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성우 오디션 =========================================================================
“은서야. 준비 다 됐어?”
“응.”
지혁은 이전에 차현진이 선물해주었던 양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은서 역시 지혁이 오늘을 위해 사다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방 한쪽에 자리한 제사상을 바라보던 지혁은 이내 천천히 절을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부모님과 3살에 불과했던 막냇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지도 9년이 되었다. 아마 동생이 살아있었더라면 그때의 지혁보다도 더 컸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든다. 기일날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며 절을 하고는 했었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제상을 이렇게 정식으로 차린 것은 돌아가신 이후로 최초였다. 집에 제기세트도 없었어서 이번에 새로 좋은 것들로 구매했다.
꼴꼴꼴꼴.
‘…….’
술을 따르고 제사를 무사히 끝낸 지혁은 은서와 함께 음복을 하면서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두분이 살아생전에 보았던 부모님의 친인척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된 것은 한 5년은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은서도 지혁도 둘이서 보내는 기일은 익숙한 편이었다.
부모님 몫까지 행복하는 것이 그와 은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일 것이라 다짐하며 지혁은 조용히 상을 정리해나갔다. 최근들어 지혁은 살짝 텐션이 낮았었던 것 같다. 기일이 다가오고, 무언가를 할때마다 부모님과 동생 생각이 났었기 때문이다.
우웅-
그때, 지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
- 콜렉트콜입니다. 상대방을 확인하세요.
꾹.
“형.”
- 어, 지혁아. 괜찮냐?
갑자기 무슨 말이지?
“네? 뭐가요?”
- 오늘 부모님 기일이잖아. 이맘때만 되면 니 맨날 축 쳐져 있었으니까 걱정이 돼서 전화해봤다. 목소리 들어보니까 그래도 좀 괜찮은 거 같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혈육이라는 인간들도 소식이 없는데 생판 남인 그가 이렇게 챙겨주는 것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현이라는 사람이 진국임을 새삼 깨닫는다.
“…고맙습니다. 형.”
- 그래. …후. 이제 꽃길만 걷자 지혁아. 소설도 잘 되고 있고. 동생 다리도 나았고.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
“네.”
- 그래. 푹 쉬고 내일부터 다시 빡시게 3부 쓰고.
…….
“미니게임천국 3부요?”
- 그래. 연재일 확정나면 나한테 미리 언질도 좀 주고 그러고.
혹시 이게 목적은 아니겠지. 순간 그런 의구심이 들었으나, 승현이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지혁도 잘 안다.
“네. 그 정도야 뭐. …군생활은요? 할만해요?”
- 아따 마 죽갔다. 요새 정신이 읍다. 어찌나 빡센지.
풋.
앓는 소리를 내는 승현이 웃겨서 희미하게 웃어보는데 그가 말했다.
- 근데 저번에 뭐 아는 성우지망생 애들 연결해달라는 그건 어떻게 됐노?
“아 그거요….”
그러고 보니 성우들을 뽑은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잘 되고 있어요. 임유선 씨가 별 말 안하던가요?”
- 내 거진 한달간 부모님 이외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 적이 없다. 사실 부모님한테도 자주는 못했고. 동원훈련하랴 뭐하랴 정신이 없었다. 사실 오늘도 안되는 거였는데, 니한테 전화할라고 노력 좀 한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힘들게 군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3부는 착실히 쓰고 있어요. 지금 50화정도 썼네요.”
- 그거밖에 못썼나? 퍼뜩 안쓰고 므했노.
“스토리 구상하는데 시간을 많이 써서 그렇지 쓰기 시작한 건 2주 정도밖에 안됐습니다.”
지혁이 단호하게 말하자 승현이 꼬리를 내렸다.
- 그렇나. 내가 3부를 볼 생각으로 버티면서 산다. 잘 부탁한다. 내 이만 끊어야겠다.
“알았어요. 들어가세요 형. 다치지 말고요.”
- 오야.
뚝.
그렇게 승현과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지혁은 흠칫해서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 죄송합니다 선생님. 콜록콜록. 몸관리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오늘 아침, 차현진은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면서 병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추가로 들어온 수입을 사용해서 출판사 사무실 바로 위쪽에 녹음을 위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지혁의 집에서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거기서 지혁은 성우들을 가르쳐주면서 수업을 진행하고, 필요한 것은 이미 녹음을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차현진은 알게 모르게 그런 지혁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여러 방면으로 신경을 써주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러질 못했기 때문에 아픈 와중에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저도 오늘은 쉬자고 했거든요. 부모님 기일이라서 아침부터 은서랑 제사상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 …그, 그랬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콜록. 하필이면 이런 날에….
“너무 그러지 마세요. 오늘 푹 쉬시고 내일도 만약 상태가 안 좋으시면 굳이 저한테 연락하시지 않으시고 쉬셔도 됩니다.”
그렇게 차현진과의 통화마저 끝낸 지혁은 잠깐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생각했다.
‘내일 병문안이라도 가볼까?’
* * *
“안녕하십니까~”
“엇! 안녕하세요!”
다음날 오전, 지혁은 사무실로 출근했다.
스튜디오에 출입하는 성우들의 경우에는 집합시간이 애당초 10시기 때문에 아직은 약간 여유가 있었다 9시 30분. 걸려있는 시계로 시각을 확인한 후 슬쩍 사무실을 살펴보니 차현진을 제외한 직원 3명이 출근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착각일까? 차현진 없이 남자 3명이서 업무를 보고 있는 모습은 왠지 칙칙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팀장님은 오늘도 감기인가요?”
“출근을 아직 하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런 것 같습니다.”
땡땡이를 칠 성격은 아니니까 아직도 병세가 호전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지혁은 병문안을 가봐야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차현진은 의외로 직원들에게 잘해주는 편이었고, 그래서인지 직원들은 차현진이 없음에 침울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셋 중에서 최소 한 명 정도는 차현진에게 은연중에 마음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혁은 잠깐 그들을 쳐다보다가 스튜디오로 출근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기다리자 성우들이 전원 모였다. 지혁은 곧장 일을 시작했다.
“다시 해볼게요.”
“다시~”
“네 그런 느낌으로.”
“거기서는….”
“다시 합니다.”
녹음 속도는 굉장히 더뎠다. 심지어 지혁이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고 거의 3주 가까이 되어서야 실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하루종일 하면 두세마디 녹음이 완료될까 말까였다. 워낙 경험도 없고 요령도 없는 그들인지라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작업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혁의 지도편달이 있기 때문인지, 그들의 실력은 눈에 띄게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이짓도 처음이니까 고생하는 것일 뿐, 아마 다음부터는 조금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업은 정확히 여섯시에 종료. 여덟시간동안 점심시간 1시간, 쉬는시간 30분을 제외하면 6시간 30분동안 작업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성우들도, 지혁도 깨나 지친 상태였다.
“선생님. 오늘 저희끼리 술 한 잔 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지혁이 퇴근준비를 하는데 임유선이 슬쩍 와서 물어왔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한 달 동안 지혁에게 들들 볶였으니 누구든 이런 태도를 보여야 정상일 것이다.
그간 두 번 회식을 했었고 있었고 지혁은 그때마다 참가를 했었다. 뭐, 2차로 노래방을 가서 그의 실력을 증명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으니 썩 나쁘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아마 평소같았으면 바로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예정이 있었다.
“아, 저는 오늘 선약이 있네요. 아쉽지만 다음에 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왠지 기뻐하는 것 같아 보이는 건 착각인가? 아무래도 성우들은 지혁에게 예의상 권유는 하지만 내심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다보니 눈치 있는 상사가 된 셈인가.’
지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은 후 스튜디오를 벗어났다.
죽집에 들러서 전복죽을 구입한 지혁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로 가주세요.”
택시를 타고 이동을 시작한다.
차현진의 집은 얼마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었기 때문인데, 지혁의 집과 회사는 붙어있는 반면 그녀의 자취방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편의성을 위해서 이사를 했었고 지혁이 집들이겸 잠깐 들렀던 것이다.
‘혹시나 기억해두길 잘했지.’
지혁을 태운 택시는 부드럽게 이동을 시작했다. 이내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지혁은 계산을 마치고 택시에서 내렸다.
차현진은 지혁과 동일한 이름의 아파트단지에 이사왔다. 지혁처럼 집을 산건 아니고 전세. 지혁의 집에서 대략 5분 정도의 거리였다. 이렇게 가까운데 집들이를 안갈수도 없었기 때문에 잠깐 가봤었던 것인데 그때의 기억이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지혁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11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서자 내렸고, 1101호의 벨을 눌렀다.
- 누구… 헉!
“접니다 팀장님. 병문안 왔어요.”
타다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삐리릭 하는 기계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선생님.”
“죽 사왔습니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네, 네.”
편한 복장의 차현진이 뒤로 물러섰고, 지혁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감기는요?”
“아…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좀 그랬는데, 낮에 푹 자고 일어나니까 괜찮아졌습니다.”
이런.
“어… 아직도 편찮으신줄 알고 죽을 사왔는데, 싫어하시지는 않으시죠? 저녁으로 드시면 될 거 같은데.”
“아, 네. 감사히 먹겠습니다.”
차현진은 지혁이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
“…….”
왠지 좀 어색하다. 저번에 와서 집은 이미 둘러보았기 때문에 그녀가 아프지 않다면 딱히 더 볼일은 없는 셈이었다.
“그, 그럼 몸조리 잘 하시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회사에서 보죠.”
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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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