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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재능-29화 (29/116)

00029  성우 오디션  =========================================================================

‘긴장된다.’

하얀 원피스를 차려입은 통통한 체형의 여성이 따스한 햇빛 아래, 길거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봐. ]

임유선. 그녀는 성우지망생이었다.

학원 같이 다니다 불현 듯 입대해버린 아는 오빠가 갑자기 수신자부담전화로 연락이 와서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을 때, 그녀는 황당하다는 생각부터 들었었다.

[ 너 오디션 볼래? ]

그야말로 뜬금없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선배, 이승현은 군대에 있지 않은가. 그런 그가 어디서 오디션을 덥석 물어왔단 말인가.

뭔가 미심쩍었기에 처음엔 거절했지만 선배는 끈질겼다. 결국 속는셈치고 하겠다는 수락을 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어딘가에서 전화가 왔고, 웬 여성과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녀는 이승현이 장난을 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고 성우학원에 다니면서 준비를 하고 있는 초보자에 불과한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기회가 들이닥쳤으니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

초조함에 핸드백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던 그녀는 문뜩 검은색 차량이 스르르 와서 정차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윽….

“임유선 씨 되시나요?”

와, 예쁘다.

그녀의 감상평은 그랬다. 정장을 입은 여성은 안경을 슬쩍 내리면서 물었고, 그녀는 멍하니 지적인 느낌의 미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일단 타시겠습니까?”

그녀는 요청에 따라 조수석의 문을 열고 탔다. 그러자 운전석의 여인이 부드럽게 차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임유선의 기준으로 숨막히는 공기속에서 차가 달리다가 이내 신호에 걸렸고, 멈춘 순간 운전석의 여성이 품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제 충분히 설명을 드렸다고는 생각됩니다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녀가 내민 명함을 받아드니, 회사 이름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아이펜이라는 출판사 이름과 차현진이라는 그녀의 이름과 팀장이라는 직책,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이름도 멋있어.’

그녀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 차현진이 말했다.

“저희 아이펜은 유지… 아니 조커 유 님의 소설을 전담해서 출판하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지금 만나러 가는 분은 당연히 그분이고요.”

최근 장르소설계의 뜨거운 감자인 조커 유의 정체는 베일에 쌓여있었다. 공교롭게도 임유선 역시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커 유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이런 자리에 오게 된 것은 그 사실을 이승현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임유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오디션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의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저도 전달받은 것이 없어서요. 작가님께서는 그저 임유선 씨를 자택으로 데려와 달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다. 혹시 이거 뭐 다단계같은 건 아니겠지?

임유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재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법도 했다.

그때, 마치 그녀의 염려를 알아차린 것처럼 차현진이 그녀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핸드폰을 슥 내민다.

“초콜릿페이지 조커 유 계정으로 로그인 해두었습니다. 충분히 의심할 수 있을법한 상황이라고 생각되기에 증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임유선은 확인을 해 본다. 이리저리 조작을 해 보니까 확실하다. 공지사항을 작성할 수도 있고, 이래저래 수정도 가능하게 되어있다.

“확인이 되시면 저한테 핸드폰을 다시 반납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여, 여기요.”

임유선은 황급히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것을 재킷 소매에 넣는 듯하더니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운전에 집중한다.

차는 그렇게 20분 정도를 달려, 마침내 한적한 아파트단지로 들어섰다.

“도착했습니다.”

둘은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착했다. 차현진이 벨을 누르자, 안쪽에서 ‘네’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삐리릭.

곧이어 문이 열리자 임유선은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이 미남은!’

아이돌의 뺨따구를 왕복으로 후려버릴 것 같은 비주얼은 그녀에게 엄청난 쇼크로 다가왔다. 그는 방금 샤워를 한 것인지 머리칼이 젖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지독하게도 관능적이고 섹시했다.

“아, 혹시 임유선 씨?”

“네? 네, 네….”

“승현이 형한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일단 들어오시죠.”

그렇게 그녀는 집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가 얼이 빠져 있을 때, 차현진과 남자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도 같다.

“머리만 말리고 바로 나오신다고 하니 잠시만 소파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 네.”

위잉 하는 드라이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임유선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소파에 앉은채 그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곧이어 남자가 욕실이라고 생각되는 곳의 문을 열고 나왔다. 편한 복장이었지만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는 말을 실감하게끔, 너무나도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는 임유선과 눈이 맞자 곧장 다가와서는 한쪽 방향으로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이쪽으로 가실까요?”

“네!”

그를 따라서 이동한 곳에는 컴퓨터 한 대가 자리해 있었다. 컴퓨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 흔한 공기청정기나 가습기, 에어컨조차 없는 것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위잉- 흠칫!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놀란 임유선이 쳐다보자, 천장에서 스크린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남자가 모종의 조작을 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오디션이라고 해서 당황하셨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일단 하셔야 될 작품을 먼저 보여드리는 것이 순리일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 네….”

곧이어 컴퓨터의 화면이 스크린에 연결되고, 미남이 마우스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내 마우스는 ‘미완성’이라는 이름의 동영상 파일로 향했다.

딸깍.

영상이 재생되고, 전체화면으로 커지자 약속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방의 불이 꺼졌다.

“아, 잠깐만요.”

그때 남자가 영상을 정지하더니, 거실로 향해서 의자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곧이어 그것을 그가 앉았던 의자의 옆에 나란히 놓았고, 그가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임유선과 차현진이 차례대로 앉자, 그가 다시 영상을 재생한다.

‘1시간 48분 22초.’

108분 22초. 평균적인 영화의 러닝 타임(Running time)의 느낌이다. 임유선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이어 검은색 일색이던 영상에 찬찬히 색이 입혀지기 시작하는 순간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똑.

쏴아아아아….

영상의 시작은 검은 공간에 물방울 하나가 작은 파동을 만들어 하얀색 점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펼쳐지면서부터였다. 이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두운 배경에 비가 내리고 있는 장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뭐지?’

임유선은 그 순간 살짝 의문을 느꼈다. 비가 내리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미묘한 이질감이 있었는데,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흔한 도시의 풍경이 나온 순간 임유선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녀는 당연히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서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처음 장면의 비내리는 광경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도시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현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의 느낌이 아니라, ‘그림’임을 깨달아버렸다.

즉, 이것은 애니메이션 영화인 셈이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비내리는 장면을 보았을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완벽한 작화와 퀄리티로 영상이 제작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 비가 좀 그쳤으면 좋겠어 ]

[ 장마철이잖아. 어쩔 수 없지 뭐. 비가 그치면 놀러가자 ]

곧이어 자막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연인이라고 생각되는, 앳된 외모의 여성과 남성이 나왔다. 그들이 대화를 하는 듯 입을 벌렸으나, 영상이 진행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는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거늘 그들의 음성은 없었다. 입만 벙끗하는 그들이 하는 대화라고 말하는 것처럼 밑에 떠오르는 자막이 있을 뿐이었다.

효과음은 완벽하게 입혀져 있는 것 같은데, 음성은 없다. 임유선은 그 순간, ‘설마’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상은 계속 진행되었다.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남녀는 영상 초반부에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는 것으로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아주 잠깐 나왔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서 결혼한 그들이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오르고 곧이어 그들이 신혼여행을 떠났는지 화창한 날씨 아래 야자수가 보이는 해변가 근처 숙소에서 입맞춤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그 상태 그대로 밤이 되면서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을 때 여성의 배는 상당히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여성이 땀을 흘리면서 우는 아기를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이 나오고, 곧이어 모습이 전환되자 집안에서 아장아장 기어가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웃는 그들의 모습이 비춰졌다. 밤에 잠을 자다가 아이 울음소리에 깨서 달래주면서도 서로를 보며 미소짓는 그들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영상미가 뛰어나고 연출도 굉장히 훌륭했기 때문일까, 임유선은 순식간에 영상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                 *                 *

“…흑. 끅….”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에는 [ 제작 : ipen studio ]라는 글자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내가 만든 이야기지만….’

참 슬프다. 지혁은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울컥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격한 느낌을 억누른 뒤에 영상을 끄고 불을 켰다.

틱.

그는 어둡던 방이 환하게 밝혀진 순간 옆을 쳐다보았다.

승현의 소개로 곧이어 공개될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 ‘생일날의 너에게’의 여주인공 홍가인 역을 맡아줄 만한 성우지망생을 데려와 성우 녹음이 되지 않은 영화를 선보였다.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굳이 실력도 뭐도 없는 어린 지망생에 불과한 임유선이라는 여인을 데려온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전속 성우로써 키워보자.

지혁은 지난 룸에서 보냈던 긴 시간중에서 성우로써의 자질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남자의 음성은 모두 그가 녹음할 수 있을 거라고 자부할 정도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불만이 많았다.

자신의 작품은 완벽하기를 원했다. 성우의 연기력이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랬다. 물론 기존의 성우들의 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 관점의 차이에 있었다. 지혁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마치 영화처럼 그의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를 원했다. 만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조금의 위화감도 없도록 현실적인 작화와 내용, 연출을 구상하기위해 골머리를 앓았었다.

그는 그의 작품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그의 뜻대로 연기해줄 성우를 원했다. 룸에서도 늘상 했던 고민이었고, 여자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어떻게든 개발해서 혼자 모든 녹음을 다 끝내는 방안까지도 고려를 해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연기한 캐릭터들이 완성되는 장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조연급의 녹음만을 한 상태로 룸에서 나온 것이었다.

“끄흐윽…. 흑….”

임유선은 오열하고 있었다. 차현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지혁은 문뜩 궁금해졌다. 효과음만이 들어가 있는, 반쯤은 무성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상이었는데도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목소리의 녹음을 끝내고 완전한 작품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 답은, 지혁의 앞에서 울고 있는 여성이 찾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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