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마음을 깨닫다 =========================================================================
한예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자연예인, 혹은 여자아이돌을 꼽으라면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이 선택할 인물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녀가 그러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준수한 노래실력과 무난한 연기력(연기를 시작했던 초창기에는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지만) 등이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이겠지만 명성에 걸맞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기엔 어폐가 있다. 그녀는 실력에 비해 가진 팬덤이 엄청난 수준이었다.
결국 지금의 그녀가 있을 수 있는 건, 그녀의 외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지혁 역시 TV속에 나오는 그녀를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기에.
‘이런 곳에 사는구나.’
지혁은 전달받은 주소에 도착하고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저는 근처에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차현진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에 운전석에 탑승해서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를 태워다준 차가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고 있던 지혁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는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선 엘리베이터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리다보니 마스크에 모자,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이가 나타났다.
그런 그녀를 따라서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과정이 이어졌다.
“하아….”
그렇게 열린 문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마스크와 모자 등을 벗어던진 여인이 지혁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당연히 한예리였다.
“어서오세요.”
“네. 집이… 엄청 좋네요.”
이사한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물건도 별로 없는 지혁의 집과는 다소 상반된다. 그림인지 앨범인지 모를 것들을 진열해둔 공간과, 책장 등이 많이 보였고 무엇보다도 집이 컸다.
“지금 거의 다 되가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무래도 요리를 하다가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집구경 좀 해도 되나요?”
“아, 네.”
허락이 떨어지자 지혁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집이 으리으리했다. 방문 하나를 여니까 침실이라고 생각되는 곳이 있었는데 방인데 지혁의 집 거실만한 크기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문이 있었고, 거기엔 지혁의 방만한 옷방이 있었다. 방에 딸려있는 욕실조차도 엄청나게 컸다.
‘…예전 저택만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 집이면 수십억, 아니 백억 단위의 가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 둘러볼 때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예리가 서 있었다.
“다 됐어요. 오세요.”
“네.”
지혁은 그녀를 따라 이동했고, 잘 차려진 한 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왠지 어색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식사는 시작되었다.
‘밥이나 먹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
요리는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이었다. 요리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생각하는 지혁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불합격이지만, 먹을 만은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은서가 해주는 것보다도 별로였다.
“작가님은 어디서 그런 기막힌 아이디어들이 생겨나는 거에요?”
그녀는 꽤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1:1로 독대를 한다는 것 자체에서 은근히 부담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먼저 소설에 관해 지대한 흥미를 보이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니 지혁도 이야기를 하기가 좀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교성이 좋네.’
저번 만남때는 그냥 쥐죽은듯이 있기에 원래는 조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녀는 와인 한 잔 하겠냐면서 진열되어있던 와인을 가져왔다. 와인잔에 따르고, 컵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지혁이 한 모금 머금는데, 와인잔을 빙빙 돌리던 한예리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본론에 들어가려는 것 같다.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뜻이었다. 한예리는 지혁이 자신을 쳐다보자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창연화의 창소이 역을 너무 하고 싶어요.”
“그러십니까.”
그러나 지혁은 그녀를 써줄 수 없다. 만약 그가 감독이 된다면 99%의 확률로 여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하게될 것이다. 닥칠 미래는 모르는 일이라지만 그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한예리는 예쁘지만, 연기력만을 놓고보면 그의 기준에서는 한참이나 모자라다.
“네. 제가 연예인으로써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어요. 데뷔를 위해서 대표님을 만났던 순간이나 데뷔가 결정되었을 때 방방 뛰었던 일, 첫 무대의 떨림 등은 아직도 생생하죠.”
지혁이 살면서 인상적인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한예리 역시 그녀가 살아온 생애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이어진 그녀의 말은 재차 와인을 마시려던 지혁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하지만 저는 그때보다도 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예리의 연기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평균은 되는 수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녀는 그 정도의 실력만으로도 언제나 주연자리를 꿰찰 수 있고, 실제로 하는 드라마마다 주역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원한다면 언제든 드라마를 찍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그녀가 연예계에서도 특출나게 예쁜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원하는 사람들이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혁은 다르다. 한예리라는 확실한 보험을 깔고가지 않아도 성공할 자신이 있고,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리스크가 그에게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저번에 말했듯 지혁의 목적은 돈이나 시청률 따위가 아니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지나지 않고 지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품의 질이다.
저번의 어필을 통해, 그녀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라고 굳이 오버를 떨었던 것이기도 하니까.
“데뷔 이래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건 없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와인을 마셨다. 고개를 젖힘으로써 드러나는 하얀 턱선이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등이 치명적이기 짝이 없었다. 절로 침이 꿀떡 넘어간다.
“하지만 작가님은 왠지 저를 안 써주실 것 같아요.”
그녀는 그 사실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의외로 예리했다. 다소 노골적으로 그녀를 거부한다는 의사표현을 하기는 했으니까 눈치채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어쩔까나.’
지혁은 잠깐 고민했다. 사실대로 털어놓아야할지, 아니면 립서비스라도 해주어야할지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감독이 된다면야, 그럴 겁니다.”
결국 지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저번에 그녀가 듣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박진형에게 넌지시 말하기도 했었으니까.
“단호하시네요.”
“…….”
딱히 상처받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혁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저는요, 원래 배우가 꿈이었어요.”
이 정도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그랬을 만도 하다.
“근데 아이돌 가수로써 데뷔하고 말았죠. 노래도 춤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그것들과 연기실력에 그리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써 무대에 설때는 환호를 받고, 연기자로써 연기를 할때는 욕을 먹어요.”
그건 일종의 선입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식이라는 것은 한 번 뇌리에 박히게 되면 고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첫 스타트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가 계속해서 연기를 하는 것을 고깝게 여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녀가 아이돌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했지만 배우라는 직업은 만만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늘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고, 저는 연기자로써 당당하기를 원해요.”
“그러시군요.”
“그래서 저는 작가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게 왜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지?
지혁은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의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창연화는 그녀가 지금껏 해왔던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더욱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창소이는 창연화의 메인 여자주인공이며 비중이 굉장히 높은 캐릭터였다. 그녀의 연기로써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창연화를 맡게되었을 경우 받을 비난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녀라고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저도 어제 생일날의 너에게를 봤어요. 보면서 엄청 울었죠. 새벽까지 잠이 안 오더라고요. 죽은 홍가인도 불쌍하고 살아있는 김창현이 슬퍼하는 모습도 계속 생각났어요.”
지혁 역시 생일날의 너에게를 쓰고 나서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었다.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였음에도 말이다.
“작가님이 어제 왜 그렇게 자신하셨는지 알겠더라고요. 작가님은 그런 자부심을 가질만한 실력이 있으셨던 거였어요. 대표님도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작가님에게 전권을 위임해주신 것이겠죠?”
그건 지혁도 동의한다. 생일날의 너에게를 보았기에, 보고나서 맡겨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말도 했을 것이다.
“죄송해요. 사실 자체적으로 저희가 조사를 좀 했어요. 이번에 생일날의 너에게를 담당한 성우분들은 전부 업계에서 생소한 이름들이라고 하는 정보가 있었고, 확인해본 결과 전부 작가님이 발굴해서 직접 키워낸 신인들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그런 류의 기사가 난 것을 보긴 했었다. 하지만 이들이 그것을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들었을 줄은 몰랐다.
“성우나 배우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실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거죠. 근데 그 사람들은 저와는 다르게 처음 해보는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어요. 저는 그게 정말 부러워요.”
이쯤되니 지혁은 그녀가 하고자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런 배우가 되기를 원해요.”
한예리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을 키워달라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예리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지혁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욕먹지 않을만한 배우라.’
자신? 있다. 아니, 차고 넘친다.
한예리는 성우들 때와는 다르다.
그녀는 완성된 배우라고는 볼 수 없어도,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는 프로다. 아무리 연기에 들인 공이 적다고 할지라도 이제껏 해온 경험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판 초짜였던 성우들과 그녀는 스타트라인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 그녀를 탑급의 배우들만한 실력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근본도 없는 성우지망생들을 가르쳐서 한 사람의 성우로써 완성시키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다.
무엇보다 지혁은 이번에 성우들을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겪어보았고, 누군가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기도 했다.
“제가 창소이에 걸맞는 배우가 되도록 키워주기를 원하시는 건가요.”
지혁의 말에 한예리는 즉답했다.
“네. 작가님만의 노하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중 한 분을 직접 만나서 물어보았는데 미숙한 성우지망생에 불과했던 그 사람이 뛰어난 성우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3달이 채 안되었다고 들었어요.”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지혁은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저는 배우를 가르쳐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럼 혹시 성우분들을 가르치시기 이전에는 경험이 있으셨나요?”
박진형과 똑같은 질문. 애당초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지혁이 천재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맞지않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런 식으로 납득을 해버리는 것일 터였다.
“…아뇨.”
“그렇다면 괜찮아요.”
한예리가 그러고 납득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지혁은 입을 열었다.
“아뇨. 이건 분명 다른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