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계기 =========================================================================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인생(人生)에 있어서 화(禍)와 복(福)은 일정(一定)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행이 불행(不幸)이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함을 이르는 말이었다.
지혁은 이 문구를 소설에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말이 유래된 고사도 찾아보고, 그런갑다 하면서 넘겼었던 것 같다. 당시에 지혁이 느꼈던 감상평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혁은 지금, 그 말의 뜻을 되새기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지혁은 차현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사람의 일이라는게 알 수가 없다.
지혁이 차현진을 이성으로 생각해보았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매력적인 여성이기도 했고, 이미 그의 인생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녀와 같이 일하며 의견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녀는 지혁의 글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독자가 모르는 지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 아는 사람 자체가 몇 되지 않는 지혁에게 있어서 이미 그녀는 특별한 인연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이다. 지혁은 지금 이 순간 차현진과 이런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떨떨했다. 어안이 벙벙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그도 잘 모르겠다. 차현진이 갑자기 그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던 그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억은 마치 술에 취했을 때처럼 드문드문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렇게 침실에 와있다.
12살이라는 나이차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혁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첫경험이 이런 식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 쓰잘데기없는 환상이라고 치부할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혁은 최근을 제외하면 또래 여성과 제대로 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리고, 아직 여성에게 품은 일종의 환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소설을 쓰면서 아랫도리를 간수하지 못하는 사내놈들이라는 표현을 써보기도 했었지만, 지혁은 2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 구절을 인용하여 사용하면서도 공감을 하지는 못했었던 것이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학교에서 성교육 시간에 배웠던 것과 현실의 감각은 연결되지 않았고 지혁은 어느날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있고 그것이 말로만 들었던 몽정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냥 그러려니 했었던 것이다. 생활고에 치여 그만큼 성(姓)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가질 시간이 적었던 것이다.
물론 지혁 역시 건장한 사내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수시로 그의 분신들을 배출해내기도 한다. 자위로 얻어내는 쾌락의 시간은 즐거웠다. 3년쯤 전에 처음으로 사정의 쾌감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게 다인줄 알았다.
돌아서려는 순간 현관에서 갑작스럽게 달려들어온 차현진과의 접촉으로 본질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순간, 지혁은 그것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였는지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혼자서 하는 자기위로와 누군가와 함께 하는 행위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궤를 달리하는 것이며,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직접 경험한 방금 전에 확실하게 느껴버린 것이었다. 영상과 실제는 같은 선상에 놓고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혁은 그저 차현진과 접촉을 잠깐 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체의 여인을 영상으로 훔쳐볼 때보다 더한 흥분을 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혁은 불시의 공격에 저항하지도 못하고서 이런 상황에까지 도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와서 거부할 수 없어.’
지혁은 차현진을 따라서 그녀의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평생의 기억에 남을만한 개인으로써는 역사적이라고 해도 될만한 이 순간, 지혁은 극도로 정신이 냉철해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성이 돌아온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상황은 이미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지혁은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으며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거기엔 반듯하게 누워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차현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혁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듯이 와달라는 말도, 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눈은 심유(深幽)하기 그지없어서 지혁이 어떻게 행동하든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는 순종의 의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눈 딱 감고 취하라는 악마의 속삭임과, 참으라는 천사의 속삭임이 대립하는 기분이다.
“선생님. 잠깐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그때, 차현진이 몸을 일으키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지혁은 멈칫했다가 그녀의 요청대로 순순히 그녀의 옆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차현진이 그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더니 절하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욕심으로 혼란을 드린 점….”
“왜, 왜 이러세요 팀장님.”
지혁은 깜짝 놀라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니요. 제가 그래서는 안 됐습니다. 선생님은 불순한 마음을 품고 오신 것이 아니었고 그 전에 다짐도 했었는데 제 실수입니다.”
다짐?
그녀의 단호한 표정이 지혁이 멈칫한 순간,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욕심내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님은 너무나도 완벽하고, 매력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오를 수 없는 나무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때문에 사무적인 태도로써 일관하자. 상사로써 정성껏 모시자는 마음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보필하되, 작가님의 역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될 경우 알아서 떠나자. 늘상 그렇게 다짐하며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지혁은 냉정해졌던 와중에도 꼿꼿하게 서있던 그의 물건이 수그러드는 감각을 느꼈다. 차현진의 말이 표정이나 말투 등이 굉장히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잘생기셨고, 몸도 좋으시며 성격도 올곧으시며 강단이 있으십니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하는 향상심과 도전정신,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없이 많은 재능까지. 심지어 이미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계시는데, 선생님은 아직 스무 살에 불과합니다.”
차현진이 비행기를 태워주니 지혁은 왠지 쑥쓰러웠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기는 했었지만, 확인사살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저는 이미 서른을 넘긴 늙은 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설령 작가님이 괜찮다고 하시더라도 제가 거절할 생각이었습니다. 작가님이라면 저보다 더 어리고, 예쁘고, 능력 있는 여성을 만나셔야만 한다고….”
서른을 넘긴 늙은 년… 지혁은 그런 단어가 차현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걸까.
지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차현진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저 제가 아프다는 이유로 병문안을 와주셨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역사에 남을만한 위인의 곁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것이라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욕심이 생겼습니다. 탐이 났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작가님을 유혹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일부로 넘어지며 작가님한테 안기고 있었습니다.”
차현진은 중얼거리듯 자조어린 음성을 연달아 내뱉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과 저열한 욕망이 충돌하며 저를 혼란스럽게 했고, 선생님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선생님도 저한테 마음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랬으면 안 되었던 것인데….”
“왜 이렇게 자신을 깎아내리시는 겁니까. 팀장님은 충분히 예쁘시고, 매력적입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지혁이 속내를 드러낸 순간, 그를 올곧게 쳐다본 차현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심성까지도, 선생님은 너무나도 완벽한 사람이십니다.”
아무래도 차현진은 지혁의 얼굴에 금칠을 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은 아직 어리시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책정하지 못하십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동안 모시면서 판단한 것으로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박하십니다.”
내가?
지혁은 딱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생님은 스스로가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저 역시 이제껏 많은 남성들에게서 대쉬를 겪고, 은연중에 우러름 등을 받으면서 살아왔지만 그런 저조차도 선생님에게는 감히 견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차현진의 자존감이 낮은 것이 아니라, 비교대상이 지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선생님만 모르십니다.”
…….
지혁은 멍한 기분이었다.
사실 그는 남의 평가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살아온 시절이 길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확인하지 않으려는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쌓인 일종의 자기방어본능과도 같았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본인의 능력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그의 전화번호를 묻는 여성들이 종종 있다는 것.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는 것. 이전과는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헌데 차현진은 그게 아니라 너는 그것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가님의 과거가 그러한 작가님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특수한 상황이 맞물려서 지금의 작가님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잘난 사람이 자기가 잘난 것을 모르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도 아니지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지혁은 입맛을 다셨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말을 듣고나니 오히려 찝찝한 마음 같은건 사라졌다. 그저 지혁만을 생각하는 차현진의 마음을 알게 되니, 오히려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마음을 다잡았음에도 이제는 차현진이 거부하고 있었다.
인연이 아닌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이럴 운명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네.”
납득했다는 듯 차분한 어조로 한 말에 차현진이 잠깐의 텀을 두고 대답하자, 지혁은 곧장 그녀의 쇄골 부분을 밀어서 넘어트렸다.
“꺅!”
답지않게 귀여운 음성을 내뱉으며 뒤로 넘어진 차현진의 머리카락이 침대에 흐트러진다. 지혁은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런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
“이해했다고 했지, 받아들이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숙여서 다소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냈다. 차현진은 반응하지 않고, 약간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곧이어 입술을 뗀 지혁이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팀장님을 더 따먹고 싶어졌습니다.”
“…….”
지혁은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에 속으로는 굉장히 놀랐으나, 태연을 가장하며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었다.
“이렇게 흥분시켜놓고, 이제와서 안하겠다고 하면 알겠다며 물러날 줄 알았습니까?”
지혁의 말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알아버렸거든요.”
요즘 세상에 누가 정조를 중요시 여기는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이 순간 욕망에 충실하고 싶었다. 이제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차현진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싶다는 본능에만 충실하고자 한다. 그는 이미 짐승이 되어 있었다.
‘…….’
그때 문뜩, 차현진에게 잘 보이려 아등바등하던 출판사의 직원들이 떠올랐다.
애처롭기까지 하던 그들의 발버둥은 꽤 여러 번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종종 출판사에 들르곤 했었던 지혁에게 그것은 꽤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우열관계라고 해야 할까. 차현진은 그들의 반응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처럼 다소 냉정하게 쳐내는 느낌이 은연중에 있었다. 관심없다는 듯이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출판사 직원들 따위는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헌데 그런 그녀가 지혁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과격한 말에도 별다른 반항도 없이 가만히 그의 뜻을 따르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지혁은 격렬한 우월감이 흥분으로 뒤바뀌어 그의 전신을 올올이 옭아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보다 10살은 많은 당당한 여성이 그의 말에 순순히 굴복하고 따른다는 것에서 강렬한 정복감이 샘솟음과 동시에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지혁은 지금 이 순간이 그의 인생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그러나 불안하다기보다는 유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지혁은 치명적인 미소를 지은 뒤 재차 고개를 숙여 차현진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