껐고, 곧장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여기 돼지국밥 두 그릇 주세요.”
“네~”
모텔을 나와서 근처 식당에서 국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차현진이 하려는 것을 대신 한 지혁은 수저를 세팅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왔기 때문에 계속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좋았다.
후루룩.
뜨끈한 국밥이 속으로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지혁은 차현진과 함께 손을 잡고 길거리를 산책하듯 걸었다.
“저… 선생님.”
“네.”
“저 이제 출근할 시간이 다 되어서….”
지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누나는 계속 저랑 있어야 해요.”
“네? 하지만….”
“제가 사장이니까 제 말을 들으셔야죠?”
이 정도 권력남용은 괜찮지 않을까. 지혁이 그렇게 말하자 차현진이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지혁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
“언제는 저의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회사일보다도 더 중요하다면서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누나가 있어줘야 컨디션 조절이 잘 될 거 같은데.”
애당초 지혁이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차현진은 항복했다.
* * *
임유선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흔한 카톡조차 하는 일이 드물었던 빌어먹을 남동생 녀석과 이름만 기억날 정도로 친분이 거의 없었던 고등학교 동창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전화기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아이펜 홈페이지에 등재되어있는 그녀의 프로필을 본 사람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녀에게 연락을 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작가님을 만난 건 축복이었어!’
아니, 정확히는 그녀를 추천해준 이승현과의 만남이 지금의 그녀를 있게한 것이리라.
“야!”
친구 둘이 임유선을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간 녹음 작업을 하느라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몇 달간 만나질 못했었다.
물론 녹음이 끝난 건 2주도 더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동안 취하지 못했던 휴식을 충분히 취했으며, 나아가 지난 몇 달간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고,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지느라 다른 것에 한눈팔 정신이 없었었다.
“오랜만이다!”
“야. 일단 들어가자.”
임유선이 활짝 웃으면서 말하자, 그녀의 친구인 혜연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카페로 이끌었다. 그녀는 다른 한 명, 김소정에게 눈짓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커피를 주문하려고 카운터로 향했다.
“나 화장실좀.”
“응? 어. 갔다와.”
임유선은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나와서 손을 씻던 그녀는 문뜩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던 여인이 거울을 통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이런 일은 꽤나 빈번하게 일어났다. 아직까지도 적응은 되지 않지만 이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임유선은 슬며시 시선을 회피하며 화장실에서 나섰다.
그 사이 커피를 받아왔는지, 주문하러 갔던 김소정과 정혜연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임유선은 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놓여있는 커피잔을 손으로 잡았다.
“정혜연. 가시나 더 예뻐졌네?”
“그, 그래?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임유선이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데 갑자기 정혜연이 핸드폰을 보면서 물었다.
“야, 빨리 말 좀 해봐. 진짜 홍가인의 녹음을 니가 한게 맞는 거야?”
“어? 어…. 프로필 봤다며?”
“안 믿기니까 글치. 이거 진짜 너 맞아?”
정혜연이 내미는 핸드폰에는 그녀의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 정보가 기입되어 있었다. 아이펜 어플로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는 성우정보창이었다.
“어.”
“진짜로? 이거 정말 너 맞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등학교때부터 지내온 둘이 이러니까 임유선은 좀 서운했다.
“이년들아. 몇 달 안 봤다고 내 얼굴 잊어먹었어?”
임유선이 강하게 쏘아붙이자 그들은 쭈그러들었다.
그들은 그 뒤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화제는 당연히 ‘생일날의 너에게’ 였다.
“그럼 그 기사가 진짜라고?”
“그래. 나를 비롯한 나머지 성우들은 전부 지망생에 불과했고, 실력도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었어. 근데 우리를 뽑아주셨고, 2달 반 정도의 시간동안 잠까지 줄여가면서 실력을 키우고 녹음작업을 진행했지. 그렇게 탄생된 거야.”
“그 작업을 담당한 사람은 조커 유가 맞아?”
“…어.”
임유선은 유지혁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혜연의 언행이 달갑지 않았지만, 가볍게 답했다.
조커 유. 유지혁은 임유선에게 있어서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유지혁교가 있다면 그녀는 분명 열렬한 신자였을 것이다. 그녀의 삶을 바꿔준 존재. 그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얼굴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생겼다.
‘…….’
어느새 깨닫고 보니,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고백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고, 지금도 못하고 있다.
조커 유, 유지혁은 그녀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리 예쁘지도 않았으며 몸매도 좋지 못하다. 스스로는 통통한 체형이라고 위로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푸짐한 살덩이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어딜봐도 그녀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깔끔히 포기하려고 해보고는 있으나 쉽지는 않았다.
“조커 유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그건… 말할 수 없어.”
딱히 그가 숨겨달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었다. 임유선은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은 꽤 진솔하게 밝히고 있었지만 조커 유에 대한 정보는 그 어떠한 것도 흘리지 않았다. 다른 성우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커 유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면 입을 꾹 닫았다.
“야. 우리한테도?”
“부모님한테도 말 안했다고.”
임유선의 말에 정혜연이 잠깐 멈칫하는 것 같다가, 곧이어 앙탈을 부렸다.
“야아~ 그러지 말고 가르쳐주라~”
“이 년이 정색하게 만드네. 죽을래?”
임유선이 그렇게 말할 때였다.
“저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까 화장실에서 만났던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짧은 단발이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혹시 홍가인… 아니신가요?”
그녀의 이름은 홍가인이 아니지만 임유선이 홍가인의 녹음을 한 것은 사실이고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정황상 모를 수가 없었다.
“아, 네….”
“팬이에요.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 사인이요? 근데 제가 사인이 없는데….”
임유선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사인같은게 없었다.
“이름이라도 써주세요.”
“아… 네.”
얼떨결에 임유선은 여인이 건넨 종이와 팬을 받아들고 이름을 쓴 뒤에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갔다.
“이야~ 연예인이네.”
“야. 우리도 사인 해줄거지?”
임유선은 왠지 모를 민망함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사래를 쳤다.
“개소리 하지 마.”
“아니, 그보다 조커 유가 어떤 사람이냐니까.”
딸랑딸랑.
금방 포기할 줄 알았는데, 정혜연은 은근히 끈질겼다. 그에 진심으로 화가 나려던 임유선은 출입구 쪽에서 들려온 종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들어온 남녀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