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비상(飛上) =========================================================================
“오빠. 굳이 이렇게까지 안해줘도 돼.”
은서가 고등학교에 가는 개학 당일이 되었다. 지혁은 새로 산 하얀색 목도리를 둘러주며 지혁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은서의 복장을 위아래로 점검했다.
완벽하군.
“예쁘네.”
“고맙지만 더워.”
“아직 쌀쌀해. 입고가. 정류장까지 같이 가줄까?”
“됐네요. 갈게.”
은서가 쾌활하게 말하고서는 집문을 나선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혁은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구멍으로 물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다가 현관 옆에 자리한 휠체어를 쳐다보았다. 오래 사용해서 낡아있는 그것은 예전에 은서가 타고 다녔던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그것은 마치 집안을 장식하는 조형물처럼 이제 누구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지혁은 거기서 은서의 예전 학교생활과, 지금의 학교생활이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평범한 아이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도….’
힘내자.
힘내서 놀자…!
지혁은 아침밥상에 놓여있는 반찬 등을 정리해서 치우고 간단하게 설거지를 한 다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킨 지혁은 곧장 ‘아이튜브’에 접속했다.
‘아이디는 뭘로 하지?’
잠깐 고민하던 지혁은, 어쩌다보니 굳혀진 아이펜이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소설가로써의 필명은 ‘조커 유(Joker U)’이지만, 그 이외의 모든 창작활동을 아이펜이라는 이름으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ipen studio ]
‘아이튜브는 두고두고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미리 아이튜브의 아이디를 선점해두려고 한 것이었다.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뤄오던 것인데 오늘 작정하고 마음을 먹은 뒤에 곧장 해버린 것이다.
스튜디오 정도면 적당한 네임인 것 같다. 그렇게 정리를 끝낸 지혁은 바로 인터넷 검색창에 글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 레전드 리그 다운 ]
입력하자마자 결과가 쭉 나열된다. 지혁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 자료실로 들어가서 클라이언트를 다운받았다.
어제, 마침내 미니게임천국 2부를 완결낼 수 있었다. 물론 연재가 끝났다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집필을 마무리 지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지혁은 이제 그간의 노고를 치하할 겸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끝에 지혁은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게임 ‘레전드 리그’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어제의 일. 오늘은 계획을 실행하는 중이다.
‘이게 가장 인기가 많던데.’
처음에는 은서에게 게임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은서 역시 게임을 즐기면서 해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순전히 돈을 벌고자 게임을 했을 뿐, 재미도 흥미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혁은 묻는 것을 관두고 자체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10분도 되지 않아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이 ‘레전드 리그’라는 것이 현존하는 게임들 중에서는 정점이라는 사실을.
‘그래픽은 별로네.’
사실 집의 컴퓨터로 돌아갈 수 있는 게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별들의 전쟁’이라는 국민 게임이자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나름대로 잘 돌아간다는 것 같은데 레전드 리그도 잘 돌아갈지는 의문이었다.
[ 앳쉬(atshe)를 소환의 제단 근처에 있는 목표 지점으로 이동시키십시오. ]
“좀 끊기네.”
그리고 지혁은 게임의 튜토리얼을 플레이한 순간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게임의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잘한 컨트롤이 중요하다는 이 게임에서 본 실력을 다 발휘할만큼은 되질 못했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즐기자고 하는 것이고, 엄청 심하게 끊기는 것은 아니니까 지혁은 그냥 마음 편하게 즐기기로 했다.
지혁의 아이디는 ‘Challenger Yoo’. 이 게임엔 등급제라는 것이 있었는데, 최고 등급이 도전자를 의미하는 ‘Challenger’라고 하기에 챌린저를 꼭 찍어주겠다는 의미로 만든 것이었다. 조커 유(Joker U)처럼 뒤에 알파벳을 붙이려고 했는데, ‘Challenger U’는 있는 아이디라서 부득이하게 ‘Yoo’를 사용하게 되었다.
‘AI랑 하면 실력이 늘까?’
컴퓨터랑 대전하는 것이 있고, 플레이어랑 대전하는 것이 있었다. 고민을 하던 지혁은 그냥 사람들이랑 플레이하는 대전을 선택했다. 물론 재능을 과신하는 건 아니다. 그냥 맞으면서 배우기로 한 것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뭐야, 오빠 게임해?”
“어, 왔어? 잠깐만~”
지혁은 게임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너무 재미있었다.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은 천재임이 틀림없다. 아침부터 시작된 플레이는 은서가 돌아오는 밤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렐(lel - 레전드 리그의 약자)이네.”
“은서 너도 이 게임 알아?”
“응. 해본 적은 없지만.”
가방을 툭 내려놓으며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은서가 말했다.
“와. 오빠 잘하네. 11킬 0데스?”
악마의 게임. 그리고 악마의 재능. 두 개가 합쳐지니 지혁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지혁은 화려한 컨트롤로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하며 흠씬 두들겨 패다가 승리를 거머쥐고 나서야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후우….”
[ 미드님 개잘하시네. 부캐임? ]
[ 버스 ㄱㅅ ]
[ 아니 우리팀 케사딘 개트롤임 ]
[ 정글이 갱을 안오는데 어쩌라고 ]
[ 수고하셨습니다. ]
좋은 승부였다 제군들.
지혁은 게임이 끝나고, 채팅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로비로 나왔다.
온종일 게임을 붙잡고 있었더니 하루가 증발해버렸다. 물론 따로 해야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긴 한데, 막상 창문너머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바깥의 모습이 보이자 지혁은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경각심이 생겼다. 심지어는 아침밥 이후로 뭔가를 먹지도 않았다.
지혁은 서둘러 게임을 종료하면서 물었다.
“학교는? 어땠어?”
“뭐…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냥저냥 몇 명이랑 친해진 정도?”
은서가 목도리와 외투를 벗으면서 말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였지만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는 감출 수 없나보다. 지혁은 은서가 성공적으로 반에 녹아들었음을 깨닫고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은서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다가 지혁쪽으로 홱 돌아보았다.
“근데 오빠. 설마 오늘 하루종일 게임만 한 건 아니지?”
갑작스러운 공격에 지혁은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으, 응? 아… 그, 그게….”
은서는 그런 지혁의 행동에서 긍정을 읽어냈는지 표정을 싹 굳히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말했잖아. 오빠가 소설을 쓰는 것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국제적인 낭비야. 오빠는 무조건 글을 써야만 해.”
“하, 하하….”
지혁은 은서의 말에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랬다. 저번에 외식을 가서 지혁의 글을 읽어보게 된 은서는 지혁의 소설에 푹 빠져서는 공부도 뒷전이 되어버렸을 정도였다. 결국 보다못한 지혁이 날을 잡아서 은서를 호되게 혼내고 나서야 하루종일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일은 없어졌지만, 약간의 시간만 나도 핸드폰을 꺼내서 소설을 읽기 바쁠 정도로 은서는 지혁의 소설에 푹 빠져있었다.
이제 은서는 지혁의 팬을 자처하면서 글을 쓰길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른 상태였다.
“어제 말했잖아. 미니게임천국 2부 완결 냈다고.”
“그럼 3부 쓰면 되겠네. 만두 구워줄테니까 빨리 써!”
특히 은서의 마음에 쏙 든 것은 다름아닌 미니게임천국. 그녀는 지혁이 최근 미니게임천국의 2부를 집필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집안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을 정도였다. 얼마나 극성인지 여간 부담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서가 그러니까 말리지도 못하고 총체적 난국이다.
“아니, 열심히 써왔으니까 쉬면서 머리도 좀 식히고 해야….”
“돈 벌어서 이사 가야지 오빠.”
말은 잘한다.
은서가 그런 욕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물론 그런 마음이 약간은 있기야 하겠지만, 지금 지혁에게 소설을 쓰라고 종용하는 것이 돈을 벌어오라는 이유가 아님은 너무나도 뻔했다. 그것은 지혁도 알고, 은서 본인도 알 것이며 제3자가 봐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은서는 애당초 그런 요구를 할만한 성격도 아닌데다가, 방금까지의 언행만 봐도 그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혁은 다소 궁색한 느낌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긴 하지만 이제 연재방식도 바꿨고 해서 아마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지금 연재하고 있는 것만해도 충분해.”
은서는 씻기 위해서 화장실로 들어갔기 때문에 지혁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못한 척을 하는 것 같았다. 살짝 열린 욕실문 사이로 그녀의 교복이나 속옷 등이 툭툭 튀어나오고, 문이 슬며시 닫혔다. 샤워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지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면서 그녀가 벗어놓은 옷들을 수습했다.
‘이건 언제 올려놨대?’
가스레인지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그 위엔 거대한 찜기가 놓여있다. 남는 손으로 슬쩍 뚜껑을 열어보니 만두가 가득 들어 있었다.
“…….”
지혁은 빨래바구니에 옷가지들을 넣어두고 TV를 켜서 세상이 어떻게 미쳐 돌아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뉴스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끼익.
서둘러 씻은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트레이닝복을 입고있는 은서가 나타났다. 그녀는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서 곧장 만두 쪽으로 가서 확인부터 하는 기색이었다. 알맞게 익었다고 생각된 것인지 만족한듯한 웃음과 함께 불을 끄고서 큰 접시에 만두를 후두두둑 쏟아내더니, 고춧가루와 진간장, 식초, 깨를 순식간에 버무려서 만두간장을 만들어냈다.
만두가 산처럼 쌓인 접시와 만두간장을 나란히 내려놓은 그녀는 수건으로 긴 머리를 탈탈 털면서 말했다.
“자. 먹으면서 써.”
쓰긴 뭘 써?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지혁은 내심 배가 고팠기에 말없이 만두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본 은서는 곧장 헤어 드라이기 쪽으로 가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상한 어투로 물어온다.
“오빠, 그럼 김태성이 이하연보다 재능은 더 뛰어난거야?”
김태성은 다름아닌 미니게임천국의 주인공이며, 이하연은 그런 주인공에 대적할만한 재능을 가진 여주다. 그런 설정.
지혁은 만두를 씹어먹으면서 시선은 TV에 고정한채로 답했다.
“당연하지. 설정상 김태성보다 재능이 뛰어난 녀석은 없어.”
이런 질문을 해오는 걸로 봐서는 지금 전개되는 내용이 김태성이라는 초고수에게 대항마로써 의문의 플레이어가 등장하고, 둘이 치고박고 싸운다는 내용인 것인 모양이다. 물론 지혁이 쓴 글이지만, 현재 연재하고 있는 화의 내용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빠! 그걸 말해버리면 어떡해!”
“…?”
지혁은 갑자기 은서가 소리를 꽥 지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뒤쪽을 쳐다보았다. 은서는 울상을 짓고서 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니가 물어봤잖아.”
“나는 그냥 김태성과 이하연 둘 사이의 우열에 대해서 물어봤지 김태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구!”
“아, 미안미안.”
지혁은 어이가 없었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이런 일로 화를 내기도 뭐했기에 그냥 그러냐는 식으로 말하고 넘겼다.
“우씨! 독자님들! 작가가 강제로 스포해요!”
지혁은 이어진 은서의 말에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거울을 보면서 헤어 드라이기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보아 머리 말리는 것에 집중하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거면 그냥 완결까지 다 보여준다고 할 때 보지 왜 굳이 연재속도에 맞춰서 본다고 하는 것인가. 지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느니 그러면 다른 독자들은 뭐가 되냐느니 할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지혁의 골머리를 썩힐 인재였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계속해서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도 그렇고, 이거 왠지 괜히 소설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동생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혁은 새로이 만두 하나를 집어들었다.
맛있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