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On Air, Challenger Yoo =========================================================================
만난 지 몇 년씩 된 것도 아니고, 문하얀은 딱히 크게 변한 것이 없어보였다. 그녀는 아르바이트 중이었으나 잠깐 허락이라도 받은 것인지 얘기좀 하자는 말에 잠깐 기다리라더니 커피를 한 잔 타가지고 와선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때 잘 들어가셨나요?”
“네.”
할 말이 없었다. 지혁은 나름대로 회심의 질문이라고 생각한 것에 단답으로 대답한 문하얀을 쳐다보다가, 어색해서 커피를 한모금 하고서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때 갑자기 문하얀이 물어왔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뭐가… 아, 알바요?”
“네. 언니가 저희 연예인인거 말씀드렸다고 하던데.”
여기서 말하는 언니라는 것은 아마도 서하린, 그녀일 것이다.
문하얀의 말은 즉슨, 연예인인 그녀가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다는 점이 이상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스포츠 국가대표 선수들조차 생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세상이잖아요. 사정이 있으시겠거니 생각합니다.”
지혁은 그렇게 말하고서 슬쩍 핸드폰을 보았다. 은서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지혁이 핸드폰을 보는 모습을 관조하듯 바라보던 문하얀이 말했다.
“저희는 곧 해체될 것 같아요. 사실상 해체된 거나 다름없죠 뭐.”
“이제 1년 됐는데 벌써 해체합니까?”
“언니가 그것도 말해주던가요? 아… 그때 1주년이었었지.”
문하얀은 처연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커피컵을 양손으로 감싸고는 슬슬 매만졌다.
“무대 한 번 서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보다야 차라리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딱히 신세한탄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음울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최소한 끝부분은 개운함이 담겨 있었다. 연예인이라고 데뷔해놓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서 시간만 죽치는 것보다는 빠르게 그만두고 제 갈길 가는게 나은 것 같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상 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혁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연예인이 되겠다는 열망이 그렇게까지 강렬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언니들은 좀… 다르죠. 특히 하린언니는요. 언니는 예쁘잖아요. 노래도 잘하고.”
솔직히 말하면 문하얀과 이나희(라고 했던가)는 서하린에 비하면 외모적인 부분에서는 딸리는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는, 서하린이 확실히 예쁘기 때문에 생기는 비교였다.
그나저나 서하린이 노래를 잘하던가? 그때 같이 노래를 부르기는 했었는데, 술에 취했어서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해체되면 뭐할지는 생각해뒀습니까?”
“집이 그럭저럭 사는 편이라서, 어떻게든 될거에요.”
태평하구만.
“그래요. 혹시 갈 때 번호좀 주고갈 수 있나요?”
지혁의 말에 문하얀은 멈칫하는 것 같더니, 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문하얀 역시 상당히 귀여운 외모를 가진 편이여서, 지혁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혹시 저한테 작업거시는 거에요? 저번에 보니까 …그쪽…은 하린 언니한테 관심있는 거 같던데.”
이거 좀 서운한데. 아무래도 문하얀은 지혁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닙니다.”
“단호하시네. 뭐, 저도 조각미남 스타일은 취향이 아니에요.”
조각미남이라…. 역시 여자들의 눈에 지혁은 그런 느낌의 인상인가? 지혁이 약하게 웃자 문하얀은 빨대에 입가를 가져가서 커피를 마시다가 문뜩 입술을 떼었다.
“그럼 왜 제 번호를 달라는 거에요? 하린 언니 때문에? 그럼 그냥 언니번호 드릴 수 있는데.”
비슷하기는 하다. 지혁이 리플라워라는 그룹을 띄우려고 굳이 룸에서 곡까지 작곡한 건 어디까지나 서하린이라는 여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으니까.
딱히 좋아한다는 감정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계속 생각이 난다. 이게 호감이라는 감정이라면 호감인 것일지도 모른다. 지혁은 머리털나고 서하린처럼 예쁜 여성을 처음 만나봤었기 때문에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지금까지 지혁이 만난 여자들 중 가장 미인이었다. 그래서 지혁은 이 감정이 호감이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 연애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만난다면 서하린 그녀여야만 할 것 같다.
“머지않아 저를 다시 보시게 될테니까, 미리 번호를 받아두려는 겁니다.”
“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혁은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자 문하얀은 그것을 보다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는 기색이었다. 지혁은 그에 의문이 들어 뭔가 있나 싶어서 그녀따라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
뭐야.
지혁이 그런 생각을 할때였다.
“뭐, 덕분에 여기서 어깨는 좀 피겠네요.”
“…?”
무슨 말이야 이게. 설마 지혁같은 남자가 찾아와서 번호를 따가서 동료들에게 으스댈 수 있다 뭐 그런 건가? 지혁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간 문하얀이 번호를 입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곧이어 진동이 오는지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고, 번호가 맞다는 인증을 했다는 듯이 지혁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곧장 커피컵을 집어들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근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유지혁입니다.”
“저랑 동갑이었던가요?”
그럴 것이다. 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하얀이 다시 한 번 옆을 슬쩍 쳐다보더니 손을 뻗었다.
“그럼 말 놔도 되겠지? 만나서 반가웠어.”
“어? 어… 그래. 나도.”
은근한 미소를 지은 문하얀이 그렇게 카운터쪽으로 걸어갔고, 곧이어 그녀와 같은 알바생들이 그녀에게 붙어서 뭐라뭐라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이 보였다.
‘조금 서두를 필요는 있어보이는군.’
해체되게 둘 순 없지. 지혁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커피를 한모금 머금었다.
* * *
‘대충 그렇게 하면 되겠고….’
쇼핑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복귀한 지혁은 녹초가 된 상태에서 점심을 배달음식으로 떼운 뒤 컴퓨터앞에 앉았다. 그는 지금 미니게임천국 3부의 초안을 잡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이미 쓰겠다 마음먹은 순간 아이디어들이 연쇄작용처럼 다다다다 떠올라서 그것들을 정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은 생각해뒀던 부분들을 나열해보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우웅-
“여보세요.”
- 콜렉트콜입니다. 상대방을 확인하세요.
- 야….
꾹.
제대로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번호를 누른다. 그러자 전화가 연결되었다.
“형이죠?”
사실 지혁한테 콜렉트콜로 전화를 할 사람은 이승현뿐이다. 애당초 지혁은 전화올 곳도 마땅치 않았다. 쓸데없는 스팸전화조차도 별로 없는 수준이었으니.
- 어. 지혁아. 나 궁금한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승현이 인사도 없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스타일은 아닐텐데. 다짜고짜 빠르게 말하는 승현에 지혁은 의문이 들었지만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네. 뭔데요?”
- 너 혹시 조커 유냐?
…….
이 형이 어떻게 알았지? 그 생각이 든 순간 지혁은 올렸던 공지가 떠올랐다. 거기엔 자신이 스무살이며, 동생이 18살이라는 것부터 어려서 사고로 부모님과 동생을 잃었다는 그의 가정사가 적혀 있었다. 아주 없는 경우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흔한 케이스는 아닌데다가 지혁은 이전에 승현에게 소설을 쓴다고 말을 했기도 하니 승현이 ‘조커 유’를 지혁이라고 생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니게임천국을 보는 독자였다면 말이다.
“네. 공지보고 알았어요?”
- 너 맞다고? 진짜로?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고 숨길 일이었어도 그에게는 순순히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혁은 순순히 답했는데, 승현은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네. 근데 제 글을 보는 독자였어요?”
- 아니 요새 핫하잖아. 예전맹키로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보는 건 아니지만 인기 많은 것들은 종종 보거든.
그러고 보니 승현은 장르소설을 좀 읽어보았다고 했었던 것 같다.
“인기 많은 것이 제 소설이라 다행이네요.”
- 아니, 이게 아니지. 근데 진짜 너 맞다고?
이 형이 속고만 살았나. 지혁은 다소 까칠한 어투로 말했다.
“네. 저 맞아요. 안그래도 지금 미니게임천국 3부 기획하고 있다가 형 전화 받은거에요.”
- 헉. 그럼 끊어야 되나?
허허.
무슨 농담을 못하겠네. 지혁은 수화기너머로 들려오는 승현의 당황이 진심인 것 같아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의 주변사람들은 유난히 미니게임천국에 미쳐있는 걸까? 어찌된게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서 단 한명의 예외가 없다. 이제는 지혁도 사실 명작은 미니게임천국이 아니었나 헷갈릴 지경이었다.
“뭐요? 복귀하고 처음하는 통환데 지금… 장난하지 말고요. 그보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에요?”
- 어. 싸지방에서 소설 읽을 거 없나 찾고있는데 공지가 올라와 있는 거야. 그래서 서둘러 읽어봤는데 거기에 니 이야기같은 게 적혀있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해본 거야.
그렇게 된 거였군. 주말이라 한가해서 점심시간에도 전화를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복귀는 잘 했어요?”
- 그래. 첫 날부터 외박했다고 욕을 한바가지 얻어먹은 거 빼곤 완벽한 휴가였지.
사실 너무 미친 듯이 놀다가 동이 틀때쯤에서야 집으로 들어간 것이지만.
“그러니까 첫날은 그냥 가족들이랑 보내시라니까.”
- 집에 가면 렐을 못하잖아. 우리집엔 컴도 없고. 내가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알겠냐? 햐. 그리고 보니 너는 소설도 대박나고 렐도 개잘하고 면상도 A급이고 아주 살판났구나.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가 진행된다. 지혁은 그렇게 승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조커 유의 소설들을 극찬하는 승현에게 지혁이 그만좀 하라고 핀잔을 주는 식이었다.
- 야. 나중에 니 소설이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같은 걸로 제작되면 나 좀 써줘라 크크.
? 이게 무슨 말이야.
“써달라는게 무슨 소리에요?”
- 그거야 당연히… 아, 내가 말 안했나? 나 성우지망생인데.
엥?
“진짜요?”
- 어. 내가 얼굴은 안되도 목소리는 좀 되잖냐. 뭐, 그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원래부터 성우가 되고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학과도 연극영화과잖아.
지혁도 승현이 목소리가 좋다는 생각을 해온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고보니 지혁이 룸에서 공부를 할 당시 한국의 경우 성우들의 상당수가 연극영화과의 출신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
“흐음….”
순간 떠오른 생각에 지혁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 너 정도 되는 애의 글이라면 개인적으로 웹툰이 되고, 웹툰이 애니화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때가 되면 나를 좀 생각해주라.
유감이지만 승현은 군인의 신분이고, 그를 당장 성우로써 기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는 사람 정도는 있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지혁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