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비상(飛上) =========================================================================
- 문이 열립니다.
지혁은 지하철 환승역에서 내렸다. 오후 3시. 점심시간도 훌쩍 지났고, 퇴근 때도 아니라서 그런지 지하철은 비교적 한산했다.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나선 지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현은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노래나 좀 들어볼까.’
룸에서 노래실력을 갈고닦은 뒤로 지혁은 시간이 날때마다 음악을 듣는 것을 습관화하고 있었다. 문화와 단절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지혁은 누구나가 알법한 곡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음악적 지식, 경험 수준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막 노래를 듣기 위해 어플에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Excuse me. Can I ask you a question?”
갑자기 들린 영어에 지혁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근원지를 쳐다보니, 금발의 외국인 남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Yeah.”
“You speak english?”
“Yes.”
“Oh~”
살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는 곧이어 영어로 해운대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지혁 역시 영어로 답해주었다.
[ 해운대를 가려면 표를 끊어야 하는데, 여기 이 기계를 이용하면 됩니다. 네 돈을 거기 넣고… 네. 그 표를 갈 때 넣어서 가는데, 3호선을 타고 종점인 수영까지 간 다음에 2호선으로 갈아타서 해운대 방향쪽으로 가시면 되요. ]
다행히 이해했는지 그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지혁이 숨을 크게 내쉬며 본래의 의도대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 Excuse me. ]
아, 뭐야.
이번에는 동양인 여성으로 생각되는 여성이 질문해온다. 지혁은 내 관상이 네비게이션형(?)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다시 응대를 해주기 시작했다.
[ Yeah. ]
[ 음... 웨어루… 매그도나르도…. ]
발음을 통해서 지혁은 순간 일본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어로 물었다.
[ 일본인이십니까? ]
[ 아? 일본인이세요? ]
[ 아뇨. 저는 한국인인데 일본어를 좀 할 줄 압니다. ]
[ 아~ ]
곧이어 지혁은 그녀의 요청대로 계단을 올라가서 쪽 가다보면 오른쪽에 있을 거라는 식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어휴….’
지혁은 이제 좀 음악을 들을 수 있겠거니 하면서 핸드폰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툭툭.
이어폰을 귀에 꽂고 벽에 등을 기댄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상태로 노래를 듣던 지혁은 첫 곡이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팔쪽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눈을 떴다.
그러자, 20대 중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여성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지혁은 한쪽 이어폰을 빼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저… 혹시 번호 한 번만 주실 수 있나요?”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떨린다. 아, 길을 묻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혁은 순간 당황했지만 가볍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저 여자친구 있어요.”
“아, 네.”
당연히 여자친구같은 건 없다. 신과의 만남 이후로 이런 일이 꽤나 빈번하게 일어났다보니 이제 면역이 생긴 것이다. 지혁은 얼굴이 붉어지며 도망치듯 멀어져가는 여인을 쳐다보다가 다시 뺐던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의 음악감상을 방해하는 요소가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텁.
그로부터 대략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왜 이렇게 안오지 싶어서 벽에서 몸을 떼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지혁은 갑작스럽게 목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상체를 숙였다.
승현이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악동처럼 실실 웃고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지혁은 이어폰을 빼서 핸드폰에 둘둘 감아 주머니에 넣었다.
“늦어요.”
“쏘~리. 집가서 씻고 옷도 갈아입고 하는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더라고.”
지혁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피부가 좀 타서 구릿빛이 되었고 근육이라도 붙었는지 체형도 살짝 커진 느낌이다.
“니는 더 잘생겨졌네.”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지혁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씨가자. 게임하고 싶다.”
지혁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휴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아까운 시간을 게임하는데 쓰겠다고요?”
“야. 니가 렐을 안해서 그래. 훈련소에서 행군할때도 계속 렐 생각만 하고 그랬다. 자대가서 이리저리 치일 때는 더 하고 싶더라.”
렐?
“형도 렐 하세요?”
“당연하… 야, 너 렐 하냐? 너 겜 안하지 않아?”
“한지 두 달쯤 됐어요.”
지혁의 말에 승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야. 그럼 같이 하면 되겠네. 니 게임 안했어서 안 그래도 피씨가자고 말하기도 좀 그랬는데. 이 기특한 녀석. 그럼 바로 가자!”
승현은 신이나서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피씨에서 게임 좀 하다가 밥 먹고 노래방 콜?”
“노래방이요?”
지혁의 반문에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 노래 잘하잖아. 그때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내색을 안했을 뿐이지 니 노래 부르는 거 듣고 깜짝 놀랬다는 거 아니냐. 음흉한 샛기. 노래방 가자고 하면 그렇게 질색을 해댔으면서.”
당시의 지혁은 정말 노래를 못 불렀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했다.
피씨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컴퓨터를 키는데 승현이 물어왔다.
“야 근데 니 만렙은 찍었냐?”
“네.”
“오~ 그럼 듀오할까?”
지혁은 순수한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형 티어 어딘데요?”
“나? 플레. 왜? 니 설마 브실은 아니지?”
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이나 하죠.”
“뭐? 캬캬캬캭. 진짜 브실이냐? 브론즈냐 실버냐?”
지혁은 대꾸해줄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화장실 좀 갔다 오겠다는 말을 하고서는 자리를 벗어났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은 뒤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면서 나온 지혁은 컴퓨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승현의 옆자리에 가서 앉은 뒤에 로그인을 했다.
“형. 뭐 마실래요?”
“어? 어. 난 콜라.”
지혁은 원격으로 콜라 2개를 주문하고서 곧장 게임에 접속했다.
“야 니 아이디가… 챌린저 유? 크크크. 아이디는 챌린저네.”
“아이디만은 아닐 겁니다.”
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승현에게 온 친구초대를 받았다. 그러자 친구창에 30레벨을 달성한 그의 아이디가 떴다. 승현의 아이디는 ‘지존소드킹’이었다. 지혁은 곧장 게임방을 개설해서 그를 초대했다. 지…존…소…드…킹.
“아이디가 이게 뭐에요. 유치하게씨리.”
“난 야사오밖에 안해. 그럼 어디 우리 지혁이의 티어를 한 번 볼까?”
아이디에 마우스 커서를 올리면 티어라고 하는 게임 내의 계급이 표시되게 된다. 낮은순서대로 브론즈-실버-골드-플레(티넘)-다이아(몬드)-마스터-챌린저 순이었다. 사실 플레티넘만 하더라도 상위 10%이상의 실력자들의 집단이었다. 승현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
[ 챌린저 I 티어 ]
아마도 승현의 화면에는 이렇게 떠 있을 것이다.
승현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화면을 쳐다보는 것을 힐끗 살펴본 지혁은 게임 매칭을 돌려둔 뒤에 무심하게 왼손으로 턱을 괴고서 오른손으로 마우스 스크롤을 휘휘 내리며 오늘의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야. 너 챌린저야?”
“네? 네. 말했잖아요. 아이디만은 아닐 거라고. 그래서 듀오 안돼요.”
지혁은 최고레벨인 30레벨을 달성하자마자 랭크게임을 돌렸고, 배치고사라 불리는 초반 10개의 게임을 모두 승리하면서 한번에 골드를 달성했다. 그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3주만에 챌린저 티어에 입성, 현재는 전체랭킹 4위에 등재되어 있었다. 점수는 1090점 정도. 지혁에 비해 승현의 티어가 많이 낮으므로, 둘이서 같이 랭킹시스템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점수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반게임을 하는 것이다.
“자, 잠깐만….”
승현은 당황했는지 그렇게 말하고서는 전적사이트에 들어가는 기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혁은 오늘치 웹툰을 보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153승 48패. 랭킹 4위.”
지혁의 아이디를 검색해보았는지, 승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게임이 딱 잡혔다.
“형 근데 주라인이 어디에요?”
“어? 어… 나 원딜.”
“그럼 제가 서폿갈게요. 봇듀하죠?”
“그, 그럴까?”
게임이 시작되었다.
[ 크와아악 : 아니 랭킹 4위 뭐임? ]
[ 디스포인트 : 누가 4위임? ]
[ 크와아악 : 크레쉬 챌린저 1000점임 ]
지혁은 채팅창의 반응을 무시하고 게임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반게임의 수준은 그가 하는 랭크게임에 비하면 굉장히 낮았고, 때문에 서포터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성장세를 보여주며 그가 판을 휘잡아버리고 말았다.
지혁은 콜라캔을 따면서 말했다.
“재미가 없는데요?”
“야… 너 개잘한다.”
승현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기색이자 지혁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까까지 으스대던 사람이 태도를 돌변하는 것이 웃겼기 때문이다.
“너 혹시 부캐 없냐?”
“없어요.”
“아. 아디 하나만 딱 있으면 바로 버스 타는건데.”
아쉬움을 흘리는 승현의 모습을 보며 실소한 지혁은 다시 일반게임을 돌렸다.
그 뒤로 5판을 더했다. 당연히 다 이겼다.
“밥이나 먹으러 가죠.”
지혁은 게임을 끄며 말했다. 렐은 한 판 하는데 평균적으로 3~40분 정도가 소요되는 게임이고, 때문에 시간도 7시가 다 되어가는 상황.
점심도 대충 떼웠기 때문에 지혁은 배가 고팠다.
그렇게 둘은 함께 PC방을 나왔고, 근처의 고깃집에 들렀다. 고기를 구워먹으면서도, 승현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거기서 리쿠신이 궁으로 방생을 한게 오바 아니었냐?”
“그것도 있긴 한데, 애당초 형이 물리면 안 됐어요. 거기서 왜 그쪽으로….”
대처로 시시한 게임들이 이어졌고, PC방을 나오기 전에 했었던 마지막때에 상대팀에 다이아 티어들이 여럿 잡혀서 고생을 좀 했었다. 결국 이기기는 했지만 그 게임은 무려 50분이 넘어가는 장기전이 되었었다. 그래서 특히 할 얘기도 많았고, 지혁과 승현은 그 판을 복기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게임이야기를 하면서 떠들던 중에 승현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