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40화 (40/116)

00040  순항(順航)  =========================================================================

‘…아하.’

지혁은 차현진의 말에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왠지 방금까지 흥분했던 감정이 빠르게 식는 기분이다.

“이미 소문이 났나보죠?”

“그만큼 이 바닥이 좁기는 합니다. 사실 접촉만 NBC에서 해왔을 뿐이지 지상파 3사는 물론이고 지상파에서도 욕심을 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말씀을 드리지 않았지만 이미 TVM이나 TBCJ 등에서는 접촉이 있었습니다.”

차현진이 너무 이르다고 싶어서 자기 선에서 자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물론 지혁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하게 된다.

‘우리 팀장님 대단하시네.’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알아내는 모습만 봐도 그녀는 역시나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지혁은 잠깐 창밖을 쳐다보았다.

한예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인물이다. 찍은 CF만 수십 개는 될 것이고 노래실력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예쁘기 때문에 최소한 한국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입지를 다지고 있다. 지혁은 잘 모르지만 아마 해외에서도 인기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녀가 속한 그룹 에이퀸은 몰라도 한예리라는 이름 세 글자는 안다는 사람도 많을 터. 지혁 역시 그와 비슷하게 4인조으로 구성된 에이퀸의 나머지 3명의 멤버 이름은 모른다. 관심도 없고.

‘아쉽네.’

그녀가 진짜 자신의 팬이여서 그런게 아니라는게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백미러를 통해 잠깐 생각에 잠긴 지혁을 힐끔 쳐다본 차현진이 말했다. 그러자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물론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말씀드렸듯 지금은 너무 이르네요. 일단 소설이 조금 더 진행이 되고 생각을 해보죠.”

머지않아 생일날의 너에게를 출시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나서 어떻게 해나갈지에 대한 방향성을 정립해도 충분하다.

“이상입니다.”

그 뒤로 자잘한 보고가 이어지고 마침내 업무이야기가 끝났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맨 처음 보고된 두 개의 사안을 제외하면 그리 신경쓸만한 일들도 아니었다.

차현진이 업무브리핑을 하는 내내 창밖을 보며 한예리라는 이름만을 되뇌고 있던 지혁은 핸드폰을 꺼내서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예리가 사인 받고 싶어하는 소설가 Joker U는 누구?’ 등등 다양하고 자극적인 기사들이 널려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것을 보고 있자니 이제껏 별 생각 없었던 것이 확 바뀌고 내가 정말 출세를 하긴 했구나 하는 감상이 든다. 월 10억 단위의 돈을 벌어들이는 것보다 한예리가 지혁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더욱 더 그러한 사실을 와닿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그녀가 대단하다는 뜻이기는 하겠지만.

‘별 것도 아닌 일로 오버하는 건가.’

정작 저쪽에서는 당사자조차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속사 측에서 기사를 퍼트렸을 가능성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지혁은 괜히 설레발치지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 시트에 몸을 푹 기댔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이제껏 들어왔던 함성중에 제일 크다. 지혁은 웃음을 머금으면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드디어 생일날의 너에게의 녹음작업이 끝났다.

작업을 시작하고 2달하고도 10일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건 단순히 녹음을 끝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녹음을 진행해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기존에 작업했던 것들을 모두 갈아엎는 작업까지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최고 수준으로 실력을 끌어올린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낸 것과 다름이 없으니, 지혁 역시 기뻤다.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 작품을 할 때는 조금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리라. 어차피 생일날의 너에게는 시험작에 불과하고, 이 정도만 해도 욕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작은… 불화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해냈네요.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뒤풀이겸 인근의 식당으로 나온 지혁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적은 액수는 아닐 겁니다.”

최고 수준의 대우를 해준다. 그들이 지혁이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되게끔 지혁은 충분한 액수를 그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더불어 지혁은 그들을 강제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었다. ‘내가 너흴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안 되지’ 등의 추잡한 행동을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생일날의 너에게는 엄청난 화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고, 그로 인해 인기의 맛을 알아버린 그들은 지혁이 다시 한 번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을 때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그럼 상영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건가요?”

남자주인공을 맡았던 이승권이 물어왔다. 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빠르면 일주일 정도고, 늦으면 한 3주쯤 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3주라는 시간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라는 뜻이었다. 당장 내일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차현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생각해볼 일이었다. 딱히 그녀의 의견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캘린더 시스템이 있으니까 사전에 공고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넌지시 흘리기는 했었지만….’

뭔가가 출시될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은 그 정도일 터였다. 정확한 날짜를 말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건배!”

내일부터는 스튜디오에 출근할 필요가 없다. 그건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지혁은 고삐가 풀린 망아지마냥 술을 시원시원하게 마셔 나갔다.

*                 *                 *

‘어디 볼까….’

스케쥴을 소화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소설을 보고 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투리 시간에 소설을 보고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너무 재밌어. 미칠 거 같아.”

그만큼 Joker U의 작품은 매력적이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침대에 누워서 글만 읽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하는 작품들이 이렇게나 많다.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기실에서 핸드폰에 열중해 있었다.

그녀가 조커 유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한 달쯤 되었나. 실시간 검색어에 알 수 없는 것들이 올라오기 시작해서 호기심을 가졌었고, 초반의 5편까지는 무료로 볼 수 있다기에 시나리오를 보는 느낌으로 한 번 읽어보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받았던 충격과 함께, 그녀는 이미 소설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특히 그녀는 왕(王)이라는 이름의 소설에 푹 빠져있었다. 사람들은 미니게임천국을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취향은 그쪽에 더 가까웠다. 사실 미니게임천국의 극성팬들에게 가려져 있을 뿐이지, 왕 역시 탄탄한 매니아층과 팬층을 확보한 작품으로써 극찬을 받고 있었다.

‘너무 멋있어.’

오늘 연재된 왕의 최신화를 읽은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다른 소설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이 연재되는 신작 창연화와 건 힐러는 왕과 마찬가지로 나올 때마다 읽고 있었고 후유가라는 작품은 이미 다 읽었다. 지금 그녀가 읽는 것은 가장 인기가 많은 소설인 미니게임천국. 이 소설은 1,2,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녀는 2부의 중간부분 정도를 읽고 있었다.

‘거의 다 읽어가….’

읽어나갈 때마다 점점 사라져가는 화수에 그녀는 침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빠르게 사라져가는 분량을 인식할 때마다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조커 유의 소설들을 읽기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재밌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부럽다.’

아직 조커 유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 그녀는 그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어, 예리야.”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MC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재승이 악수를 건네왔다. 오늘 출연한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신사였다.

“야, 그래. 오늘 잘 부탁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녹화가 시작되자 그녀는 고정출연자들의 호들갑을 받으면서 여신취급과 함께 미션을 수행해나가기 시작했다. 익숙한 반응들과 대우. 그녀는 웃으면서 프로그램의 녹화를 해나갔지만 머릿속은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득했다.

한창 녹화를 하다가 잠깐 쉬는 시간이 되었다. 한예리는 서둘러 매니저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후 조커 유의 소설을 볼 수 있는 아이펜으로 접속했다.

“예리 씨. 진짜 예쁘시네요.”

그때 목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어 올리니, 잘생긴 미남자가 쪼그려 앉아서 핸드폰을 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데 그 옆으로 유재승이 나타났다.

“예리야. 그러고 보니 저번에 기사를 봤는데 너 뭐… 사인을 받고 싶다고 그랬다며?”

유재승의 말에 예리는 머리칼이 찰랑일 정도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네. 제가 요즘 조커 유 님의 소설을 정말 재밌게 보고 있거든요.”

“그래 맞다. 조커 유. 야. 내 와이프도 요즘 그 사람 소설 때문에 아주 난리다 난리야. 나보고 한 번 읽어보라고 어찌나 권하는지….”

그 말에 한예리가 흠칫했다.

“아직 안 읽어보셨어요?”

“나는 소설같은 거랑은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야 예리야. 그런….”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유재승이 말을 할 때 그에게 다가간 한예리가 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읽으셔야 되요.”

“어, 어. 그래….”

녹화가 끝났다. 돌아가는 길, 밴 안에서 소설을 읽는 것에 여념이 없던 그녀에게 매니저가 말을 걸어왔다.

“또 소설 읽냐?”

“아, 말 시키지 마요.”

소설 읽는데 방해하길래 한예리가 다소 까칠하게 대답하자, 매니저가 말했다.

“잠깐 멈춰봐. 그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할게 좀 있어서 그러니까.”

…?

최근들어 언제나 핸드폰을 잡고있던 한예리가 다소 이례적으로 핸드폰을 껐다. 그만큼 흥미가 있다는 뜻일 터였다.

“뭔데요?”

“그, NBC에서 조커 유라는 그 소설가의 창연화라는 사극을 드라마로 제작하려고 한대.”

창연화? 당연히 안다. 그녀는 오늘도 최신화를 읽었다.

“…진짜요?”

“어. 그 아이펜…? 쪽이랑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대표님께서 니가 그 창연화의 여자주인공인 창소이 역을 맡을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시더라고.”

“할게요.”

“혹시 너는 어떻게….”

설명을 끝낸다음 한예리의 생각을 물으려던 매니저는 즉시 답한 한예리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하겠다고?”

“네. 오빠, 그보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한예리가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는 것을 매니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딱히 모난 성격은 아니지만, 의외로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어? 어… 뭔데?”

그가 당황해서 묻자, 한예리가 최근 본 것 중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작가님도 만나볼 수 있는 건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