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성우 오디션 =========================================================================
지혁이 휴지를 가져다주자 두 여인은 앞다투어 휴지로 눈물을 닦기도 하고, 코도 풀면서 영화의 여운을 삭히는 기색이었다. 그는 방관자라도 된 것처럼 약간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그녀들이 진정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녀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은 방안을 눈물바다로 만든 영화를 끄고나서 20분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제 조금 진정하신 것 같으니까 바로 일 얘기로 넘어가 보도록 하죠.”
지혁은 곧장 그가 만든 플랫폼 ‘아이펜’으로 접속했다.
“아이펜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이 작품의 제목은 일단 생일날의 너에게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각본은 제가 썼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제작도 거의 완성단계지만, 보셨듯 아직 성우진의 녹음이 부족한 부분이 많죠. 제가 직접 비중이 낮은 엑스트라들 위주로 녹음을 해두기는 했으나 전체로 따지면 기껏해야 1~2퍼센트 남짓입니다.”
차현진은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이었다. 지혁은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가볍게 흘렸다.
“일단 모자란 부분에는 자막을 올려두었으나 절대 이런 식으로 공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세한 것 하나까지 완벽하게 녹음을 끝내고 나서야 세상에 선보일 거에요.”
애당초 오디션이라는 명목으로 임유선을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니까, 이쯤되었으면 그녀는 지혁이 하려는 말을 눈치 챘을 것이다. 다만, 지혁의 생각과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는 있다.
“최초공개가 되는 것은 이 홈페이지일 거고, 일단은 제가 쓴 단편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영상을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써둔 소설이 또 있습니다. 물론 영상을 올릴 때 소설도 같이 올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혁은 차현진을 바라보던 시선을 임유선에게로 전환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임유선 씨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홍가인 역에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지혁의 말에 임유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여, 여주인공이요?”
지혁은 애당초 여주인공을 위해 그녀를 데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직접 시청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완성도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이 이런 명작의 주인공을 맡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엑스트라, 기껏해야 조연 정도를 맡아서 연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 뻔하다. 특히 방금의 반응으로 그건 확실해졌다.
좋게 보면 주제 파악을 잘한다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뜻도 된다. 물론 실력도 뭐도 없는데 자신감만 넘치는 것은 좋다고 볼 수야 없겠지만.
“네. 사실 혼자서 모든 여자들을 다 해주시면 정말 좋겠지만, 그거야 찬찬히 협의해나가면 되는 것일테고, 일단은 여주인공 자리를 확정하고 싶습니다.”
“하, 하지만 저는 아직… 활동은커녕 데뷔조차….”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승현이 형한테 들었거든요.”
“그런데도 저를 여주인공으로 하시겠다고요?”
지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조건은 붙겠지만요.”
“…그, 조건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지극히 온당한 물음. 지혁은 곧장 말했다.
“저는 제 작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느낌으로 녹음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빙이든 오리지널 작품이든, 왠지 모르게 영화와 애니메이션 영화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거든요.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성향이 짙다고 보고 있고 그건 외국의 영화를 더빙한 느낌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혁은 그 자체를 꺼리는 타입은 아니다. 단지 특유의 번역체, 혹은 어색함 등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낫다는 주의라는 뜻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 취향이라고 해두죠. 그러한 느낌이 없도록 제작하는데 힘썼다는 것은 방금 보시면서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카메라로 찍은 영화를 보았다는 느낌을 받기를 원합니다.”
지혁이 잠깐 말을 끊자 그 말이 맞다는 듯 임유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저는 깐깐하고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저라는 사람의 근본은 그게 아닐수도 있지만, 최소한 녹음을 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이쯤되면 임유선도 지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말인 즉, 저는 제가 만족할 때까지 당신을 몰아칠 거라는 뜻입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혹독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초적인 부분에 관한 지적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세세하게 모든 것들을 다 뜯어고치는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 임유선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부담감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거절한다면 그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지혁은 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키워낼 자신도, 키워낼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임유선이라는 성우 개인으로 좁혀서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엄청난 기회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검증된 것이 없다. 소설 쪽으로는 이미 활약을 하고 있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은 이번이 처음이고 플랫폼의 활동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지혁은 그 모든 것을 뛰어난 작품 하나만으로도 커버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실제로 임유선도 그에 관해서 별다른 의문이 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지혁이 공들여서 제작해낸 ‘생일날의 너에게’의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뜻이리라.
“제가… 작가님의 기준에 들만큼 잘해낼 수 있을까요?”
그건 지혁도 모른다. 지혁은 자기 자신의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 뿐, 다른 사람의 역량같은 것을 쉽게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최소한 잘 가르쳐줄 자신은 있었다. 세상에 모든 재능을 얻었다는 신의 말에 어폐가 없었더라면 지혁은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일도 잘해낼 테니까. 그것을 믿고서 이런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임유선 씨를 제 마음에 들만한 성우로 키워낼 자신이요. 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안드리는 거고,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될겁니다.”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수년간 여러 가지의 재능을 골고루 겪어본 지혁이었기에 결코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혁이 일부러 확신에 찬 어조로 힘을 담아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유선은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하기사 그녀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의 미숙한 연기로 이런 명작을 망쳤을 경우 곳곳에서 쏟아지는 원성을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예기간이 필요하려나.’
잠깐 생각하던 지혁은 결국 약간 물러나기로 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다고 생각되네요.”
지혁이 운을 떼자 아래를 쳐다보던 임유선이 고개를 들어 지혁을 쳐다보았다. 지혁은 그녀의 눈을 올곧게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긴 시일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 역시 그다지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요.”
“3일. 임유선 씨는 그 안에 결정을 내리고 연락을 주십시오.”
물론 페이라던가 추가적인 협의사항은 남아있다. 그러나 그건 임유선이 참여유무를 결정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은 것들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할 생각이 있느냐는 것.
“후우….”
지혁은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짧게 한숨을 내쉰 뒤에 선언하듯 말했다.
“제 설명과 제안은 이상입니다. 혹시 질문 있으실까요?”
* * *
- 꼭 하고 싶다고 전달해 달라고 합니다.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다.
임유선과의 만남 후로 꼬박 이틀이 흘렀다. 지혁은 태연한 척 했지만 내심은 좀 초조했었는데, 그녀는 다행히 차현진을 통해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말한 그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나요?”
- 그 전에 작가님한테 한 가지만 여쭤봐 달라고 합니다. 정말 아무나 상관없는 것이냐고요.
화상통화가 아니므로 수화기 너머의 차현진이 볼 수는 없겠지만,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 남자면 된다고 전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
그러고서 말이 없다.
“…….”
업무적인 내용은 모두 주고받았고 평소였다면 이만 끊겠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왔어야하는 타이밍. 지혁은 멈칫했다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두 눈을 깜빡였다. 수화기 너머로, 차현진의 감정이 밀려오는 기분이었기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추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지혁이 그녀의 앞에서 보인 행보는 스무 살짜리가 보일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몇 달만에 뛰어난 소설가로 자리를 잡고서 승승장구하고,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대형제작사에서도 선보이지 못할 뛰어난 퀄리티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가져오는 것은 노련한 중년인이라도 힘든 일일 것이다.
차현진 그녀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고민하던 지혁은 결국 운을 떼었다.
“궁금하신가요?”
- …네. 하지만 묻지는 않겠습니다.
지혁은 눈동자를 굴렸다.
“예?”
- 작가님께서 범상치 않으신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한 충격이 가해진다고 하더라도 그뿐입니다.
“…….”
-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동류의 천재이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면 다양한 분야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던 위인이 아닌가.
마음 같아선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네요 등의 이야기를 하며 겸양을 떨고 싶지만, 사실 지금의 지혁은 그 어떤 천재를 데려다놓아도 단 하나의 분야에서도 이길 수 없는 악마 그 자체다. 신이 그에게 내려준 재능의 가능성은 무한대라고 생각될 정도로 끝이 없었으며, 이제는 그것이 두렵기까지 할 정도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번에 룸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절감한 지혁이었다.
말문이 막힌 지혁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고심하고 있을 때, 차현진이 말했다.
- 저 따위가 작가님한테 추궁할 입장도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이해하고 있고요.
지혁을 자극하려고 하는 말인 것 같지는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서 추정컨대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지혁이 보는 차현진이라는 여인은 자존감이 높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낮춘다는 것은 그녀라는 사람 안 속의 지혁이 그만큼 큰 인물로써 새겨져 있다는 뜻일 터였다.
어쨌든 차현진은 지혁에게 생긴 의문에 관해서 묻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 같다. 그건 지혁의 입장으로써는 상당히 달가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에 관해서 가타부타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암묵적 합의의 느낌이랄까.
지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로 착 가라앉은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만, 저같은 사람이 작가님을 보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