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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재능-22화 (2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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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길었던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이 순간. 지혁은 후련함, 아쉬움 등의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한데 섞여서 북받쳐 오르는 것을 깨닫고서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간의 시간들이 스치듯 떠오른다.

그의 기억, 의식은 멀쩡하다. 3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로 돌아갔을 때 달라진 게 없었던 것에서 어렴풋이 눈치채기는 했었지만 룸에서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개념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분명 생생한 하루하루였지만, 막상 현대로 돌아가면 룸으로 진입하기 전의 그와 전혀 다른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금방이었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혁의 예상보다는 빠르게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거기다 그것은 지혁이 체감하기에는 별로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소설을 썼던 지난 3년과는 다소 대비되는 느낌으로 말이다.

그때의 3년이 지혁에게 경험치로써 다가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몰입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체감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우드드드드드듯!

지혁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폈다.

글쓰는 것에 재능은 없어도, 그림 그리는 것엔 재능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소설을 쓰는 지난 3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뜻일까. 지혁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굉장히 빠른 시간에 모든 것을 숙달해갔고, 8년이라는 시간만에 홀로 3개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대장정을 끝내고 만다. 혼자서 한 일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성우 쪽만 어떻게 해결해도 편할 텐데.’

다른 모든 것은 완벽하다. 심지어는 지혁은 그간 성우로써의 공부도 충실히해서, 남자 조연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녹음을 마쳐둔 상태였다. 그러나 중요한 주연, 그리고 여성 캐릭터들의 목소리는 비어있다.

‘편하게 생각하자. 이것만 해결하면 되는 거니까.’

반대로 그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볼 수도 있었다.

특히 지혁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의외의 복병이었던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이었다.

어느 순간 영화 등의 영상이 끝나고 제작 참여자들의 명단이 주루루 떠오르는 그것을 떠올릴 수 있었고 큰 고민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지혁은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하고,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가한 것은 자신뿐이다. 필요한 모든 것들이 그의 손에서 완성되고, 해결되어 갔다. 하지만 영상을 만든다는 것은 간단해 보여도 굉장한 지식, 노력 등이 필요한 일이었다. 현대로 돌아갔을 때 애니메이션 영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에 알렸을 경우, 제작진에 대한 의문이 생겨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지혁은 큰 난관에 봉착해버린 것이다. 스무 살인 자기가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니까. 물론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지혁이 만든 분량은 몇주를 떼울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하니, 시청자들이 납득을 할만한 거리가 못 된다.

‘컴퓨터를 가져갈 수 있어야 할텐데….’

지혁은 용량 자체는 충분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저울에 올려져 있는 본체를 쳐다보았다.

물론 대용량 USB에 자료는 미리 넣어두었다. 하지만 USB만 가지고 갈 수는 없다.

이 컴퓨터는 지혁이 직접 개조한 본체인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보다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를 원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래야만 현대로 반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될거야.’

그러나 많은 시간을 공들인 것의 생존유무와도 직결되는 문제를 운 따위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은 지혁 입장으로써는 굉장히 찝찝한 일이었다. 만약 이 본체가 현대로의 반입이 안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물론 새로이 만들면 되는 일이겠지만, 상당히 번거로울 것이다. 이 안에는 엔딩 크레딧 등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많은 요소들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 모든 것들을 따로 USB에 넣어두기는 했으나, 그냥 마음 편하게 본체가 딸려왔으면 싶다.

“후….”

지혁은 정든 저택을 돌아보았다.

정확히 13년 1개월을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끝낸 것은 룸에 도착하고 8년하고 2개월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그 후로 지혁은 작곡도 하고, 여러 가지 기술도 익히는 과정에서 추가로 5년의 시간을 더 소요했다. 그 시간이 아깝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는 한다.

‘…….’

무려 13년동안 살았던 저택.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서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았으나, 정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한참을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지혁은 한참동안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다 이내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USB들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 준비해둔 택배 상자에 본체와 주머니를 넣는다.

그 다음 샤워장에 가서 샤워를 하고 몸을 깨끗이한 그는 한쪽에 고이 모셔두었던 그가 입고왔던 옷을 챙겨 입었다. 물론 굳이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더라도 현대로 돌아갔을 경우 본래의 그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냥 이렇게 해보고 싶었다. 이번에 룸에서 보냈던 시간은 유난히 길었기에, 돌아간다는 일종의 의식으로써 취급하고 싶었던 것이다.

< 재능을 익히다보면, 배움이 가속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거야. 설령 관심이 없었더라도, 그쪽에 재능이 없었더라도 빠르게 익히게 된다는 뜻이지. 그것은 지난날 익혀온 많은 것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시너지를 낸다고 이해하면 되네. >

< 결국 나중에는 익힌 재능을 사용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뿐일거란 얘기지. >

적어도 이번 생(룸에서의 시간)은 신의 말대로 진행되었다. 그는 무언가를 익히는데 소요한 시간보다, 무언가를 만드는데 쓰는 시간이 더 길었던 것이다.

꼼꼼하게 복장을 확인한 지혁은 가볍게 한 번 점프해서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착지한 후, 상자에 손을 얹고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룸(Room).’

슈아아악!

돌아왔음을 직감한 순간, 지혁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본체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상자가 자리한 것을 보니 기분이 다 좋아진다.

‘확실하군.’

혹시 내용물이 빠져있지는 않을까 생각되어서 상자를 들어본 지혁은 느껴지는 묵직함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지혁은 집앞에서 들어가기 직전에 룸에서 갔었기 때문에 도착해도 여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늦은 새벽이니만큼 사람은 없었다. 지혁은 상자를 밖에 두기가 좀 불안했기 때문에 결국 상자채 들고서 문을 열었다.

드…르…륵.

자고 있을 은서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집안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지혁은 슬며시 밖에 내려놓았던 상자를 들어올려 안으로 진입했다. 문을 살포시 닫고 신발을 벗어서 상자를 한쪽에 잘 모셔둔다.

‘나도 잠을 좀 자둬야지.’

피곤한 상태로 돌아왔고, 샤워도 마쳐둔 상태다. 지혁은 곧장 이불을 덮으며 바닥에 누웠다. 룸에서의 포근한 침대에 비하면 딱딱했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                 *                 *

“오빠. 이건 뭐야?”

“아~ 그거 출판사 사무실에 요청해서 받아온 택배야.”

“그렇구나.”

아침. 지혁은 반쯤 감긴 눈으로 은서가 차려준 식탁에 앉아서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고 있었다. 곧이어 그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후루루룩.

“아, 좋다.”

얼큰한 콩나물국을 그릇채 들고 마신 지혁이 그렇게 말하자 은서가 눈을 흘겼다.

“조심 좀 해. 그러다 잡아먹힐라.”

…?

“잡아먹힌다는게 뭔 소리야?”

“여자들이 호시탐탐 오빠를 노리고 있을 거란 말이지.”

승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제 어느정도 내성이 생겼는데, 하다하다 은서까지 이런 멘트를 날려올 줄이야. 지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침부터 뭔 헛소리야.”

“헛소리가 아니야 오빠. 조심해. 남자들이 예쁜 여자보고 헤벌레~ 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잘생긴 남자를 보면 정신을 못차린다구.”

“…….”

지혁은 그 뒤로도 은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즐거웠다.

“오빠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 왜 이렇게 실실 웃어? 요즘 좀 저기압인 것 같더니.” “내가?”

오른손으로 뺨을 가볍게 쓸며 그렇게 반문하던 지혁은 룸으로 떠나기 전에 소설과 만화 등에 대한 고민을 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른 시간에 룸으로의 여정을 결정했을 정도로 그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티 안내려고 노력했었는데, 은서에게는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님 말구. 늦었다. 나 갈게.”

“어. 갔다와~”

은서가 가고, 지혁은 서둘러 밥을 먹은 뒤에 설거지를 끝냈다.

‘가볼까.’

현대의 시간을 기준으로 치면 어제 차현진을 통해서 집의 구매가 끝났고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는 전달 받았다. 그래서 룸으로 떠난 것이기도 했다. 위치는 은서가 다니는 하경고 근처의 아파트로 정했다.

- TV나 소파, 냉장고 등 필요한 가전기기는 챙겨두었지만 제가 챙길 수 없는 것들도 몇 가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의류 등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부탁하기 좀 민망했는데, 차현진은 출판사의 작가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고, 직원으로써의 일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는 것이라면서 개의치않고 준비해주었다. 지혁은 그저 돈을 주었을 뿐이고, 집을 매매하고 가전제품을 구비하는 등의 모든 행위는 차현진이 대리해서 수행해주었다. 꼭 개인비서같은 느낌이었던 데다 차현진이 성의껏 그 절차를 밟아주는 것이 눈에 보였기에 지혁은 그녀에게 꽤 마음을 연 상태였다.

지혁은 이 집에 있는 물품 대부분을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속옷이나 양말, 옷까지도 전부. 딱히 은서가 애지중지 여기는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건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지독하고도 지긋한 가난의 잔재를 조금도 챙겨가고 싶지 않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똑똑.

- 차현진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드르륵.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꽤 잘 어울렸다.

“챙기실 짐은 없으신가요?”

“이거면 됩니다.”

지혁은 컴퓨터 본체가 들어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USB가 담겨있는 주머니는 미리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상태였다. 참고로 거기엔 지혁이 룸으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간 소설이 담긴 USB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 그 이외엔 전부 버리겠습니다. 주인아주머니랑은 얘기가 끝났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이사 축하겸 개인적인 선물입니다.”

선물? 지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차현진이 건넨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갑자기 웬 선물이에요?”

“월급 많이 주는 사장님은 받아도 됩니다.”

답지않게 농담을 하는 것을 보니 쑥스러운 모양이다. 지혁은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양복이네요?”

“네. 저는 나가있겠습니다. 바로 갈아입으시죠.”

차현진이 나가서 문을 닫았고, 어안이 벙벙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지혁은 이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회색의 속옷도 있었다.

검은색의 슈트는 귀신같이 지혁의 체형에 딱 맞았다.

“잘 어울리시네요. 혹시 안 맞는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뇨. 저를 뽑아주신 것에 제가 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차현진은 조커 유의 광팬이기도 하다. 차현진은 그렇게 지혁을 민망하게 하더니 본체가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 올리려는 듯 무릎을 굽혔다. 지혁은 자기가 들겠다고 나서면서 상자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상자를 든 채로 밖으로 나가자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문 열어드리겠습니다. 뒷자리에 실으시죠.”

“팀장님 차인가요?”

“아뇨. 회사 명의로 된 것으로 하나 구입했습니다. 이래저래 이동할 일도 많고 하다보니.”

하기사 벌어들이는 돈이 많으니까 공용차량 하나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게 있다면 주저하지말고 돈을 써서 사라는 지시를 내려두기도 했었고. 지혁은 변명하듯 설명을 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걱정 마세요. 알아서 잘 하실거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지혁은 차현진이 문을 열어주자 상자를 조심스럽게 뒷자석에 앉히듯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굽혔던 허리를 일으키니 문뜩,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수행하는 차현진에 대기시켜두는 차까지. 그림이 누가봐도 성공해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구도라서 그런지, 사람들의 눈빛에 언뜻 부러움이 있는 것도 같다. 지혁은 왠지 모를 우월감, 성취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조수석에 앉았다. 흔히 말하는 회장님 자리도 비어있기는 했지만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네.”

지혁은 면허가 없기 때문에 운전은 차현진이.

그렇게 그를 태운 차량은 부드럽게 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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