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비상(飛上) =========================================================================
룸에서 3년가량의 시간을 소설이라는 것을 위해 투자하면서 지혁은 자신이 작품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를 즐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글이라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혁은 조각이나 미술 등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글, 만화, 영상 등을 만들어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혁은 심도깊은 고찰을 통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즐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쓴 20여개의 소설은 모두, 지혁이 만들어낸 세상들인 것이다.
‘본래 계획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지혁은 최소한 1년 정도는 소설로 인한 수확을 통해서 돈을 벌고, 쓰는 과정을 겪으려고 했었다. 그것은 룸에서의 삶과, 현대에서의 삶을 떨어트려놓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발상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3년에 비하면 1년은 당연히 짧은 시간이고, 현대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룸에서의 시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지혁은 룸에서 가만히 멍때리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있었기 때문에.
물론 앞으로의 일을 위한 휴식시간이라는 인식도 있기는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지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그저 소설을 썼을 뿐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그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 그것을 글로써 표현해낸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흥겨워서 지혁은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혁이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냐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만약 지혁이 정말로 자신을 소설가로써 생각을 하였다면 그는 은서나 차현진 등이 미니게임천국 3부의 연재를 요청했을 때 선뜻 수락해주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을 재밌게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소설가로써 엄청난 기쁨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혁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지혁은 자신의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봐준다면 그것으로 그만인 사람이었다.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돈 걱정 안해도 될만큼의 금액을 벌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소설 하나만 보고 살아갈 인생이라고 하기에 그가 가진 재능은 너무나도 많았고, 그는 소설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생각 자체가 없었다. 소설은 그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혹은 수없이 많은 분야 중에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을 뿐인.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하나의 분야.
딱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 말했잖아. 오빠가 소설을 쓰는 것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국제적인 낭비야. 오빠는 무조건 글을 써야만 해. >
<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야. 룸에 의존하게 되다가는 언젠가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 분명. >
지혁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요동치는 갈대처럼 유한 것 같아 보여도, 누군가의 말에 쉽게 현혹될 것 같은 팔랑귀처럼 보여도 의외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움직인다.
설령 그것이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말이거나, 지혁에게 있어 자신보다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존재인 유일한 혈연관계의 은서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언제든 새로운 무언가를 익히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고,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룸으로 향하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룸에 들어와야만 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 아이시스 : 이렇게 재밌는 소설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
지혁은 어느 순간에 보았을 그 댓글의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건 지혁에게 있어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댓글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댓글을 보고 있는 지혁의 마음이 문제였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덤덤한 것에서, 지혁은 깨달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소설’이라는 것은 지혁의 마음을 뒤흔들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단기간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성과를 낸 것이 지혁에게 있어서는 독으로 작용되었다고 본다. 심지어는 지혁이 혹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던 후유가조차 승승장구하는 것에서, 지혁은 ‘작가’로써의 역량은 최고수준이 된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성과가 증명하고 있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깨달을 수 있었다.
숙제.
지혁은 룸에서 소설을 쓸 때 의무감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없었다. 헌데 미니게임천국 2부를 한창 쓰고 있던 지혁은 문뜩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처음 집필을 시작했을 때의 두근거림. 그것은 지금도 생생하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지혁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
익숙해져 있다.
그 순간 숙제라는 단어가 떠올라버린 것이다.
지혁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반강제적인 느낌으로 미니게임천국 2부를 쓸 당시의 지혁이 어땠는가. 마치 숙제를 하는 것처럼 빨리 끝내자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결코 예정에도 없었던 글을 추가로 써야되서 혹은 쉬고싶은데 억지로 글을 쓰게 되어서 생긴 현상이 아니었다. 새로운 글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지혁은 분명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왜 그럴까?
그 답을 지혁은 알고 있었다.
그의 추가하는 궁극적인 것을 소설에 투영하고 있으며, 자신은 소설가이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완전체가 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어.”
지혁은 원래 룸에서 독하게 있다가 기존에 세웠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야 현대로 넘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성실하게 나아간다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내 자신의 정신력, 의지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하는 한탄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생활 자체가 힘겹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래서 결국 기본 밑바탕이라고 생각되었던 집필만을 끝내놓고서 세상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무작정 뛰어나간 것은 아니다. 결국 지혁은 현대로 넘어가는 결정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의 철칙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의 기준점을 세우게 된다.
1. 이전에 보냈던 룸에서의 시간이 현대에서 뚜렷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것.
2. 룸에서의 시간이 간절해질 것.
지혁은 그 두 개의 요건을 모두 만족했다고 생각했기에 지금, 이곳 룸에 존재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익히고 싶다.’
그런 열망이 지혁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에도 긍정적인 영향으로써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지혁이 진짜로 원했던 건 만화였다.
그는 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시절에도 종종 구석진 곳에서 만화를 그리곤 했었다. 만화책도 많이 읽어보았고 만화영화, 애니메이션도 두루 섭렵했다. 게임에도 조금의 흥미가 없었던 그의 취미는 다름아닌 만화책보기였던 것이다.
‘역시 그냥 만화로 시작했어야 했나?’
딱히 3년전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혁은 괜히 소설가의 길을 걸었나 하는 후회도 종종 했었다. 처음에는 겸사겸사 캐릭터들간의 대화에도 도움이 될테고, 공부하는 김에 글솜씨도 키우자는 등의 목적이 있었을 뿐인데, 하다보니까 집필 솜씨가 월등해져 있었고, 원작을 쓴다는 개념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사실상 지혁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만드는 것에 미쳤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라도 내 길을 걷자.”
지혁은 그가 쓴 소설 중에서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작품 3개를 골라둔 상태였다. 원래는 ‘왕(王)’까지 4개였는데, 왕은 분량도 길고해서 제외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겠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지혁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애니메이션. 지혁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캐릭터들의 목소리, 즉 성우의 캐스팅만을 제외한 모든 작업을 혼자서 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글을 쓰기만 하면 되는 소설과는 다르게 애니메이션은 ‘영상’이다. 지혁이 한 시간 동안 써낸 스토리를 영상으로 제작하려면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며칠은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스토리 기획적인 부분이야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충분히 다졌다.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과정 전체를 보면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그림, 촬영, BGM 등 해결해야할 요소는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지혁은 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여기 와있는 것이었다.
신에게서 받은 재능의 검증은 끝났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수준에 오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한 달. 따라서 지혁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모든 분야의 지식을 익히고 실력을 키우는데 소요될 거라 예상되는 시간도 1년 정도다.
‘1년에 걸쳐서 실력을 다진 후….’
개인적으로 지혁의 마음에 드는 3개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겠다 다짐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단편 로맨스 소설이고, 하나는 단편(10권 이하의 분량을 가진) 장르 소설이며, 하나는 장편 장르 소설이다.
지혁이 소설가로써 느꼈던 공허함, 지루함은 자신이 애당초 지금껏 살아오면서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접해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판단했다. 지혁은 살면서 소설을 읽어본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로 책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인 것이다. 허나 영상은 다르다. 지혁은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면서 나도 이런 ‘영상’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었기 때문이다.
‘엄청 오래 걸리겠지.’
그러나 지혁은 지난 3년동안 룸에서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사실을 더 알아차렸다.
지식은 쌓여도, 그의 의식 수준은 달라지지 않는다.
3년동안 소설을 써냈으나, 그 과정을 통해서 지혁은 별로 달라진게 없었다.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늙어버렸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추측에 의존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혁이 룸에서 100년을 보낸다고 한들 갑자기 노쇠한 할아버지와도 같은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늙지도 않는다던 신의 말에는 아마 그런 의미도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해보는 수밖에….’
얼마나 걸릴까. 10년? 20년?
확실한 것은, 소설 수십편 써내는 것보다는 몇 배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작곡.’
지혁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인의 얼굴을 되새겼다.
서하린.
그녀는 리플라워라는 이름의 걸그룹에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이다. 지혁은 지금 그녀에게 호감이라는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비단 그녀에게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라 그건 전세계에 있는 어떤 여성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지혁은 전적으로 승현의 사상에 동의한다. 그는 감정은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내는 시간에 따라 커지고, 풍부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와의 접점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일단 만나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혁은 거기서 작곡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어차피 음악을 만들기는 해야 돼.’
BGM없는 애니메이션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지혁은 작곡적인 능력도 기를 생각이었다. 가수들의 곡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의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프닝이랑 엔딩곡을 넣을지도 고민해봐야겠지.’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지혁은 따로 오프닝 곡이나 엔딩 곡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지혁이 룸에서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은 TV등에서 방영을 할 것이 아니라,
아이튜브에 올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지혁이 굳이 아이펜 스튜디오라고 채널이름을 정해둔 것은 그런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조금 더, 차차 고민해보자.’
지혁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에 따라서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심정으로는 그냥 자신의 채널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무료로 공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막상 엄청난 노력을 했다면 그때가서는 수익적인 부분에서 이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애니메이션 3개와 대중적인 음악 수십 개.”
지혁은 그렇게 두 가지의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린다. 올올이 돋아오르는 소름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고있을 정도였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이상으로, 활화산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고양감이 전신을 휘감는 것이 온 몸 전체에서 선명하게 느껴진다. 유례없는 향상심이 무의식 깊은곳에서부터 용솟음치는 것 같다.
지혁은 자신의 내면에 잠들어있을 무한한 가능성에 타는듯한 강렬한 투지가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해주겠어.’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