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마음을 깨닫다 =========================================================================
“왜, 왜 그러십니까?”
지혁은 차현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침에 집에 도착했고 자고 일어나니 저녁때였다. 방안에 내려앉은 옅은 어둠을 느끼며 일어난 지혁은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왔고,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고 있는 차현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추측컨대 퇴근하자마자 와서 저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자니,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인사를 하고 다시 요리를 집중하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지혁은 그녀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물을 꺼내서 컵에 따른 뒤에 식탁의자에 앉았다. 곧이어 물을 한모금 들이키니, 다시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국자로 찌개국물을 떠서 맛을 본 그녀는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다시 지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혁은 슬며시 눈을 피했다.
“선생님. 지금 식사하시겠습니까?”
“…….”
지혁은 그녀의 물음에 또다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차현진이 얼굴에 ‘당황’이라는 감정을 띄웠다.
그녀는 지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대체 그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더욱이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그를 대하면서도 지혁이 무언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혁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거기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찌개가 완성된 것인지 가스레인지의 불을 끈 차현진이 걱정어린 표정을 하고서 다가왔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서 옆에 내려놓은 후에 지혁을 쳐다보았다.
“팀장님.”
그녀의 시선을 느끼던 지혁이 나직하게 운을 떼자 차현진이 즉각 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술 한 잔 할까요?”
뜬금없는 지혁의 말에, 그녀는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술… 말씀이십니까?”
“네. 나가죠.”
“네? 아니, 식사 준비 다 됐….”
지혁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듯한 차현진을 뒤로한 채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복장을 차려입고 나오자 차현진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좀 있으면 은서가 올 시간이었다. 지혁은 그녀를 이끌고 집을 나선 뒤 인근의 식당에 들렀다.
까득!
주문한 소주가 나오자 지혁은 다짜고짜 까서는 양손으로 그녀의 잔에 한 잔 따라주었다. 그다음은 자신의 잔에. 차현진이 자기가 따르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는 살짝 손을 저어서 제지했다. 그는 잔을 비운 후에 안주로 나온 골뱅이를 씹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처음보는 지혁의 모습 때문인지, 차현진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그는 딴청을 피우며 물었다.
“팀장님.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답인가. 지혁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꺽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울해 보이다 갑자기 웃으니 조울증이라도 걸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가 지혁을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들으니까 기분이 좋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지혁은 다시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지난 13년의 시간, 룸에서 그는 종종 혼자 술을 마셨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너무 힘들거나 무언가를 끝냈을 때 했던 습관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다보니 이제 지혁은 주당 수준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한 병 먹어도 눈이 핑핑돌고 다음날 속을 게워내야 했지만, 지금은 서너병도 우스운 수준이었다.
지혁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술이 쌔졌다는 생각은 늘상 해오던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마실수록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선생님.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어느덧 테이블에는 술병이 3개나 올려져 있었다. 심지어 세 번째 녀석도 바닥을 보이는 모습이다. 차현진에게도 술을 따라주기는 했지만, 그녀는 몇 잔 마시지도 않았으니 지혁 혼자 두병은 마신 셈이었다. 차현진이 이렇게 우려의 목소리를 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지혁은 차현진을 쳐다보았다.
“팀장님.”
“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좋아합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차현진의 표정을 해석하면 딱 이런 것 같다.
지혁은 어제 한예리와의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TV속에서 보던 그녀 역시 그저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고, 그녀는 지혁의 예상과는 다르게 화려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와의 만남과 관계는 지혁에게 설렘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거사를 치르고 옆에서 그녀가 자고 있을 때, 지혁은 팔베개를 하고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왜 그런 것인지.
그러자 답이 나왔다.
물론 좋았다. 한예리는 예전 같았으면 말도 제대로 못 걸어보았을 여인이 아닌가.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듯 했고, 지혁 역시 그녀에게 대단한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깨달아버렸다. 지혁은 그저 예전의 자신이 동경했던 사람과의 시간을 원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그것에 취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녀와의 시간속에서 계속해서 생각났던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 제가 병문안을 갔을 때 벌어졌던 사고를 기억하시나요?”
“…네.”
지혁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크게 놀랐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차현진은 겨우 대답했다.
“그때…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던 거, 기억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닌가보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왔다.
지혁은 어젯밤 재능을 빌미로 한예리를 눕혔을 때만 하더라도, 그 순간만 하더라도 권력의 힘이 주는 짜릿함 등을 느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막상 일을 치르고 나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었다. 지혁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한예리의 경우엔 약간은 원해서 그에게 안긴 것이겠지만,
차현진은 어떨까.
그녀는 분명 지혁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딴 여자랑 하룻밤을 보낸 지혁을 밤새도록 기다리며 인근에 차를 대놓고서 쪽잠을 자고, 그가 전화를 하자마자 화들짝 깨서는 전화를 받고 차를 몰아 그를 데리러 왔다.
그 순간 지혁이 느꼈던 감정은 분노. 그녀를 함부로 대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제가 팀장님을 원합니다. 그럼 좀 욕심을 내도 괜찮지 않을까요?”
지혁은 예전의 일 이후로도 두 번 정도 차현진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노골적으로 유혹을 해올 때나 있었던 일이다. 지혁은 차라리 혼자서 위로하는 시간을 가질지언정 차현진의 몸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지혁은 알게 모르게 찝찝함을 느껴왔다. 그것은,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도 아닌 여성을 원할 때마다 취하는 행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같은 것이었다.
“그….”
“팀장님의 마음을 알고서도 한예리 씨한테 갔었던 거, 죄송합니다. 저한테 한 번의 기회를 주십시오. 팀장님께서 제 마음을 받아주신다면 다른 사람한테 한 눈 팔지 않고 팀장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괜찮다고? 글쎄, 차현진의 마음에 들어가본 적이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밤새 지혁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얼만큼 참담한 심정으로 있었을까.
“이러지 마세요. 어째서 선생님께서 저같은 여자를….”
지혁이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하자, 차현진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팀장님의 성격상, 제가 사귀자고 명령하면 군소리없이 알겠다고 하시겠죠. 그러나 저는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를 원합니다.”
차현진이 지혁에 보이는 헌신? 솔직히 말하면 그것에 기대서 편한 시간을 보내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혁은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예쁜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한예리도, 서하린도 아닌.
차현진과.
“하지만 저는….”
“조건 같은 거 따지지 말고 팀장님의 감정만으로 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팀장님이 빚에 시달리는 사람이여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여서, 제가 많은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서하린이든 한예리든, 차현진처럼 지혁만을 위해주고 지혁만을 사랑해주는 여인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래저래 흔들리기는 했었지만, 지혁은 그녀만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
그녀를… 좋아한다.
멍청하게도 그는 자기가 누굴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죄인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마음에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혁 본인이 잘못했기에 생긴 것이니 그는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기로 했다.
차현진은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제가 싫으십니까?”
“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감히. 감히라.
그녀 안에서 유지혁과 차현진의 격차는 조선시대의 왕과 궁녀만큼은 벌어져있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감히라는 단어를 사용할 리는 없을 것이다.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노력하면 달라질 것이다. 잘해주고, 사랑해주면 그녀도 마음을 점차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본다. 지혁은 그녀에게서 예전의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존감이 바닥이던 사람이었다.
“선생님.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자택에 들어가셔서….”
“아니요, 저 멀쩡해요. 누나. 저 술 세거든요.”
“…선생님.”
지혁은 끝을 보고 싶었다. 차현진에게서 꼭 긍정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녀도 그런 그의 의지를 느낀 것인지 흔들리는 동공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혁은 그렇게 말하고서 안주를 술을 한 잔 들이킨 후에 안주를 씹었다.
“…왜, 저인가요?”
그런 지혁을 관찰하듯 바라보며 한참을 침묵하던 차현진이 별안간 물어왔다.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저는 한예리 씨보다 10살이나 많고, 예쁜 것도 아니고 인기가 많은 것도, 능력이 좋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럼 누나는 왜 저희집에 오셔서 청소도 하시고, 빨래도 하시고, 부르면 달려오시고 하라는대로 전부 다 하시는 거에요?”
지혁이 그녀의 말을 끊으면서 묻자 차현진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건…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혹시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누나를 원해요. 어제처럼 마음고생 시키고 싶지 않고, 누나랑 행복하게 만나보고 싶어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오히려 지혁은 자신에게 차현진이 더 과분한 인물이라는 생각마저 하고 있을 정도였다. 대가없는 사랑. 마치 어머니의 그것처럼 차현진은 지혁에게 무한한 마음을 보여주었고, 앞으로도 보여줄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누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