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44화 (44/116)

00044  생일날의 너에게  =========================================================================

우웅-

2시간에 걸쳐서 박진형에게서 3번의 전화가 왔고, 지혁은 모두 받지 않았다. 작업실에서 소설 쓰는 것에 열중하고 있던 지혁은 핸드폰이 울리자 힐끗 쳐다보았다.

‘…응?’

박진형의 번호가 아니다. 핸드폰 번호인 것으로 보아 승현이 걸어온 전화도 아닌 것 같은데.

“…….”

평소라면 스팸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안 받았을 텐데, 왠지 받고 싶었다. 지혁은 손을 뻗어서 핸드폰을 잡은 뒤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

“뭐야? 여보세요?”

- 아, 안녕하세요 작가님.

…!

지혁은 잠깐 멈칫했다.

한예리였다.

“한예리 씨?”

- 네.

“제 번호는 어떻게… 아, 박진형 대표님한테 받으신 건가요?”

지혁은 그녀와 번호교환을 안했다. 그래서 설마설마 했었던 것이다.

- 네.

“뭐… 무슨 일이시죠?”

지혁이 가볍게 묻자, 그녀가 주저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 사장님께서 작가님이 전화를 안 받으신다고 해서요.

지혁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 제가 소설 쓸때는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기 때문에 진동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 아, 그런 건가요? 옆에 지금 사장님이 계시거든요. 바꿔드릴까요?

“네.”

지혁이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진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세요 작가님. 박진형입니다.

가벼운 잡담이 오고갔다. 지혁은 대충 대꾸해주면서 본론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박진형은 넌지시 운을 떼었다.

- 생일날의 너에게, 봤습니다. 어제 작가님이랑 헤어지고 나서 바로 본부장님이랑 시청했습니다.

헤어지고 바로? 그렇게 빠르게 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그 뒤로 본부장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밤이 되어 있어서 어제 연락을 드리지 못하고 지금 전화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쩐지 연락이 빠르더라니.

“그렇군요. 결론이 어떻게 났죠?”

지혁이 그렇게 묻자, 그는 망설임없이 답했다.

- 작가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든, 저희는 모두 수용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작가님께 제작에 관련한 모든 전권을 위임하겠습니다.

“…….”

파격적인 대우이기는 하군.

그들이 하루만에 태도를 바꾸고 이 정도로 굽히고 들어온다는 것은 생일날의 너에게의 작품성이 뛰어났다는 반증이리라. 지혁은 예상보다도 더 강수를 두고 나오는 그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말인가요?”

- 네. 작가님이 원하시는대로 제작을 하기로 했습니다. 원하신다면 감독을 하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사실이다. 지혁은 고작 20살에 불과하고, 그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제작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었다. 애니메이션 제작과 드라마 제작은 유사한 면이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굉장히 많다.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 이유라….

박진형은 잠깐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지혁은 물을 한 잔 마시면서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그의 침묵은 상당히 길었다.

그는 한참뒤에야 입을 열었다.

- 그저, 작가님이 앞으로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길이 된다?

“길이요?”

- 네. 저는 휘하 애들을 데리고 빌보드에 도전했었습니다. 그만큼 야망이 있었죠. 근데 지금 작가님께서 보여주는 행보는 그런 저희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번에도 명함타령 하더니, 그는 이 말을 즐겨쓰는 모양이었다.

- 전율했습니다. 이런 작품을 만들어낸 거장과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길을 따라서 작가님이 걷거나 뛰고, 나는게 아니라 작가님이 걷는 곳이 곧 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작가님이랑 척을 지면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본부장님도 같은 생각이신 것 같았고, 그래서 작가님의 요구사항을 무제한적으로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높게 평가해줘서 고맙기는 한데, 지혁은 연예계로의 진출은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창연화의 드라마 제작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난 뒤에는 그저 곡 몇 개 만들어서 뿌리는 정도의 개입만 할 생각이었다.

창연화의 제작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할 생각이 없었고. 사람의 생각이라는게 언제든 바뀔 수 있다지만 최소한 지금의 마음가짐은 그렇다.

“하지만 저는 드라마를 제작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 그럼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네.”

- 생일날의 너에게는 작가님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작품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혁은 박진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도 처음이었는데 그렇게 잘 만들지 않았느냐.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저희 JHP와 NBC가 최선을 다해서 작가님을 보조하겠습니다. 생일날의 너에게와 같은 두고두고 회자될 명작을 만들어 주십시오.

“…….”

지혁은 말을 주저하며 고민하는 척 했다. 사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혹시… 지금 옆에 한예리 씨 계십니까?”

- 지금 내보내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확인해본 겁니다. …그럼 만약에 제가 여주인공으로 확정되어있는 한예리씨를 여주인공으로 쓸 수 없다고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이것은 박진형의 역린과도 같은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NBC가 창연화의 제작을 맡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박진형이 NBC를 돕는 댓가로 얻는 것은 창연화의 여주인공에 한예리를 꽂아넣을 수 있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지혁의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저쪽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 작가님의 뜻에 따라야죠.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는 느낌은 없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그 말투에는 남의 일을 말하는 것 같은 무감정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거기서 그들의 결의가 느껴지는 것 같아 지혁은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렇게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만간에 다시 한 번 보시죠.”

- 그러시겠습니까? 작가님이 편하신 시간대를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조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나 예리 번호로 연락해주십시오.

움찔.

어쩌면 한예리의 핸드폰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근데 박진형은 지금 지혁에게 전화를 건 핸드폰 번호의 주인이 한예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알겠습니다.”

지혁은 전화를 끊고서 핸드폰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내가 정말 대단한 건가?’

대한민국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JHP가 이렇게까지 접어줄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 못했다. 그들의 자존심은 보통은 넘을 텐데, 박진형과의 대화는 흡사 차현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일방적인 구애의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설령 이번 일이 실패하더라도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작은 인연이라도 맺어두기를 바라는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음원 때문인가?’

공개된 5개의 OST의 퀄리티는 지혁도 자신할 정도로 뛰어나다. 현재 각종 사이트에서도 모든 이들을 제치고 순위권을 석권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지혁은 저번의 만남에서 그 곡들을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는 사실을 넌지시 흘렸다. 그것 때문에 박진형이 몸이 달아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아닐테지.’

애니메이션 영화. 그러나 보고 있는 동안은 그러한 사실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영화 같은 영상. 생일날의 너에게를 제작하면서 추구한 방식이었고, 의도대로 잘 만들어졌다. 물론 그림이니까 완전히 그러한 느낌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기존에 자리잡고 있었던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틀을 깼다는 비평가들의 글들을 조금 전에 보았던 지혁으로써는 그런 부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박진형이 가수라지만, 그저 음악만으로 이 난리를 칠 리는 없을 것이다.

지혁은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한예리라….’

그녀의 핸드폰 번호가 저기에 있다.

그녀는 지혁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저 글을 잘 쓰는 작가? 아니면 능력이 좋은 남자?

지혁은 자신이 없었다. 주위에서 떠받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연애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경험도 없지 않은가.

한예리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단언하기엔 그는 여자를 너무 모른다.

‘찾아가는 건 당분간 보류하자.’

음원이 공개되었다. 출처는 아직 밝히지 않았으나 지혁이 직접 작사, 작곡한 음악들은 이미 각종 차트를 휩쓸고 있었다.

이 정도 성과라면, 리플라워를 찾아가도 충분히 떵떵거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가서 서하린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한예리와 서하린을 두고 저울질을 하게 된다. 물론 그녀들이 전부 지혁에겐 조금의 관심도 없을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글이나 쓰자.”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지혁은 한숨을 쉬는 것처럼 공기를 섞어서 그렇게 중얼거리고선 다시 키보드로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우웅-

“…….”

모르는 번호지만, 본 적이 있는 번호다.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던 지혁은 액정을 쳐다보면서 잠깐 뜸을 들이다가 이내 통화를 수락했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작가님.

“네. 한예리 씨. 무슨 일이신가요?”

역시나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한예리였다. 지혁은 그녀가 왜 다시 전화를 걸어왔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혁은 아까 그녀를 캐스팅하지 않겠다는 말을 그녀가 듣는 앞에서 대놓고 했었던 행동을 되새겼다.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때 한예리가 조심스럽게 어조로 물어왔다.

- 혹시 오늘 시간되시나요?

오늘? 사실 지혁은 오늘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는 별다른 일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덥썩 네라고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 오늘이면 언제든 좋아요.

“저녁에는 가능할 거 같습니다. 혹시 대표님이 오늘밖에 안된다고 전하라던가요?”

지혁은 바보가 아니다. 느낌상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눈치없는 척을 해보았을 뿐이었다. 관심없는 척을 하고 싶었다.

- 아뇨. 제가 작가님을 한 번 뵙고 싶어서 그래요.

============================ 작품 후기 ============================

30분은 고사하고 2시간만에 겨우 올리네요..

이틀 전에 출판제의가 왔었더군요.

노골적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듯 보이는 차현진과의 19금 씬이 44화 초반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쓰다보니 그게 마음에 걸려서 19금 씬을 지우고 다른 부분으로 메꾸다 보니 늦었습니다.

계속 변명만 하는 것 같은데 정시연재를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출판 건에 관해서는 내일 낮에 컨택을 해주신 분께 전화를 한 번 해볼 생각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나름대로 고민해보고 결론을 내리게 되면 후기를 통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굳이 제의가 왔다는 것을 이렇게 적고 있는 이유는 얼마전 제 작품 하나만을 위해서 3개월 결제를 할 것 같다는 식의 코멘트를 남겨주신 분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고민할 수 있는 것도 악마의 재능을 사랑해주시는 많은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 오늘 썼던 차현진과의 19금 씬을 지우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면 본편이 아니라 내일 올리는 45화의 후기에다가 연재하는 식으로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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