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계기 =========================================================================
불우한 환경 탓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 것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삶이었기에.
살았다. 살아야만 했다. 울지 않고자 했다. 슬프지 않다고 다독여야만 했다. 살다보니 고개를 숙이면서 굽신거리는 일도 있었고, 때로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수치를 참아야만 하는 순간도, 이를 악물고 터져나올 듯한 방울들을 억눌러야만 하는 상황도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나는 감정들.
단지 어느 순간 깨달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 나와의 만남은 축복과도 같지만, 조심하라구. 막상 다 가지게 되면 은근히 허무할 수도 있어. 그때가 돼서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신중히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얻는게 많은 것이 좋은건 아냐. 그렇게 망가지는 애들도 많이 봐와서 하는 말이야. >
‘…….’
그렇게 말했던 신의 말에 공감했었던 적이 있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랬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다 가져보고 싶다.’
그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 역시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왔었고, 현재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혁은 그건 너무나도 따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뚜렷한 목표라는 것이 없었다. 원하는 것도 딱히 없었다.
멍청하게도.
그는 그러한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가졌다. 나는 그러지 말자. 누군가에게 혹독하게 굴지말자. 그렇게 되뇌고는 했었다.
‘성공. 복수.’
차현진이 그에게 순종하는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의 감정.
칙-
“…후우….”
어둠이 내려앉은 밤. 베란다 너머로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보며 지혁은 연초연기를 뱉어냈다. 어제부터 피기 시작한 연초는, 마치 왜 이제 찾아주었냐는 듯 그에게 너무나도 잘 맞았다. 세상의 근심이 다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지금도 그러한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인간은 저마다 욕망을 억누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타인의 입장이 내 입장이 되었을 경우 느낄 상실감과 절망감, 분노 등을 알기 때문에 지성체(知性體)인 것이고, 그렇기에 이타적으로 배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남들에게 피해주면서 질 낮은 삶을 살아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 되지 않겠는가. 최소한 이제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
그를 무시했던 사람들, 부모님의 재산을 앗아간 뒤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인간들.
그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성공하는 것만으로 자기만족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졌다.
나아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많은 것을 누리고,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어졌다.
지금의 지혁이라면, 그러한 마음을 품어도 된다고 본다.
‘…낮아.’
5층.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렇다.
50층, 500층은 어떨까.
< 선생님은 스스로가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 그 사실을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선생님만 모르십니다. >
차현진은 지혁이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
지혁은 아무것도 몰랐다.
길거리에서 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 그리 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소설이 이례적인 인기를 보이며 많은 사람들을 열광케하고, 당황시키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외면하기 바빴다. 모르는 척. 관심없는 척.
그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후우….”
지금까지는 그랬기에.
* * *
“…다시 하겠습니다.”
녹음. 지혁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작업이 12시에 이르기까지 단 한 구절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기준으로 미루어보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 동안은 기준을 조금 낮춰서 보았던 것도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지혁이 미련하고 물렁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권리가 계속되면 호의인줄 안다. 지혁은 그 말을 이들을 통해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녹음을 시작했던 초기만 하더라도 성우들은 어떻게든 나은 모습을 보이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는 모습이었고, 실제로 실력의 증진도 빨랐으며 성과도 괜찮았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런 태도를 보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풀어지기 시작했다. 지혁은 그저 재시도를 요구했을 뿐,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결과물을 재촉하지 않았다. 모자라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었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차분하게 다시 해보자고 다독였다. 퇴짜를 놓을때는 나름대로 단호하다고 생각했는데, 지혁은 그 정도의 일만으로도 들들 볶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근만 주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채찍질을 한다고 지혁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 것 역시 아니다. 그저 지혁은 도망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 빠른 길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을 뿐이었다. 남에게 미움을 살 수 있다는 두려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외침.
오히려 당근만 주면 더 문제다. 지혁의 그러한 행동이 이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식당에 들어선 손님의 입장에서도 남을 귀찮게 할바에는 자기가 조금 불편하고 만다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던 이전의 지혁은 이제 없다. 그는 빨리 녹음을 끝내고 영상을 세상에 선보이길 원하고 있고, 그를 통해서 서하린과의 접점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냉정하게 보면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다시.”
표정, 말투, 행동 등을 통해서 지혁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성우들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녹음을 위해 들어가있는 임유선을 제외한 넷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혁은 모른척했다.
- 하지만 난…!
“후…. 다시.”
사실 임유선은 다른 넷에 비하면 양반이다. 그녀는 지혁과의 시간 이외에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혁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선택했다.
- 하지만 난…!
2시간. 무려 그녀 혼자서 두 시간동안 똑같은 첫 마디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일부로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 물론 실제로 마음에 안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지혁은 자신의 기준을 적용해서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기에.
타닥.
지혁은 쓰고 있던 헤드셋을 거칠게 벗어서 던지듯 음향기기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거울 너머로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하는 네 명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임유선 역시 사색이 되어 있었다.
“…….”
팔짱을 낀 채 헤드셋 쪽을 바라보며 말이 없는 그의 눈치를 보는 다섯의 표정에 당황이 떠오른 것이 느껴졌다.
“…10분 후에 다시 합니다.”
원래라면 점심을 먹어야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불평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혁은 건방진 행동이라거나, 가혹한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혁이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들이 얻은 기회는 그야말로 천금과도 같았다. 하지만 역량은 그렇지 못하다. 말 그대로 운. 이승현이 하필이면 성우지망생이었고, 지혁과 아는 사이였고, 임유선과 친분이 있었고, 그렇기에 지혁에게 소개해주었다.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인연이 닿아서 만났을 뿐인, 같이 작업을 하고있을 뿐인.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관계.
지혁이 절대갑이고, 그들은 을에 불과한 관계.
그것이 바로 다섯 명의 성우와 지혁의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혁은 그들에게 충분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때 알아서 잘했어야 했다. 그들이 나태한 모습을 보였기에 지혁은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존중을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쥐뿔도 없는 그들을 뽑아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무료로 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충분한 페이까지 약속했다. 좋다 못해 파격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대우를 해주는데 오히려 눈치는 이쪽에서 보고 있었고 진척도 없었다.
그야말로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호구 중에서도 상호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대처.
‘속이 시원하네….’
물론 밥을 굶길 생각은 없다. 그저 오늘은 본보기이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일 뿐.
화를 내고 나오니 마음이 살짝 불편하기는 하다. 임유선만이 지혁과 동갑일뿐 나머지 성우 넷은 지혁보다 나이도 많다. 그 때문에 그간 지혁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수십 번은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안했다.
성우들은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차현진은 그런 지혁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그것을 느꼈던 것이기에, 전에 그런 말도 했었을 것이다.
칙-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후 내뱉은 지혁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몰라 씨발.”
이 일로 그들이 그만둬도 상관없다. 새로운 사람을 찾으면 된다. 한달여간 그들을 키워낸 시간은 좀 아깝겠지만 지혁은 지금 당장 작품을 완성시키지 않는다고 인생이 터져나가는 입장이 아니다. 물론 리플라워가 해체될 경우 서하린이 아예 연예계를 떠날 수도 있고,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점은 많다. 그러나 지혁에게 서하린은 그렇게까지 신경써야될 존재도 아니었다. 그러면 그냥 차현진이랑 사귀면 그만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과는 다르게 지혁의 자리는 대체할 수 없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것만 하더라도 그는 원작자이자 음향감독이며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자와도 같다. 실상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는데, ‘생일날의 너에게’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전부 그의 작품이다.
있는 대로 다 퍼주면서 지혁 혼자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지혁은 오늘 아침 출근을 하면서 그들이 당장 무언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전원 짤라버릴 생각을 하고서 출발했다.
“…후.”
담배를 바닥에 툭 떨구고 신발로 비벼서 끈 지혁은 다시 녹음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앞으로 걸어나갔다.
대략 5분 정도를 걸어서 인근의 카페에 도착한 지혁은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비교적 한산했기 때문에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커피가 나왔고, 지혁은 그것을 받아들고 천천히 녹음실로 향했다.
담배 타임까지 생각하면 20분은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혁은 전혀 개의치않았다. 계단을 차근차근 올라서 녹음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성우들이 흠칫 놀라더니 바짝 긴장한 채로 경직된 모습을 띄우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평소와는 다르게 그들은 소파에 앉아있지도 않았다. 그가 돌아올동안 계속해서 서서 기다린듯한 모양새. 지혁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서 커피를 든 채로 뚜벅뚜벅 걸어가선 본래 자리에 앉았다.
============================ 작품 후기 ============================
…엉?
자고 일어나서 소설란을 확인해보던 저는 거북이처럼 고개를 빼며 눈을 의심했습니다.
투데이 베스트 감사합니다.
그저 열심히 쓰겠다는 말밖에는 해드릴 것이 없네요.
차현진과의 19씬은 당장이 아니라 추후에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떼먹지는 않을 것이오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36화까지 한번에 올려보려고 했는데 아직 반정도밖에 완성을 못해서 밥을 좀 먹고 샤워를 한 뒤에 차분한 마음으로 써서 새벽 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