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23화 (2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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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식을 먹은 유은서는 화장실도 가고, 양치질도 하는 등 알차게 시간을 보낸 후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되기 전에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오늘은 수학이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낭비했다. 최근에 본 모의고사에서 그리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은 그녀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잠깐 오빠 소설좀 보고….

아직 10분이나 남아있다. 이 정도는 오늘 열심히 공부를 한 자신에게 상으로 줘도 되지 않을까. 유은서는 결국 핸드폰을 들어 올려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드르륵. 톡톡.

“뭐야.”

“뭐 읽어? 미겜천?”

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앞자리 의자를 빼고서 앉은 김찬욱이 주위를 슬쩍 보다가 얼굴을 가까이하고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혹시 3부는 아직 생각 없으시데?”

“몰라. 이래저래 찔러보기는 했는데 반응은 별로 없어.”

“야. 그러지 말고 좀 더 힘써봐. 작가님이 니 말엔 껌뻑 죽는다며.”

그건 사실이지만, 유은서는 최근 유지혁의 텐션이 저조한 것 같아서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엔 글을 쓰는 모습도 보여준 적 없고, 뭔가 다가가기가 힘든 분위기였다.

“알았어.”

그러나 오늘 아침에 본 그녀의 오빠는 최근들어 가장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한 번 은근슬쩍 말이라도 꺼내볼 수는 있을 듯하다. 미니게임천국 3부는 김찬욱의 바램이기도 하지만 은서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선뜻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었다.

유은서의 긍정이 떨어지자 김찬욱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근데 너 그림 그린다는 건 어떻게 됐어?”

유은서의 물음에 김찬욱은 표정을 굳혔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왔는데, 혹시 오늘 너희 집에 가도 될까?”

그러자 대화를 하면서도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유은서가 움찔했다. 그녀의 시선이 처음으로 김찬욱에게 똑바로 향했다.

“우리 집에?”

“어. 직접 그림을 전해드리고 싶거든.”

그녀는 고민했다. 집이 워낙 낡았기에 보여주기 창피한 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오빠가 있을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김찬욱을 무작정 데려가기는 좀 그랬다.

“그림만 드리고 바로 갈게. 안…될까?”

“아니. 그 정도야 뭐. 근데 그림은 완성한거야? 지금 가지고 있어?”

그러나 결국 그녀는 허락하고 말았다. 김찬욱이 조커 유, 그녀의 오빠 유지혁의 광팬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직접 전해주고 싶다는 팬심을 모르는게 아닌데 거절하기도 좀 뭐했다. 그렇게까지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땡큐. 당연히 가져왔지.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지금 바로 매점가서 사올게.”

김찬욱은 유은서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유은서는 그가 앞에서 호들갑을 떨던지 말던지 핸드폰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됐어. 빨리 사라져주는게 더 고마울 것 같은데.”

은서가 핸드폰을 까딱까딱 흔들면서 말하자 소설에 집중하고자하는 그녀의 의지를 알아차린 것인지 김찬욱이 알겠다며 물러났다.

- 야야. 무슨 얘기했냐?

유은서는 김찬욱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러나자 같은 반 남자애들이 김찬욱에게 우루루 몰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최근 은근히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저번에는 뜬금없이 뒤뜰로 누군가가 부르더니 고백을 해오기도 했었다.

“야. 너 찬욱이랑 무슨 얘기 했어?”

“보고 있었어? 별 얘기 안했어.”

한지은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김찬욱이 소개해줘서 친해지게 된 친구였다. 유은서가 유일하게 학급에서 같이 다니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지은과 함께 다니면서 하나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그녀가 김찬욱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 같이 가자는 건 뭔데?”

“들었구나.”

“무슨 얘기 했냐니까.”

한지은이 눈을 흘기며 말하자 유은서는 난처한 듯이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의 표시를 했다.

조커 유가 유은서의 오빠인 유지혁이라는 것을 한지은은 모른다. 애당초 소설을 보지 않는 그녀이기 때문에 그녀는 조커 유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한지은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니가 우리 대화를 이해하려면… 아니 김찬욱이랑 대화를 하려면 무조건 이 소설을 읽어야만 해. 김찬욱이 우리집에 오려는 것도 이것 때문이거든.”

“이게 뭔데?”

“우리 오빠가 쓴 게임 판타지 소설이야. 김찬욱은 우리 오빠 팬이거든. 우리집에 가려고 하는 건 팬아트를 직접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고.”

거기까지 설명하자 한지은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핸드폰과 유은서를 번갈아 보더니 그녀의 핸드폰을 슬쩍 낚아채서는 화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너희 오빠가 소설가야?”

“응. 엄청 재밌어. 곧 초콜릿페이지에도 연재될거야.”

“미니…게임천국? 이게 소설 제목이야?”

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응. 근데 이건 2부고, 1부는 따로 있어. 당연히 1부 1화부터 읽어야 돼. 읽어볼래?”

“찬욱이가 이거 좋아하는 거 확실해?”

유은서는 슬며시 웃었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니까. 직접 팬아트를 그려서 오빠한테 주고싶어할 정도니까.”

“어떻게 보는데? 내 폰으로 볼래.”

유은서는 한지은의 요청에 곧장 어플을 깔아주고, 그녀에게 유지혁의 소설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0화부터 읽기 시작하는 한지은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은서는 이내 고개를 돌려 소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따라라라란~ 따라라라란~ 따라라란 따라라라라란~

종소리가 나고 유은서는 빠르게 핸드폰을 집어넣은 다음 수학책을 펼쳤다.

사각사각사각사각.

1번.

답지를 확인해보니 정답이다. 유은서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서 2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왜?”

한지은이 옷소매를 잡아당기길래 유은서가 그렇게 묻자, 그녀가 말했다.

“결제를 해야 된대.”

무료분을 모두 읽은 모양이었다. 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결제를 해야지. 유료소설이니까.”

“무료로는 못 보는 거야?”

보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은서 역시 유지혁의 아이디로 접속해서 소설을 읽고 있으니까. 그러나 오빠의 아이디를 함부로 누군가에게 알려주기도 좀 그렇다.

“응.”

“너는 다 결제해서 봤어?”

“나는 오빠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봤지.”

“그럼 나는?”

“너는 결제하고 봐야지.”

순간 한지은의 얼굴에 너무한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유은서는 단호했다.

“지금도 몇만명이 결제하면서 보고 있어.”

“몇만명? 그걸 어떻게 알아?”

유은서는 한지은의 물음에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사실 그녀는 안그래도 그간 한지은에게 유지혁의 위대함에 대해서 자랑을 하고 싶었다. 허나 꾹꾹 참았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거 자신의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소설가인지 잔뜩 어필할 생각이었다.

“여기 봐봐. 이게 오늘의 베스트 소설들인데 1위부터 4위까지가….”

*                 *                 *

9시가 된 것을 확인한 지혁은 곧장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 여보세요?

“어 은서야. 수업 끝났지?

- 응. 왜?

“오빠 지금 학교 앞이거든. 같이 가자.”

- 아 진짜? 갑자기 왜?

“그냥… 뭐, 일이 있어서 밖에 나왔다가 겸사겸사 시간도 맞고 해서.”

- 어… 잠깐만~

곧이어 은서가 주위에 뭐라고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혹시 친구들이랑 약속이라도 있었나?’

지혁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잠자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 지금 정문 쪽이야?

“어.”

- 바로 내려갈게. 조금만 기다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같이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지혁은 은서의 말에 안도했다.

이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실 지혁이 한 것은 없었다. 그저 가서 확인을 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내부 인테리어는 꽤나 정갈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에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붙어있고, 벽걸이 TV 앞에 소파가 있는 등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다. 지혁이 룸에서 시간을 보낼 때 사용했던 대저택에 비하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그건 기준점이 잘못된 것이다. 은서와 같이 지냈던 낡은 집에 비하면 새로 살게될 아파트는 호화저택 수준이었다.

지혁은 아직 은서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깜짝 놀래켜줄 생각으로 굳이 학교앞까지  찾아온 것이다.

‘하루종일 양복을 입고 있었더니 좀 불편하네.’

지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넥타이를 슬쩍 풀었다.

“오빠!”

다소 뻘쭘하게 정문에서 나오는 고등학생들이 은근히 보내는 시선을 받아넘기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은서가 나오고 있었다. 헌데 손을 흔드는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김찬욱이랬나?’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거기다 은서와 친구라고 생각되는 여고생도 한 명 있었다.

지혁은 은서가 다가오자 장난스럽게 물었다.

“공부 열심히 했음?”

“완전 열심히 했음~”

“근데… 친구들? 이 친구는 낯이 익네.”

그러자 남자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존경하는 작가님. 이렇게 다시 만나뵈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뭐래.

지혁이 딱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자, 은서가 받아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아… 재밌게 읽어줘서 고마워. 말 놔도 되지?”

“물론입니다. 편하게 하십시오.”

이것 좀 부담스러운데.

지혁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는데 문뜩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은서의 동급생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애가 보였다.

‘한지은?’

명찰에 써있는 이름을 속으로 읽어본 지혁이 가볍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 은서 친구니?”

“네….”

…? 왜 저래.

무난한 인사였던 것 같은데, 한지은이라는 아이는 황급히 은서의 뒤에 숨는 모습을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가보네.’

생각해보면 지혁 역시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때 은서가 김찬욱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김찬욱이 정신을 차렸는지 갑자기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한다.

지혁이 뭐하는 짓인지 유심히 보고 있는데, 은서가 옆에서 설명했다.

“저번에 말했던 거. 얘가 팬아트를 그렸는데 오늘 완성해서 오빠한테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했었거든. 그래서 우리집에 가려고 했었는데 마침 오빠가 이렇게 딱 왔네?”

아하.

‘…!’

하고 납득하려던 지혁은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은서의 눈동자를.

가난. 그 지독한 녀석이 아직까지도 은서를 괴롭히고 있는 듯하다. 물론 지혁은 은서에게 벌어들이는 수익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고 있고, 그렇기에 은서는 이제 돈 걱정은 안하겠지만 그녀는 아직 이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입장에서는 친구들에게 허름한 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

지혁은 서프라이즈를 목적으로 그간 숨겼던 자신의 미련함을 후회했다. 은서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살게 해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헌데 은서는 지혁이 찾아와서 집에 가지 않고서 해결되는 이 상황에 안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혁은 순간 충동적으로 말했다.

“아니, 그러면 둘이 집에 잠깐 들러서 놀다 가.”

“으, 응?”

“네? 아니 괜찮습니다. 작가님한테 너무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지금 집필은 쉬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작가님이라고 하지 말고 편하게 형님이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지금 조커 유가 아니라 은서 오빠 유지혁으로 여기 있는 거거든.”

“그래도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행님. 역시 다르십니다. 대사 하나하나가 심금을 울립니다.”

…….

이 놈 이거 뭐 정신병같은거 있는 거 아니야?

흡사 광신도같아 보이는 김찬욱의 모습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지혁은 불안해보이는 은서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안 그래도 오늘 이사를 해서 은서를 데리러 온거기도 하거든. 너희가 집들이좀 해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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