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비상(飛上) =========================================================================
“근데 너 렐 한지 두 달밖에 안 됐다면서.”
“네.”
“두달만에 랭킹 4등을 찍었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좀 대단한 것 같기는 하다.
“네.”
지혁의 덤덤한 말에 승현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가능해?”
“불가능할 건 없지 않나요?”
지혁이 보기에 렐은 아직 완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력차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나 밸런스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되고,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효율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는 게임이었다.
“재능충이었냐?”
“글쎄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지혁은 재능이 뛰어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렐이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게임이라서 그렇지, 다른 게임이었으면 한 달도 긴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지혁이 무언가를 익히기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익혀보는 과정을 통해서 지혁은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체감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기준으로 치자면 두 달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승현이 고기쌈을 싸면서 여상하게 묻는다.
“그 뒤로 서하린 씨랑은 만났냐?”
이제는 그런 사람이 있었지 싶다. 예전에 승현과 통화할 때 잠깐 생각했었던 이후로도 간간히 그녀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대단한 감정을 품고서 생각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뇨.”
“그럼 뭐 만나는 여자는 있고?”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희안하네. 니 정도 되는 애가 길거리를 쏘다니는데 이렇게 잠잠할 수가 있나?”
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오늘도 형 기다리는데 번호 달라고 한 사람 있었어요.”
그 이전에 길을 물었던 외국인들도 있기는 했지만.
지혁이 그렇게 말하자 승현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본다.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그래서?”
“거절했어요.”
“왜? 안 예쁘더나?”
음… 솔직히 말해서 예쁘기는 했다. 그러나 왠지 마음이 가질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아직 마음에 준비가 되질 않은 것 같았다. 저번에 노래방에서처럼 급작스러운 상황에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는 이상, 지혁은 당분간 누군가를 만날 일이 없을 듯하다.
그것은 지혁의 자격지심과도 관계가 있었다. 부모님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대학교를 들어가고 나서야 떳떳하게 누군가를 만나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들어서 지혁은 자기 자신이 자존감이 부족한 타입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리라.
“아뇨. 제가 아직 연애를 할 때가 아닌 거 같아가지고.”
“…하는 일이 잘 안되나?”
너무 잘 되고 있다.
“아뇨. 일은 잘 되는데, 제 자신이 떳떳해질 때까지는 누굴 만나는게 좀 힘들지 않을까. 요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직 누굴 만날 생각이 없다고나 할까.”
지혁의 말에 승현은 반쯤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탁 소리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야. 만날 생각이라는게 어딨냐? 일하는 거 잘 되고 난 다음에, 아니면 뭐 자리를 좀 잡고 난 다음에. 아직 내가 부족한게 많아서. 그런 생각하면 연애 어떻게 하냐?”
승현은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점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사람은 뭐든 부족한 부분이 있어. 부족하기 때문에 재밌는 거고, 노력으로 채워나가는 과정이 더 대단해보이고 좋은 거야. 그리고 우리는 쥐뿔도 없는 20대 초반인데 모자란게 있어야 정상 아니냐.”
옳은 말이다. 게다가 승현의 말은 지혁의 사상과도 부합하는 느낌이었다.
“하는 일이 안정화되면 그때가서 생각해보려는 거, 니 심정 잘 알겠는데. 니는 니 생각보다 더 괜찮은 놈이다. 뭐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고 기회 있으면 일단 만나보는 거지. 니도 곧 군대도 가야할텐데.”
그런가? 지혁은 승현의 말에 설득되어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근데 지혁은 군대 면제인데. 이 형은 지혁의 사정을 알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 경험해보는 거지 뭐. 에휴. 내가 이런 말 백번 해봐야 니가 결정하는 거 아니겠나? 알아서 해라. 이모! 여기 맥주 한 병 더 갖다주세요.”
“네~”
지혁은 승현의 말을 곱씹으며 진짜 아무나 한 명 만나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근데 니가 하는 일이라는게 뭔데?”
“네?”
“니 저번에도 막 그랬잖아. 뭐 1년도 안 걸릴 거라는 둥.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길래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노?”
굳이 숨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 지혁은 순순히 답했다.
“아, 저 소설 써요.”
“소설? 니가?”
가소롭다는 느낌의 어투는 아니었다. 의외라는 느낌이랄까.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묻는듯한 표정에 지혁이 입을 열었다.
“네. 판타지 소설. 그런 거 써요.”
“아~ 어디서 볼 수 있는데?”
“보시게요?”
지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서라는 전례가 있기 때문에, 지인에게 소설을 보여준다는 행위 자체에 신중함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어. 나도 고딩때 무협이나 겜판 같은거 많이 봤었거든. 이 형이 독자의 입장으로써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려주마.”
마치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대는 승현을 바라보던 지혁은 툭 내뱉었다.
“부끄러워서 싫어요.”
“아 뭐가 부끄럽노.”
승현은 계속해서 지혁에게 알려달라고 졸랐지만 지혁은 꿋꿋하게 거절했다. 지혁이 끈질기게 달라붙어도 알려주지 않자 승현은 결국 포기했다.
그는 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야, 그보다 니 방송 안 해볼래?”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가.
“방송이요?”
“어. 개인방송. 니는 잘생겼으니까 캠방송을 해도 되고. 아니면 노래 잘부르니까 노래 부르는 방송이라도 하던가. 그리고 보니 니 렐도 잘하네. 렐 방송해도 되겠고. 할 게 넘쳐나지 않냐? 요새 개인방송인이 돈도 많이 번다는데 니도 한 번 해볼 생각 없냐?”
지혁은 이제 돈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방송을 하는 것이 끌리는 건 사실이었다. 왠지 재밌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혁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번 해볼까?’
* * *
‘룸(Room).’
그 뒤로 지혁은 승현과 실컷 놀았다. 이전과 비슷한 정도로 술을 마시고 마신 상태로 노래방에 가서 노래도 실컷 불렀다. 물론 이전과 같은 특별한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지혁은 한 가지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술이 쌔졌어.’
승현과 술을 질퍽하게 마신 것이 두 번. 그것 이외에 지혁은 술을 마신 경험이 없었다. 헌데 저번보다 더 많은 양을 마셨음에도 지혁은 필름이 끊기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혁의 주량이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재능의 일종…인 거겠지?’
그게 아니면 지금과 같은 기현상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혁은 이와같은 사실에서 자신의 가설이 맞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은 익히는 속도 등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혁이 본래 그 분야에 얼마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느냐에 따라서 초기의 재능도 차이를 보인다는 소리. 신은 거기서 ‘위화감’이라는 단어를 썼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못했던 것이 시작부터 말도 안되게 잘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 아마 위화감이라는 것은 그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나는 원래 술을 잘 마시지 못했을 거란 뜻이군.’
그렇기에 처음부터 술을 잘마시는 일은 없다. 하지만 지혁이 앞으로 술을 계속해서 마셔 나간다면, 지혁의 주량은 끝도 모르고 상승할 것이 분명했다. 성장의 한계치가 월등히 높을 것이라고 했으니, 주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뛰어넘을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
지혁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뻗어서 자는 것이 아니라 룸으로 왔다. 물론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고 시간도 늦었으니까 지금 바로 잘 생각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잠깐 생각해볼 시간을 가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오래있어야 할 것 같아.’
룸에 오는 것은 세 번째. 첫 번째에서는 3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때는 한 달.
그리고 이번에는 10년 정도를 잡고 있었다. 사실 이것도 정확하지 않다.
처음에 룸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지혁은 신이 내려주었다는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때는 10년을 기약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까놓고 보니 그가 가진 재능이라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지혁의 상태로써 평가했을 때 필요한 시간. 그것이 바로 10년이었다. 아니, 사실은 10년이 아니라 몇십년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 지혁은 그것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야할 것은 크게 2가지.’
사실 원래는 한 가지만을 목표로 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승현과의 대화를 통해서 지혁은 하나의 분야를 더 익혀보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물론 기존의 하나에 포함되는 분야이기는 한데, 세부적으로 따지면 조금 다른 것이었다.
‘할 수 있어.’
이제 소설은 궤도에 접어들었다. 굳이 더 투자할 이유도 없고, 할 생각도 없었다. 새로이 하고자 하는 일은 소설과 아주 연관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같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은 룸을 남용하지 말라고 했지만, 지혁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최근에는 그런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너무 이르게 접속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게될 일, 조금 앞당겼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파앗!
상상하는 것으로 대저택이 나타난다. 집의 크기는 지혁이 룸에 머물고자하는 시간의 크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혁은 으리으리한 저택을 쳐다보면서 손바닥을 팡팡 부딪혔다.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