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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재능-46화 (46/116)

00046  마음을 깨닫다  =========================================================================

“…뭐가요?”

지혁은 한예리의 물음에 들고있던 와인잔을 슬며시 식탁에 내려놓았다.

“저는 성우로써의 실력이 있습니다. 한때 성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연기는 다릅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실제로 연기를 해본 경험도 없습니다. 성우들을 가르칠 때의 저는 당장 그들 대신 녹음을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쪽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우와 배우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요. 두 개가 아주 다른 분야라고는 할 수 없으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시간을 투자하면 한예리 씨를 가르쳐줄만한 실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겠죠.”

이건 사실이기도 했다. 지혁은 배우로써의 삶을 상상해본 적도 없고, 추구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바쁜 사람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한예리 씨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없습니다.”

지혁은 호구가 아니다. 그의 시간을 그녀를 위해 낭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는가.

사실,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낸 감도 없지는 않다. 지혁은 말을 하고서도 입이 타는 기분을 느꼈으니.

지혁의 말이 끝나자 한예리는 슬쩍 지혁을 쳐다보더니 앉아있던 소파에서 슬며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지혁이 그에 움찔할 때, 그녀가 말했다.

“저는 작가님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해요. 현재까지 출간된 모든 소설을 전부 다 읽었죠. 오늘 나온 최신화까지 전부요.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게 보고 있는건 왕이에요.”

“…감사합니다.”

한예리가 조커 유의 팬이라고 했던 건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지혁은 대답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저는 데뷔곡부터 대박이 터져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 번 돈도 많아요.”

집만 봐도 그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최소한 100억 단위의 돈을 벌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는… 예쁘기도 하니까요. 어디가서 꿀릴 일은 없다고 생각해오곤 했어요. 돈도 많고, 인기도 많고, 예쁘…니까 모든게 완벽하다고 생각했죠.”

자기 입으로 예쁘다는 말을 하기가 좀 민망한 모양이었다. 말을 할때마다 멈칫거리던 그녀는 지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도 염치가 없지는 않아요. 무보수로 작가님같은 분께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이번엔 그녀가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저는 작가님한테 드릴게 없어요.”

“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지혁이 의문을 표하자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말했듯 저는 제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제껏 주위에서 보였던 반응도 그랬죠.”

으스대는 느낌은 조금도 없다. 그녀는 오히려 자조적인 미소마저 보이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작가님한테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능력적으로도 그렇지만 외모적인 부분으로도 제가 더 뛰어나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제가 연예계 생활을 길게 한 것은 아니지만 4년은 되었는데 작가님은 제가 그동안 보았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잘생겼으니까요. …물론 제 주관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지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고요하기만 하다. 지혁은 거기서 왠지 모를 굳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결의를 한 것 같다.

“무엇보다 아쉬운 입장은 저에요. 저는 작가님의 프로듀싱을 원하고, 작가님의 작품에 참여하기를 원하며, 팬으로써 작가님과 인연을 맺기를 원해요.”

그렇다. 대외적으로 보기에 아쉬운 것은 그녀지 지혁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저한테 원하는게 없어 보이시네요.”

지혁은 흠칫했다.

정곡을 찔려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단지 지혁이 은근히 선을 긋는 듯한 행위를 한 것이 그런 식으로 해석이 된 모양이라 당황했을 뿐이다. 아니면 그녀도 지혁의 의도를 알면서 모른체를 하고 있는 것이거나.

“저는 다섯의 성우분들처럼 아이펜 사단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요.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의향이 있어요. 제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작가님은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이펜 사단?

뜬금없는 단어에 눈을 깜빡이던 지혁은 이어진 목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솔직히 당황스러워요. 저한테 이렇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분은 처음이거든요. 다들 저한테 잘 보이려고만 하지, 차갑게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있더라도 대부분 여자였고. 아. 그게 딱히 신선했다 이런 건 아니고요, 하필 제가 친해지길 원하시는 분이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

이야기는 여기까지인지, 그녀는 다시 와인잔으로 손을 뻗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조차도 더할나위없이 치명적이다. 그녀가 하는양을 지켜보던 지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떠오른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제가.”

그저 듣고만 있던 지혁이 입을 열자, 한예리가 와인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그를 향한 그 순간, 지혁은 다시 한 번 주저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입은 열렸다.

“제가… 원하는 것이 한예리 씨 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                 *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지혁은 머리맡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아낸 뒤에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15분.

‘걱정 많이 했나보네.’

간밤에 은서한테서 전화가 5통이나 와 있었다. 말도 없이 외박을 해서 걱정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쯤이면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있을 터. 지혁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옷을 챙겨 입은 지혁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방문을 열었다.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선 집을 나선다.

‘…….’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다. 어젯밤, 한예리는 지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에게 기대왔고 지혁은 다소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고, 지혁은 그녀를 안아들어 침대로 향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처음에는 꿈같이 느껴졌다. 지금 내 밑에 깔려있는 것이 그 한예리가 맞는 건가? 하는 생각도 여러번 들었었다. 수없이 많은 대한민국 남성들의 마음을 훔쳤을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그에게 안겨오고 있는 것이 정녕 현실이 맞긴 한 것인가.

좋았다. 물론 성적인 쾌락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한예리라는 것에서 어마어마한 정복감과 우월함, 짜릿함 등이 밀려왔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한 지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빨리 집에가서 잠을 제대로 푹 자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 당연히 작가님이 배불뚝이 아저씨였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드문드문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빨리 나가서 택시를 잡….

“…….”

헉.

지혁은 순간 등허리가 싸하게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현진. 한예리에게서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어제 분명 그녀한테 나올 때가지 기다리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 같은데.

새벽 늦게까지 안 나온 것으로 나올 생각이 없다는 생각을 할 수야 있다. 그러나 차현진은 광적으로 지혁의 말을 따르는 습성이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지혁이 기다리라고 했으면 설령 그런 판단이 섰어도 무작정 기다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급히 핸드폰을 꺼내든 지혁은 차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선생님.

신호가 세 번쯤 갔을 때, 약간 잠긴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아, 혹시 먼저 퇴근했던 것일까.

“팀장님. 지금 집이신가요?”

- 아니요. 차 안입니다. 지금 어디신가요? 바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설마설마 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아니…! 후우……. 일단 오세요. 저 로비에서 나갑니다.”

- …알겠습니다.

지혁의 말투에서 그의 기분을 눈치챈 것인가, 차현진의 음성이 다소 조심스러웠다. 지혁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기다리다보니 1분이 채 되지 않아서 차가 와서 섰다. 아무래도 근처에서 차를 세워놓고 쪽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현진이 문을 열고 나와서 문을 열어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지혁은 그녀가 그러기 전에 스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달려오던 차현진이 멈춰섰다가 다시 운전석의 문쪽으로 황급히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짜증이 난다.

그녀한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지혁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꼭,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차현진은 지혁의 첫 상대였다. 허나 그녀는 지혁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은채 늘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지혁이 한예리의 집으로 들어가서 무엇을 했을지 다 알아차렸을 것이다. 헌데도 그녀는 지혁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혁은, 간밤에 그녀의 존재를 잊고서 한예리를 탐하는데 바빴다.

지혁은 손을 뻗어서 이마를 짚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섬뜩했다.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저 욕망에만 충실한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이건 아니야.’

차마 왜 동이 바보같이 기다렸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차가 출발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지혁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예?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뇨. 제가 안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을 잊고 있었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더 미안했다. 지혁이 죄책감을 가지고 그렇게 사과해오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딱히 지혁이 그녀를 괴롭히고 그랬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면서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랬기에 주저없이 그의 재능을 팔아서 한예리를 취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기뻤을지 모르나, 끝나고 나니 마음은 오히려 공허하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왕을 모시는 하녀처럼 극진하게 지혁을 대하는 차현진과의 시간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한예리가 딱히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찝찝한 마음은 사라지질 않는다.

왜일까.

‘씨발….’

지혁의 눈치를 보듯 백미러를 수시로 힐끔거리는 차현진을 보고 있자니, 욕지거리가 절로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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