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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재능-36화 (3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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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들고 돌아온 지혁은 임유선을 5분정도 붙잡고 있다가 그녀를 빼고 다른 성우를 집어넣었다. 그 뒤로는 무한 뺑뺑이. 지혁은 다른 말없이 다시 하라는 말만으로 그들을 갈궜고, 결국 여섯시까지 작업이 이어졌으나 단어 하나조차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진행되었는데 지혁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서 일부로 그런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느리긴 해도 한 사람당 최소 한 문장정도는 녹음을 마쳤었던 이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게 작업을 끝낸 지혁은 그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뒷정리를 하고 있을 뿐. 그 이유는 이미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괜히 입을 열었다가는 험한 말이 막 튀어나갈 것 같아서가 더 컸다.

“죄송합니다….”

지혁이 묵묵히 기기를 정리하고 있을 때, 다섯 성우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고 대표자로 임유선이 나서서 그렇게 사과해왔다.

“뭐가 말입니까?”

지혁은 기기를 정리하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으며 그들을 등진채로 평범하게 물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러자 임유선이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녹음실에는 많이 들어가야 3명 정도가 들어간다. 보통 1~2명이다.

그럼 남은 이들은 그 시간에 뭘 할까? 잡담하거나 서서 다른 사람하는 거 구경한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지혁이 그것을 묵인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로운 모습으로 녹음과정을 즐겼다. 하루 8시간을 한다고는 하지만 점심시간(1시간)과 한 번의 쉬는 시간(30분)을 제외하면 실제 녹음시간은 6시간 반 정도고, 개인당 녹음실에 들어가있는 시간의 평균을 내면 기껏해야 2시간을 조금 넘길 것이다.

그걸로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혼신의 노력이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보기에도 열심히한다는 느낌이 들어야 그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노력이다. 심지어 이건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열심히 했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 정도였다.

추측컨대 그나마 임유선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서도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 같으나, 다른 넷은 그녀에 비해서 유난히 성장속도가 느렸다. 그들은 아마도 집에서 9시쯤에 나와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7시쯤 되니까 10시간이면 충분하다, 오늘 하루도 충실히 보냈다 등의 생각을 가지고 탱자탱자 놀거나 휴식하고 있었을 것이 뻔하다.

지혁과 같이 보낸 시간만으로 몇 달만에 수준급의 성우가 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오산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개나소나 다 성우를 하려고 들지 않겠는가? 성우는 결코 만만한 직업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뭐든 빠르게 습득하는 지혁과는 다르다. 그것은 지혁이 잘 가르쳐준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터.

사실 이것은 차현진의 조언을 지혁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기존의 계획대로 그저 남자 1명, 여자 1명만을 뽑았다면 이런 식의 전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임유선은 열심히 했을 것이고, 남자 1명은 그런 그녀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따라붙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5명인 경우엔 임유선 한 명이 조금 두각을 드러낸다고 해서, 나머지 4명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 어? 쟤도 나랑 비슷비슷하네. 그럼 쉬엄쉬엄해도 괜찮겠다. ]

그게 인간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게 아주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은 그렇게 여유를 부릴만한 것이 아니다. 능력에 맞지 않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면 이를 악물고 노력해도 모자라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혁은 열심히 할 자신이 있냐는 물음은 그들 전원에게 했다. 꼭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더라도, 열심히해야한다는 뉘앙스의 언행은 사전에 충분히 보였다.

“그런가요? 뭐, 저는 여러분들한테 뭔가 대단한 요구를 할 생각같은 건 없습니다.”

조건이 좋은 만큼, 이쪽에도 유리한 조항은 분명히 있었다.

“출근시간을 늘리는 일도 없을 거며,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게 될겁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혁이 원할 때 언제든 그들과의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당초 그들에게 받고 시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당시에 그들은 나름대로 절박함이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기에 크게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단지 저는 기한을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

지혁은 뒤로 돌아 성우들을 쳐다보면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검지와 중지가 펴져있었다.

“두 달. 앞으로 두 달입니다. 저는 그 안에 녹음이 하나라도 완료되지 않을 경우, 프로젝트를 엎을 겁니다.”

허억.

크게 놀랐는지 눈을 부릅뜨는 성우들의 표정들이 보인다.

놀랄 만도 하다. 한 달. 그 시간동안 녹음해낸 분량은 5%미만이다.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지혁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차현진 팀장님과는 협의가 끝났고요. 저는 그 안에 완성하지 못하면 출시를 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시간은 세 달이었다는 것이죠.”

지혁은 그리고선 임유선을 쳐다보았다.

“기억하시겠죠, 임유선 씨. 만났던 첫 날 제가 시일을 많이 드릴 수 없다고 했었던 거.”

“…네.”

임유선이 대답하자 지혁은 여상하게 말했다.

“물론 계속 출시를 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여기에 들어간 노력은 영상을 시청한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죠. 그 경우 처음부터 새로 녹음을 하는 시기가 좀 늦춰질 뿐이겠죠. 제가 두 달 뒤부터 해야할 일이 있어서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바꿀 수 없어요.”

그런 일이야 없어야 하지만, 만약 정말 그때까지 녹음을 하지 못하면 지혁도 회의감을 느끼고 잠깐 손을 놓을 수는 있을 듯도 하다.

물론 그 뒤로도 이들과 같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혁은 지금,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희들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들었을 것이다.

결코 허세나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지혁은 정말 두 달이 지났을 때, 한 문장이라도 미완성이라면 녹음을 완전히 갈아엎을 것이다.

애당초 생일날의 너에게는 시험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시작할 두 개의 장편 작품들을 위해 성우들을 길러내기 위한 일종의 포석. 지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생일날의 너에게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길 수 있는 유능한 성우들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물론 최악의 경우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손해볼 것은 없다. 최소한 그 시점이면 어느 정도는 성우로써의 실력이 다져진 상태일테니.

하지만 지혁은 단언할 수 있다. 그렇게 성우로써 데뷔한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자신의 작품에 그들을 절대 써주지 않을 것이며, 이들은 지혁의 품에서 벗어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 물론 임유선은 예외다. 그녀는 다른 넷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실력이 제일 좋기도 했었지만 심지어는 재능도 가장 뛰어난 것 같았다. 노력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녀는 습득속도가 빠른 편이다. 어쩌면 이승현도 그것을 알기에 그녀를 추천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녀만은 계속 데리고 갈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이번일이 엎어진다고 하더라도 딱히 큰 문제가 없습니다. 소설로 벌어들이는 돈이 많기도 하고, 잠깐 미뤄지는 것일 뿐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여러분들을 원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지혁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꿀꺽. 꿀꺽.

사시나무처럼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임유선은 울기 직전이었다. 침을 계속해서 삼키면서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성우들을 몰아세우는 것에 미안한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는 것과는 다르게, 그녀 개인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생긴다.

다른 넷도 낭패감이 어린 표정을 하고 있다. 애당초 그들은 임유선의 추천을 받아서 들어온 낙하산과 비슷한 개념이었다(정작 임유선도 이승현이 꽂은 낙하산이기는 하지만). 물론 자기자신의 걱정 먼저 하는 것도 맞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남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들을 추천해준 임유선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미안함과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

“선생님.”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될 시점, 기가 막힌 타이밍에 차현진이 나타났다.

이제 그녀는 지혁을 작가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물론 예전부터 그러기는 했지만, 이제는 아예 고정 호칭으로 굳혀진 느낌이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모셔다 드리러 왔습니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지혁은 차현진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택시나 지하철, 버스 등을 타고 가겠다고 했었다. 심지어는 차현진이 지혁과 같은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왔을때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지혁이 그녀에게 6시가 되면 데리러 오라고 명령을 내렸기에 차현진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지혁을 대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른 차현진이 억지로 왔을 리는 없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편하게 집에 가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하나는 지혁이 이들에게 차현진같은 여인을 운전기사로 쓸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을 성우들에게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애당초 같은 방향이니까 차현진으로써도 크게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곧 내려가겠습니다.”

“그럼 밑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러라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여주자 차현진이 마치 선생님한테 혼나는 학생들처럼 지혁의 앞에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성우들을 힐끔 쳐다본 뒤에 사라졌다.

“이야기는 이상입니다. 퇴근 하시죠.”

그것을 확인한 지혁은 뭔 일 있었냐는 듯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마음이 떠났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미련이 없는 말투. 다들 그래도 성우라고 그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들은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던 지라 잠깐동안 기다리던 지혁이 말했다.

“…갈 때 문단속 잘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지혁은 가볍게 말하고서는 스튜디오를 떠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스튜디오는 레슨 및 녹음의 시간 이외에도 언제든 그들에게 무료로 제공해주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사용하지 않았을 뿐.

“내일 봅시다.”

문을 나서기 전, 지혁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들이라고 불안감이 없었을 리가 없다. 한 달 동안 기껏해야 3%정도밖에 녹음하지 못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 등의 생각을 하면서 낙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혁은 그런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의미에서 오늘의 자리를 만든거고 이후에도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이 보인다면, 굳이 2달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바로 짤라버릴 것이었다.

턱. 턱.

“고맙습니다.”

그렇게 스튜디오를 빠져나와서 계단을 내려가자 차문의 옆에서 수행원처럼 서있던 차현진이 문을 열어주었다. 지혁이 타자 문을 닫아준 그녀가 뛰어서 운전석에 도착하여 핸들을 잡았다. 지혁은 그녀가 그러는 사이 턱을 괴고서 창밖으로 시선을 두며 성우들이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출발해도 될까요 선생님?”

“아, 네.”

그의 허가가 떨어지자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스튜디오가 보이지 않는 장소까지 도착하자 지혁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친다.

“하암… 내일인가요?”

“네.”

지혁이 룸에서 쓴 수필, ‘20살이 되어 바라보는 세상’이 내일 출시된다. 원래는 종이책으로 인쇄해 판매하려고 하였으나,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물론 그 계획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먼저 선공개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 내일은 플랫폼 아이펜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이기도 하다.

“내일은 좀 바쁘시겠네요.”

지혁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차현진이 슬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네, 네.”

여유롭게 대꾸한 지혁은 금방이라도 울려고 했던 임유선을 떠올렸다.

그는 구태여 그녀에게 너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마음은 그녀에게 더한 독기를 심어줄 것이라고 본다. 결국 그녀를 위한 결정이었다.

‘…길겠군.’

늦으면 늦었지 녹음이 예상보다 빠르게 끝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사실 그는 한 두달이면 끝나지 않을까 하는 근거없는 자신감마저 있었었다.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리고 말았지만.

턱을 괴고선 창밖을 쳐다보던 지혁이 두 달이 길다고 느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백미러로 차현진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백미러를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혹시 어디 불편하시냐 혹은 제가 뭔가를 잘못했냐고 묻는 듯하다.

자기보다 12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귀엽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혁은 피식 웃었다.

============================ 작품 후기 ============================

좀 늦었습니다.. 대신 빠방한 분량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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