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歌(노래 가) =========================================================================
새하얀 공간이 보인다.
지혁은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이 말하기를, 룸은 떠나는 순간 이전에 있었던 모든 것이 초기화되고 다시 이 하얀색 공간이 된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만들어낸 USB에 써낸 소설을 모두 집어넣고 돌아올 때, 조심스럽게 확인해보았던 것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없는 것이라면, 2년의 시간동안 써온 막대한 분량의 소설이 모두 날아가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여기에서도 취한 건 똑같구나.’
지혁은 떠나오기 전 노래방 안에 있던 푹신한 소파 같은 것을 머릿속으로 연상했다. 그러자 ㄷ자 모양의 소파가 생겨났고, 지혁은 그대로 드러누웠다.
* * *
‘아이고 머리야….’
두통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깨어난 지혁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 순간, 구토기가 몰려왔고, 지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어제 먹었던 음식의 내용물을 뱉어내고 말았다.
“우웩! 우웨에에엑!”
헉…. 헉….
세 번에 걸쳐서 토를 하고 나서야 진정이 된 지혁은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과 옷소매가 지저분해 진 것을 깨달은 지혁은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그것들을 모두 말끔히 치워냈다.
‘물….’
물을 만들어내서 벌컥벌컥 들이키니까 좀 살 것도 같다.
‘아니군.’
아니, 그래도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지혁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먹을 때만 지독하게 쓴 것이 아니라, 먹고나서도 이렇게 괴로운데, 대체 왜 사람들은 술을 즐겨 마시는 것인가? 그의 기준으로써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문제였다. 물론 소설을 쓸 때 그가 지금껏 보아왔던 경험을 토대로 술을 마시는 장면들을 풀어내기는 했었지만, 그저 생각만 해보는 것과 직접 경험해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지혁은 룸에서 있는 3년간 술을 먹어보자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었다.
지혁은 곧장 노트북을 소환했고, 작은 집을 하나 소환했다. 이번에는 오래있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호화로운 집은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해장에 좋은 음식을 검색해서 나온 콩나물국을 후루룩 들이켰다.
‘아. 정화된다.’
신은 지혁에게 경고했다. 여러번에 걸쳐서.
그것은 분명 신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는 수없이 많은 소환자들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고 했다. 애당초 신이 소환자들을 소환해낸 목적은 그들에게 특혜를 주어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직접 보는 것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수없이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소환자들이 통상적으로 가졌던 후회나 고민들을 토대로 내게 말을 해준 것이 분명했다.
‘이미 조금은 느끼고 있지만.’
승현은 그렇다 치더라도 은서는 그의 가족이기에 미묘한 변화 정도는 확실하게 눈치를 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힘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다.
“이번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가야겠어.”
죽이되든 밥이 되든 한 달. 지혁은 자신이 정한 최소한의 시간을 노래 실력을 갈고 닦는데에 사용하고서 룸을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슬슬 가볼까.’
지혁은 살짝 피곤한 상태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노래실력을 갈고닦는데 열과 성을 다 했다. 이제는 나가기만 하면 될 일. 그러나 지혁은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할 사실 하나와, 새로이 생각해볼 쟁점 하나를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현대에서의 사이클 그대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인지하고 있어야할 점은 이것.
지금시점에서 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뒤에 현대로 넘어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혁은 잠을 자고 일어난 상태에서 밤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의 리듬이 깨져버리고, 밤과 낮이 바뀌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엄청 대단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혁은 이전에 룸에서 현대로 돌아갈때도 적당히 피곤한 상태에서 주문을 외웠다. 밤에 출발했기에, 신체의 상태도 그에 맞춘 것이다.
‘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혁이 생각해볼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었다.
이제까지 룸을 오고가는 과정에 술이 개입된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지혁은 현대에서 넘어올 당시에 만취에 가까운 상태였고, 지금은 매우 말끔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이 경우 다시 넘어가게 되면 현대의 상태는 그대로일 것인가, 아니면 룸에서의 지혁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사실 언제고 부딪힐 문제이기도 했다. 앞서 말한 수면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현대의 지혁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서 준비를 해놓았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때 넘어간 것은 실험군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에서 룸으로 돌아갈 때는 현대의 상태가 적용된다는 것을 이번에 술 취하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룸에서의 상태가 적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일이겠지만….’
그저 그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다.
“뭐, 가보면 알겠지.”
한 달 정도 지냈던 공간을 슥 둘러본 지혁은 미련없이 고개를 돌렸다. 3년을 넘게 지냈던 공간과도 별다른 감흥없이 작별인사를 했었으니, 짧은 시간동안 보낸 이곳에 붙일 정이라는 것도 별로 없었다.
‘룸(Room).’
스아아아악!
눈을 떠 보니,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화장실의 모습이 보였다.
‘룸에서의 상태가 적용되는 거군.’
솔직히 룸에 들어가자마자 엎어져서 자고, 일어나자마자 토를 했던 기억은 지혁에게 끔찍함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지혁의 입장으로써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근데….’
방이 어디였지?
지혁은 상당히 술이 취해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한 달이라는 시간의 영향도 있겠지만, 어쨌든 몇 번 방을 잡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낭패감을 느낀 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하는 수 없이 문이나 창문 틈 사이 등으로 일일이 확인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 끼야아아아아!
여기는… 아니고.
‘여긴가?’
노래를 부르고 있지는 않는데, 안에 사람이 있는 건 확실하다. 이러면 승현이 있는 방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혁은 문을 벌컥 열어보았다.
“…?”
“뭐예요?”
“아, 죄송합니다….”
지혁은 말꼬리를 흐리며 살며시 문을 닫았다. 남자 셋이서 적당히 앉거나 눕듯이 자리한 채로 곡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지혁은 신중하게 문을 열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긴가?’
지혁은 이번에도 사람은 있는데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 방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제대로 데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지혁은 마치 햇빛을 막듯이 손으로 날을 세워 문에 대고서 내부를 확인하려고 용을 써보았다.
그때였다.
“저기요. 뭐하세요?”
“네? 아. 그게….”
지혁은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뒤를 돌아본 뒤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검은색 구두에 짧은 회색빛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하얀색 스웨터를 걸치고 있는 여성이 불쾌한 표정을 지은상태에서 지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확 펴졌다.
“여기 저희 방인데, 무슨 일이세요?”
목소리가 갑자기 사근사근해진 것 같은데.
‘와. 예쁘다.’
지혁은 나타난 여성의 미모가 상당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다시 보니 상당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어딜가도 꿇리지 않을 것 같은 예쁜 여자였다.
“아… 제가 방이 어딘지 잊어 먹어가지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지혁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는 그런 지혁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더니,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고선 옆으로 고개를 돌려 지혁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 혹시 같이 노실래요?”
“…예?”
뜬금없는 말에 눈동자를 굴리던 지혁이 멍청히 반문하자, 그녀가 새침하게 말했다.
“싫으시면 말구요.”
지혁은 그렇게 말하고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모션을 취하려는 그녀의 모습에 황급히 말했다.
“아! 그게 아니라, 어… 일행이 있어가지고 물어보고 와도 될까요?”
“몇 분이에요?”
“한 명입니다.”
그녀는 잠깐 멈칫하는 것 같더니 차분히 말했다.
“네. 그리고 혹시 안 되셔도 와서 말씀해주셨으면 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다릴게요.”
싱긋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지혁은, 열린 문 사이로 소파에 앉아있는 두 명의 여성이 얼핏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혁과 대화를 나눈 여성만큼은 아니여도 특색있는 미모를 가진 여성들이었다. 그녀들도 문틈 너머로 지혁과 눈을 맞추는 기색이었다.
철컥.
살포시 문이 닫히고, 지혁은 우두커니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러나 지혁도 남자였고, 저런 미인이 같이 놀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떨림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지혁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잡은 방을 찾아내는게 최우선이다.
그러다 문뜩, 하나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카운터에 물어보면 되잖아.’
지혁은 빠르게 카운터로 이동했고, 30대 중후반쯤 되어보이는 이모를 만날 수 있었다.
“아. 7번방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혹시….”
지혁은 9번방에 합류해서 놀아도 되겠냐는 말을 했다. 그러자 주인이 난색을 표하려고 했다. 그것을 확인한 지혁은 급히 말했다.
“대신 안주랑 술 많이 시키겠습니다. 어떨까요?”
“…그럼 뭐, 지금 바로 주문을 하신다면 가능합니다. 방금 들어가시기도 했으니까.”
지혁은 즉시 간단한 안주와 술을 주문했다. 노래방비와 맞먹는 금액이었지만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방을 취소하는데 성공한 지혁은 곧장 7번방으로 향했다.
벌컥.
“왔냐?”
승현은 좀 취해보이기는 했어도, 지혁과는 다르게 꽐라가 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형. 다른 방에서 같이 놀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괜찮죠?”
“뭐? 갑자기 뭔 소리야.”
승현의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일 것이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지혁은 분명 한 소리 했을 것이다.
“화장실 복도에서 만났는데, 같이 놀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자고 했거든요.”
“뭐? 니가? 하하하하! …예쁘냐?”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어젖히다가 표정을 싹 굳히고 해오는 노골적인 질문에, 지혁은 멈칫했다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승현이 ‘흐음~?’ 하는 비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머금은 채 지혁을 쳐다본다.
“저쪽은 몇 명인데?”
“세 명… 인 거 같긴 한데.”
“와… 대단하긴 하다. 면상이 또라이급이니까 이런 일도 일어나는 구나. 팔자에도 없는 역헌팅이라니. 크크크크.”
남의 얼굴보고 면상이라니. 그러나 지은 죄(?)가 있기에 지혁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자. 아 근데 그럼 여기가 너무 아깝지 않나?”
“벌써 취소하고 왔어요. 그 방에 안주랑 술 추가하는 걸로.”
지혁의 말에 승현이 캬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추진력 보소? 얼마나 예쁘길래 이러냐. 갑자기 궁금해지네.”
지혁과는 달리 그는 이런 상황인데도 다소 여유로워 보였다. 그 사실이 의아했지만 지금 지혁은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승현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선 문을 열고 나섰고, 지혁은 그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승현은 좌우를 훑어보더니, 근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어디고? 안내해 보거라.”
“저기에요.”
사실 인접해있는 방이었다. 그래서 도착이랄 것도 없이, 몇 걸음 걷자 곧장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후우….
승현은 지혁이 열라는 듯이 그를 재촉했고, 지혁은 문고리를 잡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벌컥!